조통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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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통(趙通, 1143년[1]~?)은 고려 때의 학자·문인이다. 자는 역락(亦樂)이다. 본관은 옥과(玉果: 오늘날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이다.[2]

주요 이력[편집]

양주(梁州: 오늘날 경상남도 양산시)의 지방관을 지낸 적이 있다.[3]

경서(經書), 사서(史書),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두루 통달했기 때문에 명종이 여러 차례 불렀다.[2]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차례 승진해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고공낭중(考功郎中), 태자문학(太子文學)으로 전보되었다.[2]

왕명으로 금나라에 파견되었다가 3년 동안 억류되기도 했다.[2]

1197년(신종 즉위년)에 금나라에 파견되었고,[4] 다음 해인 1198년(신종 원년)에 금나라에서 돌아왔다.[5]

1199년(신종 2년)에는 장작소감(將作少監)에 있었으며, 동경(東京: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도적이 발생하자 조정에서는 이들을 회유하려고 파견되었다.[6]

1200년(신종 3년)에 소부감(少府監)에 있었으며, 진주(晉州) 안무사가 되었다.[7]

벼슬에서 물러난 뒤 최당, 백광신(白光臣) 등과 기로회(耆老會)를 조직하고 시작 생활을 즐겼으며,[8] 이인로·오세재 등과 벗하여 강좌칠현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9]

임춘과 교유가 있었다.[10]

같이 보기[편집]

참고 문헌[편집]

  • 《고려사》
  • 《파한집》
  • 《졸고천백》
  • 《서하집》
  • 《동국이상국집》

각주[편집]

  1. 이 연도는 최해, 《졸고천백》 권1, 해동후기로회(海東後耆老會) 서문 중 “及丙寅。 (중략) 軍器監趙通。其九也。年六十四。”에 근거해 생년을 역으로 계산한 것이다. 병인(丙寅)은 1206년(희종 2년)이다.
  2. 《고려사》 권102, 〈열전〉15, 이인로 부 조통
  3. 이인로, 《파한집》 권 상, 天水亦樂, 將赴梁州倅
  4. 《고려사》 권21, 〈세가〉21, 신종 즉위년(1197년) 10월 7일(병자)
  5. 《고려사》 권21, 〈세가〉21, 신종 원년(1198년) 5월 9일(병오)
  6. 《고려사》 권21, 〈세가〉21, 신종 2년(1199년) 2월 2일(갑자)
  7. 《고려사》 권21, 〈세가〉21, 신종 3년(1200년) 5월 15일(기사)
  8. 최해, 《졸고천백》 권1, 해동후기로회 서문
  9. 이규보, 《동국이상국집·전집》 권 21, 七賢說
  10. 임춘, 《서하집》 권1, 寄趙亦樂破肉戒·戲亦樂近不作詩와 권4, 與趙亦樂書·同前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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