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룡
정기룡 | |
별명 |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시호 충의(忠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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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562년 |
출생지 | 경상도 곤양현 금양면 중평리(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
사망일 | 1622년 |
사망지 | 통영 진중 |
국적 | 조선 |
본관 | 진양(晋陽) |
부모 | 정호(鄭浩) |
종교 | 유교 |
정기룡(鄭起龍, 1562년 ~ 1622년)은 조선의 무신이다.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아명은 무수(茂壽)이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생애
[편집]1562년 명종 17년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에서 증좌찬성 정호(鄭浩)의 아들로 태어났다.[1] 첨정공(僉正公) 정중공(鄭仲恭)의 15세손이다. 1580년 선조 13년 고성에서 향시에 합격하고,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조의 명에 따라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
1590년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의 휘하에서 일하였고, 다음 해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시기에 별장으로 승진하여, 경상우도 방어사 조경의 휘하에서 종군하면, 거창 전투에서 일본군 500여명을 격파하고, 금산 전투에서 정기룡의 직속상관인 조경을 구출하였다.[2] 이후 곤양의 수성장이 되어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사천 전투에서 명나라 군과 연합작전 중 총사령관 마귀의 무리한 작전으로 연합군은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패배하였다.
어어 상주 목사 김해의 요청으로 상주 판관이 되어 상주성을 성공리에 탈환하고, 이후 진주 목사 김시민을 도와 진주성 부근에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주둔하여 왜군을 견제함으로써 진주대첩에도 다소 기여했으며 계속하여 공을 세워나갔다.
1593년 전공으로 회령부사에 승진되었고, 그 해 왜적에게 왕자를 내준 반역자 김수량 등 16인을 효수하였다.[3] 1594년에는 상주목사가 되어, 통정대부에 올랐다.
정유재란 때에 고령에서 적 장수를 생포[4] 하고 병마절도사가 되어 일본군이 철수한 성주, 합천, 초계, 의령 등 여러 성을 탈환한다. 1601년에는 울산부사에 올랐고 1610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으며 1617년에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라 삼도수군통제사와 겸직했다. 1622년 통영 진중에서 병사했다. 상주 충렬사에 배향[5] 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에 그의 묘가 있으며 경북 기념물 제13호이다. 또한 현재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상촌 마을에 사당인 '경충사'가 있고 중평리 당산골 진양 정씨 사당 아래쪽 100m지점이 정기룡 장군의 생가가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밭이 되어 있고 생가 뒤쪽에 있던 대밭이 약간 남아 있다.
일화
[편집]전설에 따르면 정기룡 장군의 어머니는 홍역에 걸려 출산 중 죽게 되는데, 가족이 염을 하던 중 그의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기가 있는 것을 보고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살기가 느껴지더니 사흘 후 어머니는 사망하고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정기룡이라고 한다. 정기룡은 태어날 때부터 우렁찬 울음 소리를 내고 하늘엔 무지개가 떠 마을 사람들은 영웅이 탄생한 것이라 믿었다. 정기룡은 어려서부터 비범하고 용감하였으며,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강씨 부인을 잃는 슬픔에도 용감히 싸웠다고 한다. 그리고 강씨 부인을 잃은 후 다시 결혼하게 되는데 그의 부인(권씨) 또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아름다웠으며 나이가 들수록 더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권씨는 아버지의 설득에도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어느새 노처녀가 되고 정기룡 장군을 만나고 나서야 정기룡 장군과 결혼하겠다고 하였다. 정기룡 장군은 전란 중의 상황과 그의 옛 부인을 떠올리며 고민했지만 결국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의 부인(권씨)은 말을 키우고 있었는데 날쌔고 힘이 세어 정기룡 장군이 타고 다녔다고 하며, 이 말이 장군이 공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정기룡 장군의 본명은 정무수로 정기룡이 된 사연은 이렇다. 정무수는 과거를 보러 서울로 떠나게 되는데, 그 당시 임금인 선조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종각에서 용이 자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종각에 있는 사람을 데려오라 했더니 정무수였다고 한다. 그가 무과 시험에서 무용이 출중하여 선조가 기룡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가족 관계
[편집]- 아버지: 정호(鄭浩)
-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
- 형: 정몽룡(鄭夢龍)
- 형: 정인룡(鄭仁龍)
- 본처: 진주강씨(晉州姜氏), 강세정(姜世鼎)의 딸
- 후처: 예천권씨(醴泉權氏), 권홍계(權弘啓)의 딸
- 아들: 정익린(鄭翼麟)
관련 문화재
[편집]드라마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충의사(정기룡 장군 유적지)”. 한국관광공사. 2008년 11월 17일에 확인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이 모습이 마치 당양 장판에서 아두 유선을 구하려고 뛰어든 조운과 흡사한 듯 보여 훗날 정기룡의 후손들로부터 '임진왜란의 조자룡'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 ↑ 조선왕조실록 (1593년 6월 26일). “《선조실록》 26년, 39권”. 2008년 12월 22일에 확인함.
- ↑ 실록을 비롯한 다른 사서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고 오직 행장록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허구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 ↑ 현재는 충의사로 이전하여 배향
외부 링크
[편집]- 한국종합인물정보 시스템-정기룡
- 충의사 여행기 Archived 2016년 3월 11일 - 웨이백 머신
- 2004년 12월 이달의 호국인물[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육지의 '이순신 장군' 하동의 정기룡 장군
전임 류지신 |
제15대 삼도수군통제사 1617년 4월 - 1619년 9월 |
후임 김예직 |
전임 김예직 |
제17대 삼도수군통제사 1621년 4월 - 1622년 2월 |
후임 원수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