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 (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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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
張步
유영의 한나라의 제왕
재위 27-29년
군주 유영, 유우
후한의 안구후
재위 29-32년
군주 후한 광무제
신상정보
사망일 32년 음력 8월
친인척 동생 장홍, 장람, 장순

장보(張步, ? - 32년)는 중국 신나라의 반란 지도자로, 문공(文公)이며 낭야군 불기현(현 칭다오시 청양구) 사람이다.

생애[편집]

신나라한나라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수쳔 명을 모아 불기현의 주변 현들을 공략하고 오위장군(五威將軍)을 자칭해 낭야군에 웅거했다.

현한한 경시제가 왕굉(王閎)을 낭야태수로 파견하자 맞싸워 이겼다. 한편 현한의 양왕 유영이 경시제에게서 자립하면서, 장보의 강병을 탐내 조서를 꾸며 보한대장군(輔漢大將軍)·충절후(忠節侯)로 삼고 서주와 청주 두 주를 감독하게 했다. 장보는 이를 받아들이고 청주의 북해군 극현에 자리잡고 동생들 장홍(張弘)은 위장군(衛將軍), 장람(張藍)은 현무대장군(玄武大將軍), 장순(張徇)은 고밀태수로 삼았으며, 장수들을 파견해 태산·동래·성양·교동·북해·제남·제군 등을 공략했다. 장보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왕굉은 직접 장보를 찾아가 설득하려 했으나, 대치 끝에 장보가 왕굉을 거꾸로 감동시켜 왕굉은 장보에게 상빈의 예로 대우받고 군의 통치를 위임받아 사실상 그의 막빈이 되었다.

건무 2년(26년), 유영과 싸우고 있던 후한 광무제가 서주와 청주를 어루만지도록 보낸 태중대부 복륭을 받아들여 광무제에 속했다. 건무 3년(27년) 봄, 광무제가 광록대부로 승진한 복륭을 다시 보내 동래태수로 임명했는데, 유영이 자신을 제으로 봉한다 하자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복륭이 유씨 외에는 왕이 되지 못하게 한 전한 고제의 원칙을 내세우고 대신 10만호로 회유했지만, 장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꾸로 2주를 주어 복륭을 꼬드겼다. 복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복륭을 잡아가두고 유영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며, 결국은 복륭을 죽였다.[1] 또 마침 광무제에게 반기를 든 팽총과도 동맹을 맺었다.[2]

광무제는 당시 북으로는 연나라 지방, 남으로는 양나라와 초나라 지방에서 전쟁하고 있었기에, 장보는 제나라 12군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양나라에서 광무제와 싸우던 유영이 결국 전사하고 양이 평정되자, 장보는 유영의 아들 유우를 유영의 다음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은 정한공(定漢公)으로서 백관을 설치하고자 했는데, 왕굉이 반대해 없던 일이 되었다.

건무 5년(29년) 음력 2월에 후한의 건위대장군 경감 등이 광무제의 명령으로 자신을 치러 오자, 부장 비읍(費邑)을 제남왕으로 삼고 역하(제남군 역성현)에 주둔하게 했다. 그러나 음력 8월에는 유우가 패망했고, 음력 10월, 광무제가 제나라 근처인 노나라에 행차했고, 비읍은 경감에게 격파돼 전사했다. 경감이 임치로 진격하자, 경감의 군대는 원정 왔고 수가 적으므로 얕보고 대군을 들어 공격했으나 거꾸로 대패해 극현으로 달아났다. 광무제가 극현으로 진군하자 극현을 버리고 평수로 또 달아났다. 마침 유영의 부장이었던 소무가 구원군을 거느리고 와서는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경감을 얕본 것을 질책하자 부끄러워했다.

광무제가 사자를 보내 소무와 장보에게 서로 베고 투항하면 열후에 봉해주겠다고 하자, 선수를 쳐 소무를 죽이고 그 머리를 바쳐 투항했다. 옥에 갇힌 세 동생과 함께 광무제에게 용서받아 안구후(安丘侯)에 봉해졌고, 가솔들과 함께 낙양에 이주했다.

건무 8년(32년) 여름 음력 8월, 처자와 함께 임회로 달아나, 동생 장홍과 장람과 함께 무리를 모아 배를 띄워 고향 낭야로 돌아가려 했는데, 낭야태수 진준의 추격을 받아 살해됐다.

각주[편집]

  1. 범엽: 《후한서》 권26 복후송채풍조모위열전16 중 복담
  2. 범엽: 《후한서》 권12 왕유장이팽노열전제2 중 팽총

출전[편집]

범엽: 《후한서》 권12 왕유장이팽노열전제2 중 장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