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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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겸(李山謙, ?~1594년)은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한산, 이지함의 서자이다.[1] 강개하고 의기가 있어 의병들이 그를 장수로 삼은 것은 반드시 중망(衆望)이 있었다는 평을 들었으며, 허통(許通, 양반의 지위를 얻음)되었다.[2]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장 조헌(趙憲)의 부하로 들어갔다. 조헌이 사망한 뒤 휘하의 병사들을 모아 평택(平澤)과 진위(振威) 사이에서 주둔하였고, 이후 건의대장(建義大將) 심수경(沈守慶)의 통제를 받았다. 그 후 부대를 해산한 뒤 김덕령(金德齡)의 휘하로 들어갔다.[3]

이후 1594년(선조 27) 비변사(備邊司)의 보고를 받은 왕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4] 송유진의 난의 주동자들이 친국(親鞫)을 받으며 이산겸을 지목하여 민란을 주도한 인물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국문(鞠問) 과정에서 그의 지인들 모두가 역모한 사실이 없었다고 진술하였으나, 계속하여 고문을 당하였다. 반역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결국 몸이 심하게 망가진 뒤에야 하옥(下獄)되어 죽었다.[5]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