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타 나오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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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타 나오이에의 목상[b] | |
| 신상정보 | |
| 시대 |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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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교로쿠(享禄) 2년(1529년) |
| 사망 | 덴쇼(天正) 9년(1581년) 11월부터 덴쇼 10년(1582년) 1월에 걸치는 시점[1] |
| 별명 | 통칭: 하치로(八郎)→사부로 우에몬노이(三郎右衛門尉) 혼명(渾名): 모성(謀聖) |
| 계명 | 료운 세이유(涼雲星友) |
| 주군 | 우라가미 무네카게(浦上宗景)→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
| 관위 | 종5위하(従五位下) 이즈미노카미(和泉守, 수령명) |
| 씨족 | 우키타 씨(宇喜多氏) |
| 부모 | 아버지: 불명,[c] 어머니: 아베 요시사다(阿部善定)의 딸? |
| 형제자매 | 나오이에、하루이에(春家), 다다이에(忠家)[d], 여동생(이가 히사타카의 부인), 여동생(마키 구니노부牧国信의 부인) |
| 자녀 | 히데이에(秀家)、에바라 지카쓰구(江原親次)의 부인, 우라가미 무네타쓰(浦上宗辰)의 부인, 마쓰다 모토카타(松田元賢)의 부인, 요코인(容光院, 깃카와 히로이에의 부인), 고토 가쓰모토(後藤勝基)의 부인, 斎村政広의 부인, 明石全登의 부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녀 유자(猶子): 모토이에(基家)[2] |
| 묘소 | 헤이후쿠인(平福院, 폐찰됨), 고진지(光珍寺) |
우키타 나오이에(일본어: 宇喜多 直家, 1529년 ~ 1582년 2월 1일)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비젠의 센고쿠 다이묘이다. 통칭은 사부로우에몬노조(三郎右衛門尉) · 이즈미노카미(和泉守).
우키타 오키이에(宇喜多興家)의 아들이라고 알려졌으나, 근년의 일본 학계에서는 이를 의문시하는 학설이 제시되어 있다.[e] 아들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인 히데이에(秀家) 등이 있었다. 부인으로는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정실과, 다카토리 씨(鷹取氏) 또는 미우라 씨(三浦氏)의 딸이라 전하는 계실 엔유인(円融院)이 있었다.
우키타 씨(宇喜多氏)는 나오이에의 대에 급속히 대두하여 아들 히데이에의 대에 몰락하였으며, 당대의 사료에는 빈약한 가계를 포함하여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 대부분의 경우 에도 시대 이후에 편찬된 군키모노(軍記物)가 1차 사료가 되고 있어서, 연구에 주의가 필요하다.
생애
[편집]우라가미 집안의 가신 시절
[편집]교로쿠(享禄) 2년(1529년), 우키타 오키이에(宇喜多興家)의 자식으로 태어났다[4]고 하는데, 오키이에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나오이에의 시대로부터도 150년 정도가 지난 화기견(和気絹)으로, 엔포(延宝) 6년(1678년) 쓰여진 사이고쿠 태평기(西国太平記)에는 "아비 아무는 시마무라 간아미에게 살해되었다"(父某が島村観阿弥に殺された)라고 쓰고 있다. 일설에는 비젠 국(備前国) 오쿠 군(邑久郡)의 도요하라 장(豊原荘, 현: 오카야마 현 세토우치 시 오쿠 정 도요하라)에 위치한 도이시 성(砥石城)에서 태어났다고 한다.[f]
군키모노가타리(軍記物)에서 유래한 통설에 따르면, 우라가미 무라무네(浦上村宗)의 죽음으로 인한 혼란이 한창이던 교로쿠 4년(1531년)[2](또는 덴분(天文) 3년(1534년)에 할아버지 우키타 요시이에(宇喜多能家)가 시마무라 모리자네(島村盛実)에게 암살당하고 우키타 씨의 가독은 야마토노카미 가(大和守家)에게로 넘어가, 나오이에는 겨우 여섯 살의 나이로 부친 오키이에와 함께 방랑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나마도 아버지 오키이에마저 시마무라 씨와의 싸움으로 비명횡사하며 또 한번 몰락하였다. 무라무네의 뒤를 이어 우라가미 집안의 가독을 잇게 된 우라가미 마사무네(浦上政宗)와 비젠을 맡은 그 동생 무네카게(宗景)는 산요(山陽)에 침략을 거듭하던 아마고 씨(尼子氏)에 대한 대응을 놓고 분리되어 고쿠슈(国衆)와 두 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는데, 이 무렵 이미 관례를 올린 뒤였던 나오이에는 비젠의 덴진 산성(天神山城)의 성주였던 무네카게에게 출사하여 마사무네파에 대한 공격을 거듭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한편 근년의 일본 학계의 신설에 따라 이 '통설'에는 오류가 포함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3] 나오이에의 아버지에 관한 신설은 앞에서 기술한 그대로이다. 또한 우키타 씨의 가독은 야마토노카미 가로 '넘어갔다'고 하였는데, 야마토노카미 가가 출사해 섬기고 있던 것은 우라가미 씨의 당주 우라가미 마사무네였고, 요시이에-나오이에 부자가 속한 이즈미노카미 가(和泉守家)가 출사해 섬기고 있던 것은 가신으로 마사무네의 동생이었던 우라가미 마사카게였기에 애초부터 적류는 야마토노카미 가였다고 여겨지는 것이다.[3]
군키모노에서는 나오이에는 책모에 뛰어났고,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g] 시마무라 모리자네를 암살한 것을 시작으로 장인인 나카야마 가쓰마사(中山勝政)나 다쓰노구치 성(龍ノ口城)의 성주 ・ 사이쇼 모토쓰네(穝所元常)를 살해하였다고 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나오이에는 우라가미 집안의 직속 가신이라기보다는 그 산하 고쿠슈(国衆)로써 세력을 확대하였고, 그 종속적인 동맹자가 되어 마사무네파를 제압하고 야마토노카미 가도 타도하여 우키타 씨의 가독을 차지하였다.[5] 그리고 우라가미 가문의 세력 확장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세력 확대
[편집]에이로쿠(永禄) 9년(1566년) 2월, 나오이에는 미마사카(美作)로 진출한 빗추(備中)의 미무라 이에치카(三村家親)를 아와 호소카와 씨(阿波細川氏)의 로닌 엔도 마타지로(遠藤又次郎), 기자부로(喜三郎) 형제를 기용하여 철포로 암살한다.
이듬해 7월에는 묘젠지 전투(善寺合戦)로 그때까지 비젠 국 서부에 진출해 있던 빗추 군세를 몰아내는데 거의 성공하였다. 그 뒤에도, 인척관계에 있던였던 가나가와 성(金川城) 성주 마쓰다 모토테루(松田元輝)·모토카타(元賢) 부자와 오카야마성(岡山城) 성주 가나미쓰 무네타카(金光宗高)등을 몰락시키고, 그 영지를 자신의 지행으로 삼는 등 세력을 확대하여, 우라가미 가문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한편 마쓰다 부자에 관해서 근년 일본 사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는 마쓰다 모토카타(松田元堅)라는 인물을 친 것이고 그 이유는 나오이에의 야망 때문이 아닌 그의 주군 우라가미 무네카게의 비젠 통일을 위해서였다는 것, 애초에 마쓰다 씨는 나오이에의 할아버지 요시이에의 대부터 우라가미 씨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다는 것 등이 밝혀져 있다. 당시 나오이에의 입장에서는 인척이라고 해도 주군과 적대하고 있는 이상 주군에 대한 충의를 앞세워 사사로운 인정을 쳐냈다는 변론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에이로쿠 12년(1569년), 나오이에는 새로이 쇼군(将軍)이 된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서부 하리마의 아카마쓰 마사히데(赤松政秀)와 손잡고 자신의 주군 우라가미 무네카게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마사히데가 青山・土器山の戦い에서 구로다 모토타카(黒田職隆)·요시타카(孝高, 후의 간베에) 부자에게 패하고, 노부나가가 파견한 이케다 가쓰마사(池田勝正)·벳쇼 야스하루(別所安治) 등도 당시 오다 군의 에치젠 침공 때문에 돌아가는 등 마사히데나 나오이에 입장에서는 악재가 겹쳤고, 거꾸로 무네카게가 세력이 약해져 있던 마사히데의 다쓰노 성(龍野城)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 뒤 모리 씨(毛利氏)에 대항하기 위해 쇼군 요시아키의 중재로 화목하였고, 이 무렵에 우라가미 씨로부터 독립한다. 우군을 모두 잃고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나오이에 스스로도 항전이 불가하다고 판단하여 무네카게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때는 특별히 용서받아 목숨을 구하고 귀순을 허락받았다.
덴쇼 2년(1574년), 쇼군 요시아키가 노부나가에 의해 추방되었다. 노부나가와 연줄이 있던 무네카게와 다시금 대립하게 된 나오이에는 다시 무네카게에게서 독립을 획책하여 앞서 무네카게의 형 우라가미 마사무네(浦上政宗)의 손자로 고데라 씨(小寺氏)가 맡아 기르고 있던 히사마쓰마루(久松丸)의 존재에 눈을 돌려, 小寺政職에게 히사마쓰마루의 비젠 입국을 타진(고데라 가 문서), 허가를 얻어 그를 옹립하여 무네카게에 대해 반기를 들고 공세를 펼쳤다. 이번에는 히사마쓰마루의 옹립과 나오이에의 사전 책략으로 미마사카와 비젠 국내의 무네카게 휘하 장수들의 이반이 잇따랐고, 더욱이 무네카게와는 견원지간이었던 아키의 모리 씨와도 손을 잡아 군사적인 면에서도 불리함을 극복하였다.
덴쇼 3년(1575년), 모리 집안의 미우라 씨 공격에도 나오이에가 힘을 보태며 협조 관계를 굳건히 하였다. 같은 해 9월, 무네카게의 심복인 아카시 가게치카(明石景親) 등의 중신들마저 내응시키는데 성공하여 무네카게는 하리마 국으로 도주하고, 나오이에는 비젠뿐만 아니라 빗추 국 일부와 미마사카 국 일부까지 지배영역을 확대하였다(덴진 산성 전투).
그러나 무네카게 추방 뒤에도 여전히 비젠에는 구 우라가미 가신 세력이 남아 있었고, 이들과 하리마로 도망친 무네카게와 일문 우라가미 히데무네 등이 은밀히 연락을 취하여(쓰보이 문서坪井文書 등) 비젠에 잠복한 옛 우라가미 가신들이 선동한 소규모 봉기로 골치를 썩이게 되었다. 이 상황은 덴쇼 6년(1578년) 12월에 우라가미 잔당이 일제히 봉기하여 고지마(幸島)를 점령하는 사건까지 이어지게 된다. 우라가미 무네카게·히데무네 등이 주도한 이 무장봉기는 일시적으로 덴진 산성까지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려 우키타 가문은 상당히 애를 먹어 진압하는데 수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비젠과 하리마에 숨어 있던 옛 우라가미 세력을 영내에서 몰아내고, 나아가 무네카게를 원조하고 있던 미마사카 사기야마 성(鷲山城) 성주 호시카 미쓰시게(星賀光重)를 쳐서, 무네카게의 영주 복귀 야망을 분쇄하는데 성공하고, 우키타 집안은 영내의 안정적인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만년
[편집]그러나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은 하시바 히데요시가 주고쿠 방면으로 진군해 오자, 모리 데루모토와 함께 이에 저항하였다.
덴쇼 7년(1579년) 1월, 데루모토는 같은 달에 예정되어 있던 상경을 단념하였다. 데루모토가 상경을 단념한 것은 비젠의 우키타 씨, 호키(伯耆)의 난조 씨(南条氏)라는 오다 씨와의 경계 최전선에 서 있던 영주들에게 동요를 주었다.[6] 나오이에는 5월, 노부나가와 내응한 혐의가 있던 동부 미마사카의 고토 가쓰모토(後藤勝基) 등을 멸망시켰지만, 6월 전후, 나오이에는 모리 씨로부터 이반하고, 노부나가와 통하였다.[7][8] 나오이에가 모리 씨로부터 이반한 이유에 관해서는 데루모토가 상경을 포기하는 바람에 그의 상경을 발판삼아 하리마로 진출하겠다는 본인의 야망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점, 여기에 더해 노부나가로부터 비젠, 미마사카의 영유를 확약받는 데에 있었다.[7] 나오이에의 이반으로 모리 씨와 오다 씨의 싸움은 오다 씨에 유리하게 기울게 된다.[9]
9월 4일, 히데요시가 아즈치 성으로 왔고, 나오이에의 사면을 청원한다.[10][11] 그러나 나오이에의 책략은 히데요시의 판단에 있었기 때문에, 노부나가의 승인을 얻기까지는 한 달이나 걸렸다.[11] 노부나가로써는 배신을 거듭하는 나오이에를 신용할 수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10]
10월, 나오이에와 노부나가 사이의 화목이 성립되었다.[10] 그러나 이는 나오이에가 노부나가에게 '용서받았다'라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10]
10월 그믐, 조카 우키타 모토이에(宇喜多基家)가 나오이에의 묘다이(名代)로써 셋쓰(摂津)의 고야노(昆陽野)에 머무르고 있던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를 찾아, 우키타 씨는 정식으로 오다 정권의 산하에 들게 되었다.[11][12] 그뒤 나오이에는 또한 하리마 히메지 성(姫路城)에 진을 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 앞으로 찾아가, 사례를 표하였다.[12] 이후 미마사카·비젠 각지를 전전하며 모리 가문과 끊임없는 전투를 계속하였다.
만년
[편집]덴쇼 8년(1580년) 단계에서 우키타 씨는 모리 씨의 공격을 상대로 견뎌내고 있었지만, 덴쇼 9년(1581년)이 되어 나오이에는 모리 씨와의 싸움에서 궁지에 몰려갔고, 미마사카에서는 모리 씨에게 이와야 성(岩屋城)이나 미야야마 성(宮山城)을 빼앗겼다.[13] 나아가 같은 해 4월에 급서한 이가 히사타카(伊賀久隆)의 뒤를 이은 이에히사(家久)가 우키타 씨를 이반하여 모리 씨에 속하였고, 11월까지 비젠 국과 미마사카 국의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시노부야마 성(忍山城)을 모리 씨에게 빼앗겨 오다 노부나가는 나오이에에 대한 분노를 토로하였는데, 그 다음달에는 태도를 바꾸어 모리 씨에 승리했을 때의 포상으로써 빗추 국(備中国)을 더 늘려 주겠다는 뜻을 비쳐서, 곤경에 처해 있던 우키타 씨에 대해 더 분발할 것을 독려한다.[13]
그러나 전황 악화와 함께 나오이에의 건강 상태도 악화되어 갔고, 모리 씨와의 싸움이 한창이던 와중에 오카야마 성(岡山城)에서 죽었다.[1][14]
나오이에의 사망 날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후세에 편찬된 사료인 《우라가미 우키타 양가기》(浦上宇喜多両家記)나《비젠 군기》(備前軍記)[h]에 기록된 덴쇼 9년 2월 14일(양력 3월 18일)설이 잘 알려져 있는데, 이 2월 14일 시점 이후에도 당대 사료에서 나오이에의 생존이 확인되고 있어서, 덴쇼 10년(1582년) 1월 21일에는 하시바 히데요시가 우키타 씨의 중신을 데리고 오다 노부나가의 거소 아즈치 성을 찾았고, 나오이에의 적남(嫡男)인 하치로(八郎)의 가독 계승을 노부나가에게 승인받았으므로, 현재는 덴쇼 9년(1581년) 11월부터 덴쇼 10년(1582년) 1월 사이에 나오이에가 사망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1]
한편 나오이에의 죽음도 (다케다 신겐과 마찬가지로) 잠시 동안 비밀로 부쳐졌다가[15] 덴쇼 10년(1582년) 1월 9일을 나오이에의 공식 기일로 삼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계명은 료운 세이유(涼雲星友)이다.
인물
[편집]- 신앙심이 두터워서 가나가와 성(金川城) 성주 마쓰다 씨(松田氏)가 영내 주요 지샤(寺社)에 대해 자신이 신봉하는 일련종(日蓮宗)으로의 개종을 강요했을 때,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샤들을 불살라 버리기도 하였는데, 당탑(堂塔)이나 사전(社殿)이 소실된 긴잔지(金山寺)나 기비쓰히코 신사(吉備津彦神社)의 재건에도 원조하였다. 때문에 이들 지샤는 나오이에를 숭경하고 있다.
- 오카야마 성을 거성으로 하고부터는 성 아래에 상인들을 불러모아 조카마치(城下町)를 정비하였다. 이제까지 비젠 국의 상업 중심지는 사이다이지(西大寺)나 비젠 후쿠오카(備前福岡) 등 동부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나오이에와 히데이에 양대에 걸쳐 조카마치를 정비함으로써 오카야마 성을 중심으로 하는 시가지가 발전하게 된다.
평가
[편집]에도 시대 초기에 저술된 《다이코키》에는 사이토 도산과 마쓰나가 히사히데에 버금가는 악인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또한 이즈모의 아마고 쓰네히사와 아키의 모리 모토나리와 함께 주고쿠 삼대 모장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전에는 황실 소유였던 비젠 돗토리 장원(일본어: 備前鳥取庄)을 회복한 것에서 근왕적인 측면이 평가받기도 하였다.
가네미쓰 무네타카를 비롯하여 마쓰다 모토카타, 고토 가쓰모토 등 상대하기 벅찬 상대에게는 자신의 딸이나 누이, 혹은 친척의 딸을 자신의 양녀로 삼아 혼인을 성립시키고 친의의 정을 내보여 방심하게 만든 뒤, 때를 보아 독살하거나 암살하는 등의 비정한 행위가 많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다지 인기가 없다.
나오이에의 동생인 다다이에(忠家)는 형의 측근으로써 형을 오랫동안 보좌하였고 형의 사후에는 가독을 이은 조카 히데이에를 보좌하는 등 우키타 집안 안에서 2대에 걸쳐 중진으로 신임받았지만, 자기 친족도 쳐 죽일 정도로 음험한 모략가였던 형을 신뢰하지 않아, 나오이에에게 갈 때는 늘 옷 아래에 사슬갑옷(鎖帷子)을 입고 나갔다고 하는 등 형을 경계하였다(『陰徳記』).[16] 다만 다다이에는 나오이에의 근습(近習)이나 그 '가로'(家老)에 해당한다고 할 만한 인물인 오노다 시로우에몬(小野田四郎右衛門)을 베어 죽이는 등 다다이에 자신도 '번번이 무리하게 사람을 죽인다'(度々無理なる人斬)는 평을 받던 인물이었고, 형 나오이에로부터 위임받은 비젠 도미야마 성에서 일시 농성하기도 하는 등, 나오이에와는 달리 짧은 생각으로 섣부르게 행동하는 경우가 으레 있었다(『戸川家譜』『浦上宇喜多両家記』). 때문에 일본의 사학자 오니시 야스마사(大西泰正)는 다다이에의 사슬갑옷 일화에 대해, 언제든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족마저도 적으로 돌려 쳐 죽일 수 있는 나오이에의 음험한 성격보다는, 언제 (나오이에나 나오이에가 아닌 그 누구에게) 죽임을 당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던 다다이에 본인의 말썽 많은 행적과 그에 기인하는 다다이에의 의심을 말해 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17]
각주
[편집]내용주
[편집]- 고진지(光珍寺)가 소장하고 있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소실되었다.
- ↑ 고진지(光珍寺)가 소장하고 있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소실되었다.
- ↑ 후세의 군키모노가타리에서는 우키타 오키이에(宇喜多興家)라고 쓰고 있지만, 그 이전의 군키모노가타리에서는 '아버지 아무개'(父某)라고만 쓰고 있다. 또한 1차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 ↑ 다다이에와 하루이에를 동일인물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우키타 다다이에#하루이에와의 동일인물설、우키타 하루이에#동일인물설를 참조
- ↑ 근년에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덴분 10년(1541년)〜12년(1543년), 야마나시 고토쓰구(山科言継)가 야마나시 집안 소유 영지의 연공 재촉을 하루마사(晴政) 그리고 우키타 이즈미노카미(宇喜多和泉守)에게 의뢰하였다. 하루마사란 아카마쓰 하루마사(赤松晴政) 또는 나카야마 하루마사(中山晴政)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중요한 것은 이 문서가 작성되었던 당시에 우키타 요시이에(즉 나오이에의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인물)가 살아 있었다는 것과, 요시이에의 후계자인 '우키타 이즈미노카미'가 후계자로써 활약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는 것이며, 동시에 야마토노카미 오키이에(大和守興家)의 우키타 집안 계승이나 요시이에와의 친자관계도 의문시되게 되었다.[3]
- ↑ 당시 우키타 씨는 도이시 성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애초에 나오이에가 적류였는지 우키타 요시이에(宇喜多能家)의 도상이 전해져서 가독 ・ 도이시 성 등을 계승한 야마토노카미 가(大和守家)가 적류였는지를 포함해서 확실한 사료가 없다.
- ↑ 다만 사서에 우키타 요시이에를 살해한 것이 모리자네라는 기록은 없다.
- ↑ 흔히 나오이에의 사인으로 알려진 치질도 비젠 군기에서 나오이에의 사인을 '시리하스'(尻はす)라는, 출혈을 수반한 악성 종양이었다고 한 데에서 기인한다.
출처주
[편집]- 1 2 3 石畑匡基 2023, 222쪽.
- 1 2 湯浅常山의 저서 『常山紀談』
- 1 2 3 戦国史研究会編『戦国史研究 71』(吉川弘文館、2016年)
- ↑ 「浦上宇喜多両家記」
- ↑ 渡邊大門 『戦国期浦上氏・宇喜多氏と地域権力』 岩田書院 2011年 pp.7-15
- ↑ 光成準治 2016, 139쪽.
- 1 2 光成準治 2016, 140쪽.
- ↑ 奥野高広 1996, 263쪽.
- ↑ 光成準治 2016, 141쪽.
- 1 2 3 4 渡邊大門 2011, 160쪽.
- 1 2 3 大西泰正 2017, 22쪽.
- 1 2 朝尾直弘「織豊政権と宇喜多氏」『岡山県史』六巻 近世Ⅰ第1章第1節/所収:森脇崇文 編『宇喜多秀家』戎光祥出版〈織豊大名の研究 12〉、2024年10月、40頁。
- 1 2 石畑匡基 2023, 221쪽.
- ↑ 「宇喜多直家」『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 ↑ 蜂須賀文書写、「両家記」
- ↑ 大西 2019, 40쪽.
- ↑ 大西 2019, 40–41쪽.
| 전임 우키타 오키이에 |
제5대 우키타 씨 당주 1536년 혹은 1540년 ~ 1582년 |
후임 우키타 히데이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