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
(吳命恒先生討賊頌功碑)
대한민국 경기도시도유형문화재
종목시도유형문화재 제79호
(1978년 11월 10일 지정)
수량1기
시대조선시대
소유국유
위치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대한민국)
주소경기도 안성시 낙원동 609번지
좌표북위 37° 00′ 19″ 동경 127° 16′ 24″ / 북위 37.00528° 동경 127.27333°  / 37.00528; 127.27333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吳命恒先生討賊頌功碑)는 경기도 안성시 낙원동에 있는 기념비이다. 영조 시기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오명항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1]

배경[편집]

정미환국의 여파로 소론이 분열되면서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였다.[2] 오명항은 당시 병조판서로서 토벌군의 도순무사(총사령관)을 맡았다. 3월 23일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은 이인좌의 부대와 안성 부근 청룡산에서 결전을 벌여 승리하였다.[3]:169 그 해 4월 19일 오명항은 개선하였고 영조는 숭례문까지 거둥하여 그를 맞았다.[3]:176 오명항은 창덕궁 돈화문 누각에서 임금에게 적의 수급을 바치는 헌괵례(獻馘禮)를 하였다.[4] 영조는 오명항에게 그 공덕을 죽는 날까지 잊지 않겠다고 치하하였다.[3]:177

오명항은 소론계의 중진이었고 영조 즉위후 호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가 된 후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였다. 난이 평정된 이후 분무공신(奮武功臣) 1등으로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다.[5] 영조가 우찬성을 재수하였으나 자신이 이인좌와 같은 소론임을 들어 사임하였다.[6]

비석[편집]

비석은 오명항이 사망한 후 16년이 지난 1744년(영조 20) 세웠다.[5] 비문의 앞면은 이인좌의 난 토벌 당시 그의 종사관이었던 우의정 조현명이 글을 짓고, 병조판서 박문수가 글씨를 썼다. 비의 앞면에 쓰는 글인 두전(頭篆)은 대제학 이광덕이 썼으며 조선국 사로 도순무사 오공 안성토적 송덕공비(朝鮮國四路都巡撫使吳公安城討賊頌德功碑 - 조선국의 4로를 담당하여 도순무사로서 안성의 적당을 토벌한 오공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라고 적혀 있다.[6]

비문의 주요 내용은 난이 일어나 문무 대신들이 모두 움추리기만 할 때 오직 오명항만이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하니 청컨데 신이 나아가 막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여 난을 평정하였기에 그 공덕을 높이 칭송한다는 내용이다.[7]

비는 비개가 없이 위가 둥근 모양으로 높이 309cm, 높이 214cm, 너비 93cm, 두께 29cm으로 된 화강암이다.[5] 원래 안성읍 동본동에 세워졌으나 1969년 지금의 안성공원으로 옮겨졌다.[8]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 문화재청
  2. 이상각, 《화경 숙빈 최씨 - 왕을 훔친 무수리》, 케이엔제이, 2010년, ISBN 978-89-9408-004-8, 126쪽
  3. 김용관, 《영조의 세 가지 거짓말 - 드라마를 통해 재조명되는 영조의 출생 비밀》, 올댓북, 2010년, ISBN 978-89-9079-095-8
  4. 오명항이 돌아와 노포문을 올리고 헌괵례를 거행하다 Archived 2018년 6월 26일 - 웨이백 머신, 영조실록 17권, 영조 4년 4월 19일 기해
  5. 오명항선생 토적송공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경기문화재총람 1권 - 도지정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 89쪽
  7. 김태영, 《안상전의 편역 안성기략》, 새로운사람들, 2008년, ISBN 978-89-8120-356-6, 74쪽
  8. 안성공원에 있는 무려 46기의 공덕비, 알고 보니[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오마이뉴스, 2011년 7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