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리스 조약
상리스 조약은 1493년 5월 상리스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와 프랑스의 국왕 샤를 8세 사이에 부르고뉴 계승에 관해 맺은 조약이다.[1][2]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이탈리아 침공을 앞두고 막시밀리안 1세와 상호 중립을 위해 평화조약을 맺은후 다음해에 이탈리아의 나폴리를 점령하였다.[2]
배경
[편집]최후의 발루아 가 출신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이 1477년 낭시 전투에서 후계자를 두지 못한체 전사하였다.[3]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왕자령[4]이었던 부르고뉴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용담공 샤를의 딸 부귀공 마리는 막시밀리안 대공과 1477년 8월에 혼인 한후에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상속지를 지키려했다.[5]
이 분쟁은 1479년 프랑스는 긴가트 전투에 패배하여 마리와 막시밀리안에게 유리한 상태로 결론 지어졌다.[5] 그럼에도 마리가 1482년에 사망하자 양국은 다시 아라스 조약에 맺었다. 막시밀리안은 아라스가 포함된 아르투아 백작령과 부르고뉴를 프랑스에 넘겨야만 했고, 그의 딸 오스트리아의 마르게리타와 루이 11세의 아들 샤를의 약혼에 따른 지참금으로 부르고뉴의 일부를 프랑스에 넘겨주었다.[5]
프랑스 왕위에 오른 샤를 8세가 브리타뉴의 상속녀 안 드 브리타뉴와 결혼하면서 기존의 약혼자인 마르게리타와는 파혼하였다. 안 드 브리타뉴는 본래 막시밀리안 1세과 약혼한 사이였기 때문에 양측의 감정은 악화되었고 마르게리타는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다.
조약 체결
[편집]이탈리아 침공 준비를 하던 프랑스의 샤를 8세는 1493년에 주변국가들과 상호중립을 위한 평화조약을 맺었다.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1세와도 상리스 조약을 맺어 일부 부르고뉴 영지를 돌려주었다.[2] 상리스 조약에 따라, 프랑스와 네덜란드 17주 사이에 적대 행위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추가적으로 분쟁 지역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넘겼고 아르투아와 플랑드르는 신성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두 지역에 여전히 강력한 법적 권리와 전초 기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6] 부르고뉴 공국 (디종을 수도로 하며, 돌을 수도로 하는 부르고뉴 백작령과 혼동을 유의해야함)은 프랑스에 남기로 하며, 1482년 프랑스에 양도되었다.
조약 체결후
[편집]1494년에 샤를 8세는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였다.
각주
[편집]- ↑ [네이버 지식백과] 샤를 8세 [Charles VIII] - 이탈리아 원정의 시작 (프랑스 왕가, 홍용진)
- ↑ 가 나 다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3.11 p125
- ↑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3.11 p123
- ↑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3.11 p125.....왕자령은 상속자 없이 군주가 사망하거나 군주가 왕실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을 경우에 그 봉토는 왕실 직영지로 병합된다.
- ↑ 가 나 다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3.11 p124
- ↑ Potter, p. 255.
참고 문헌
[편집]- Potter, David. A History of France, 1460-1560: The Emergence of a Nation-State. New Studies in Medieval History,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