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Kirschtaria/비자야나가라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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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편집]

카르나타 라지야(카르나타 왕국)는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다른 이름으로, 크리슈나데바라야 왕의 산스크리트 작품 잠바바바티 칼랴남과 텔루구 작품 바수 차리타무를 포함한 비자야나가라 시대의 일부 비문과 문학 작품에 사용되었다.[1][2] 바순다라 카발리-필리오자트, B. A. 세일토어, P. B. 데사이, 그리고 람 샤르마를 포함한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로버트 세웰이 본문에서 제국을 카르나타카라고 불렀지만, 그는 칸나다와 텔루구 집단이 그것을 카르나타카라고 불렀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제목에서 비자야나가르를 선택했다." 제국의 역사적 유적에서 구할 수 있는 비문에서 나온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그것은 카르나타카 삼라지야(카르나타카 제국)라고 불렸다.[3][4][5]

유럽인들은 비자야나가라 제국을 "나라싱가 왕국"이라고 불렀는데,[6][7] 이는 포르투갈어로 "나라심하"에서 유래한 이름이다.[8] 이름이 살루바 나라심하 데바 라야 또는 나라심하 라야 2세에서 파생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모든 종교에 대해 대단히 관용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외국인 여행자들은 적었다.[9] 왕들은 힌두교를 보호하려는 그들의 의도를 증명하는 고브라하마나 프라티팔라나차리야 (문자 그대로, "소와 브라만들의 보호자")와 같은 제목을 사용했는데, 함피의 나가르 문자 비문에는 벤자민 루이스 라이스가 "힌두라야 수라트라나"라고 번역한 힌두라야라는 용어가 포함되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을 "힌두교 왕 중의 술탄"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이것을 힌두교 왕들에 의해 채택된 일부 이슬람 정치 전통의 증거이자 14세기 초에 인도 왕국들이 힌두교와 힌두교의 종교적 정체성을 인정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10][11][16][17]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힌두라야 수라트라나라는 용어를 "힌두 왕들의 (또는 그들 가운데 있는) 신들의 보호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1][18][19] 제국의 창시자인 상가마 형제(하리하라 1세와 부카 라야 1세)는 야다바 혈통을 주장하는 쿠루바족으로 추정되는 견우 목동 출신이다.[20][21] 제국의 창시자들은 독실한 시바교도였지만 비슈누 사원에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들의 수호 성인 비다르야나는 스린게리의 아디바이타 교단 출신이었다. 바라하(비슈누의 멧돼지 화신)는 제국의 상징이었다.[22] 고고학적 발굴의 1/4 이상이 "왕실 지구"에서 멀지 않은 "이슬람 지구"를 발견했다. 중앙아시아 티무르 왕국의 귀족들도 비자야나가라에 왔다. 후기 살루바 왕조와 툴루바 왕조 왕은 비슈누교도였지만 티루파티의 벤카테스와라(비슈누)와 함피의 비루파크샤(시바)도 숭배했다. 산스크리트어 작품인 크리슈나데바라야 왕의 잠바티 칼야남은 비루파크샤를 카르나타 라지야 라크샤 마니("카르나타 제국의 보호자 보석")로 언급한다.[23] 왕들은 우두피에서 마드바차리야의 드바이타 질서(이원론 철학)의 성도들을 후원했다.[24] 성전에는 토지, 현금, 농산물, 보석, 건축물 등의 형태로 기부금이 지급되었다.[25]

바크티 운동은 이 시기 동안 활발했으며 당시 잘 알려진 하리다사들이 참여했다. 12세기의 비라샤이바 운동처럼 이 운동은 수백만 명의 삶에 스며드는 또 다른 강력한 헌신의 흐름을 제시했다. 하리다사들은 비야사쿠타와 다사쿠타 두 그룹으로 대표되었으며, 전자는 베다, 우파니샤드 및 기타 다르샤나에 능숙해야 하는 반면 다사쿠타는 칸나다어로 된 헌신곡의 형태(데바라나마스 및 키르타나스)로 마드바차리야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마드바차리야의 철학은 나라하리티르타, 자야티르타, 스리파다라야, 비야사티르타, 바디라자티르타 등과 같은 저명한 제자들에 의해 퍼졌다. 비사야티르타, 바디라자티르타, 푸란다라다사(피타마하 또는 "카르나타 음악의 아버지"[26][27]) 및 카나카다사[27]의 구루는 크리슈나데바라야 왕의 헌신을 얻었다.[27][28][29] 왕은 성인을 그의 쿨라데바타(가족신)로 간주하고 그의 글에서 그를 존경했다.[30] 이 기간 동안 초기 카르나타 음악의 또 다른 위대한 작곡가인 안나마차리야는 현재 안드라프라데시주티루파티에서 텔루구어로 수백 개의 키르타나스를 작곡했다.[28]

Narasimha
함피의 우그라 나라심하 모노리스

11세기 초 촐라에 의한 자이나교도 서강가 왕조의 패배와 12세기 비슈누파와 비라시바파 힌두교 추종자들의 증가는 자이나교에 대한 관심 감소로 반영되었다.[31] 비자야나가라 영토에서 주목할만한 자이나교 숭배지로는 슈라바나벨라골라와 캄바다할리가 있다.

남인도와의 이슬람교 접촉은 남부 왕국과 아랍 땅 사이의 무역의 결과로 7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주무아 모스크는 10세기까지 라슈트라쿠타 제국에 존재했으며,[32] 많은 모스크가 14세기 초까지 말라바르 해안에서 번성했다.[33] 무슬림 정착민들은 현지 여성들과 결혼했다. 그들의 아이들은 마필라로 알려졌고 말 거래 및 선박 선단 배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비자야나가라 제국과 북쪽의 바흐마니 술탄국 사이의 상호 작용은 남쪽에서 무슬림의 존재를 증가시켰다. 15세기 초 데바 라야는 비자야나가라에 무슬림을 위한 모스크를 짓고 그의 왕좌 앞에 쿠란을 두었다.[34]

기독교의 도입은 말라바르 기독교인에게 토지를 부여한 내용이 새겨진 동판 발견으로 알 수 있듯이 일찍이 8세기에 시작되었다. 기독교 여행자들은 중세에 남인도의 기독교인 부족에 대해 썼고, 선교사들에게 그 매력을 홍보했다.[35] 15세기에 포르투갈인의 도착과 제국과의 무역을 통한 연결, 성 하비에르(1545)의 신앙 전파, 이후 네덜란드 정착촌의 존재는 남부에서 기독교의 성장을 촉진했다.[36]

서문, 출처 및 수익 창출[편집]

함피의 비루파크샤 사원의 화려한 기둥
함피 하자레 라마 사원의 벽면 부조

석비문은 성전 벽, 재산 경계 및 공개 전시를 위한 열린 장소에 사용되는 가장 일반적인 문서 형식이었다. 또 다른 형태의 문서는 기록 보관을 위한 동판이었다. 일반적으로 장황한 비문에는 인사말, 왕이나 지역 통치자의 찬가, 기부자의 이름, 기부금의 성격(일반적으로 현금 또는 농산물), 보조금이 사용되는 방식, 완료, 기부자가 받은 몫 및 전체 기부와 그 의무를 집행하는 결론 진술. 일부 비문에는 전쟁이나 종교 축제에서 승리한 사례와 보조금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보복이나 저주가 기록되어 있다.[37]

지금까지 회수된 대부분의 비자야나가라 제국 비문은 칸나다어, 텔루구어, 타밀어로 되어 있으며 일부는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다.[38] 수리야나트 U. 카마트에 따르면 약 7000개의 석비문(그 중 절반은 칸나다어에 있으으며 대부분 산스크리트어로 된 약 300개의 동판)이 복구되었다.[39] 이중 언어 비문은 14세기에 인기를 잃었다.[40] 맥에 따르면 회수된 비문의 대부분은 툴러바 왕조(1503~1565)의 통치에서 나온 것이며 살루바 왕조(1485~1503)는 제국에 대한 짧은 통제 속에서 가장 적게 비문을 새겼다. 가장 오래 통치한 상가마 왕조(1336~1485)는 툴루바 시대에 새겨진 모든 비문의 약 1/3을 생산했다.[41] 문학 매체로서 텔루구어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언어로 된 비문의 대부분은 1500년에서 1649년 사이의 제한된 기간에 새겨졌다. 탈보트는 이 시나리오를 변화하는 정치적 연대의 하나로 설명한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원래 카르나타카에 설립되었으며 안드라프라데시는 제국의 한 지방으로 여겨졌지만, 1565년 술탄국에게 패배하고 왕도 비자야나가라를 약탈당한 후, 약화된 제국은 수도를 남부 안드라프라데시로 옮겨 텔루구어가 지배하는 체제를 만들었다.[42]

비문과 주화 외에도 비자야나가라 역사(그 기원, 사회 및 정치 생활 및 궁극적인 패배)의 출처는 산스크리트어, 칸나다어, 페르시아어 및 텔루구어로 된 외국 여행자 및 현대 문학 출처의 설명이다. 제국을 방문한 포르투갈인은 도밍고 파에스(1522), 페르난도 누네스(1537),[43] 두아르테 바르보사(1516), 바라다스(1616) 등이 있으며, 러시아인으로는 아타나시우스 니키틴(1470)이 있다.[44] 니콜로 데 콘티(1420년),[45] 루도비코 디 바르테마(1505년), 체사레 프레데리치(1567년), 필리포 사세티(1585년)[46][29]는 이탈리아에서 온 여행자들이었고, 압두르 라차크(1443년)는 페르시아에서 방문한 여행자들이었다.[47] 경쟁 왕국(술탄국)의 후원을 받거나 비자야나가라를 방문하여 귀중한 작품을 완성한 현대 무슬림 작가는 지아우딘 바라니(1357년), 이사미(1596년), 니삼무딘 바크쉬, 피리슈타, 라피웃딘 쉬라지(1611)가 있다.[48] 원주민 작가들의 저술 중 제국에 빛을 비추는 중요한 산스크리트 작품은 비드야란야 칼라즈나나, 살루바 나라심하 왕의 삶에 관한 딘디마의 라마뷰다얌, 딘디마 2세의 아츄타뷰다얌 및 티루말람바의 바라담비카 파리나얌이 있다. 칸나다어 문학 작품 중에는 난준다 카비의 쿠마라 라마나 카테, 카나카다사의 모하나타랑기니, 링간나의 켈라디리파비자얌 및 최근에 발견된 크리슈나데바라야나 디나차리가 유용한 자료이며 텔루구어 작품 중에서는 스리나타의 카쉬칸다, 말라야 및 싱가야의 바라하푸라나무, 비슈바나타 나야니의 라야바차카무, 난디 팀만난나의 파리자타파하라나무, 두르자티의 크리슈나라자 비자야무, 펫단나의 마누차리타무 및 크리슈나데바라야 왕의 아무크타말라다는 중요한 정보 출처이다.[49][50]

페르시아 방문자 압두르 라자크는 그의 여행기에서 제국이 높은 수준의 수익 창출을 누렸다고 썼다. 이것은 특히 성전에서 지급된 현금 보조금의 수에서 분명하다. 동전은 금, 은, 구리, 황동을 사용하여 주조되었으며 그 가치는 재료의 무게에 따라 달라졌다. 주화는 주, 지방, 상인 길드에서 주조되었으며, 외화가 유통되고 있었다. 가장 높은 명칭은 50.65 – 53 그레인의 금 바라하였다. 파르타브 또는 프라타바는 바라하의 절반, 파남 또는 하나, 금과 구리의 합금은 바라하의 1/3로 평가되는 가장 일반적인 통화였다. 순은으로 만든 타르는 파남의 6분의 1이었고 황동으로 만든 치탈은 타르의 1/3이었다. 하가, 비사 및 카수도 낮은 액면가의 동전이었다.[51][52]

인용주[편집]


참조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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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Fritz & Michell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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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When the south was one”. Fountain Ink. 2022년 9월 4일에 확인함. 
  5. “Book Review: 'Hampi' by Pierre-Sylvain Filliozat and Vasundhara Kavali-Filliozat is more than a coffee-table book on the Vijayanagar Empire”. 2022년 1월 9일. 
  6. “The Narasinga Kingdom”. Deccan Herald. 2015년 4월 21일. 2023년 3월 14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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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The Rayas of Vijayanagar”. Notes on Indian History. 2013년 10월 7일. 2023년 3월 14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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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The Hinduraya suratrana term in inscriptions has been coupled with long brocaded headdress (kullayi) and others shown in some royalty-related reliefs found in Hampi as additional support for the hypothesis that 'Islamicization of Hindu culture' in 14th-century.[12] The long headdress are also seen in the royalty-related and secular artwork in Pattadakal dated from the 7th and 8th century, about 5 centuries before the first Sultanate was formed in South Asia.[13] Similar conical headdress is seen in other sites such as the Ajanta Caves, Ellora Caves, Aihole and Badami, variously dated from the 2nd century CE to 10th century CE.[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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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Habib, Irfan (1999). “The Envisioning of a Nation: A Defence of the Idea of India”. 《Social Scientist》 27 (9/10): 18–29. doi:10.2307/3518100. JSTOR 351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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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Sewell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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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Sinopoli & Morrison 2001, 101,104쪽
  48. Chopra, Ravindran & Subrahmanian 2003, Introductory ix, part II, p. 9
  49. Kamath 2001, 157–158쪽
  50. Chopra, Ravindran & Subrahmanian 2003, Introductory p. ix
  51. Sinopoli 2003, 105쪽
  52. Kamath 2001, 176쪽

[[분류:옛 제국]] [[분류:카르나타카주의 역사]] [[분류:비자야나가라 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