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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국해 공습(작전명: 감사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기간 중인 1945년 1월 10일부터 1월 20일까지 미국 제3함대가 수행한 작전이다. 이 작전은 필리핀 루손섬의 탈환을 지원하기 위해 수행되었으며, 남중국해 지역의 일본 전함, 보급 호송선과 비행기를 목표로 삼았다.

타이완과 루손에 있는 비행장과 항구를 공격한 이후, 제3함대는 1월 9일과 10일 사이 밤에 남중국해에 진입했다.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비행기는 1월 12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출항한 일본 선박을 공격했고, 이 중 44척을 격침시켰다. 이후 함대는 북쪽으로 이동해 1월 15일 타이완을 다시 공격했다. 다음 날에는 홍콩, 광저우, 하이난섬에 공습이 가해졌다. 제3함대는 타이완과 류큐 제도에 공격을 한 후 1월 20일 남중국해를 떠났으며, 1월 25일 기지로 귀환했다.

제3함대가 남중국해에서 펼친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제3함대는 많은 일본 선박과 항공기를 파괴했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항공기를 잃었다. 역사학자들은 화물 선박과 석유 탱커들의 파괴가 일본군의 전쟁 수행 능력에 중요했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에 기여했기 때문에 공습의 가장 중요한 결과라고 판단하고 있다. 연합군의 항공기와 전함의 이어진 공격으로 1945년 3월 이후 일본군은 남중국해를 통해 선박을 보내는 것을 중단하게 되었다.

배경[편집]

1945년 1월 태평양의 상황. 붉은 색이 연합군의 통제 하에 있는 지역이다.

1941년과 1942년 초반, 일본은 남중국해 지역 대부분을 정복하거나 사실상 지배하게 되었다. 해상을 통제하는 것은 말라야, 보르네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서 석유와 다른 천연자원을 공급하는 통로였기 때문에 일본의 경제와 전쟁 노력에 매우 중요했다.[1]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상황은 특히 복잡했다. 1940년 9월 비시 프랑스 정권에 협력적이었던 식민지 정권과 일본이 대치한 이후 일본은 북부 인도차이나의 항구와 비행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1941년 7월 일본은 남부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뒤, 깜라인만의 중요한 해군 기지를 비롯한 여러 비행장을 건설했다. 프랑스 당국은 괴뢰 정부로 남아있었다.[2] 1944년 프랑스 해방 이후, 식민 정부는 새로운 자유 프랑스 정부와 접촉을 시도했으며, 일본에 맞선 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마쳤다.[3] 일본도 1944년 프랑스군을 강제로 무장해제시킨 뒤 공식적으로 인도차이나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고, 일본군 정보부는 프랑스 당국의 의도를 빠르게 알아차렸다[4][3]

전쟁은 일본에게 불리해졌으며, 남중국해를 통과하는 수송선들은 빈번하게 연합군 잠수함, 그리고 1944년 말부터는 항공기의 공격을 받았다.[1] 연합군은 중국 해안 감시자들 및 아시아의 항구들의 여러 관측자들의 지원을 받은 신호정보와 장거리 항공 순찰로 얻은 정보를 통해 공격을 안내받았다.[5][6] 중국에 주둔하던 미국 육군 항공대 제14공군은 남중국해 지역의 일본 선박을 정규적으로 공격했다. 제14공군은 일본군이 점령한 남중국의 항구와 인도차이나의 군사 시설에도 간헐적인 공격을 가했다.[7][8] 연합군의 비밀 임무도 인도차이나에서 1945년 2분기까지 몇몇 활동을 진행했다.[9][10]

유조선화물선의 손실이 급격하게 증가하였음에도 일본 정부는 선박들에 남중국해를 통한 항해를 지속할 것을 요구했다. 손실을 줄이기 위해, 수송선은 해상 통로로부터 멀리 떨어진 . In an attempt to limit losses, convoys and individual ships took routes well away from the established sea lanes, or sailed close to the shore and operated only at night.[1]

The United States began the liberation of the Philippines on 25 October 1944, with a landing at Leyte island in the central Philippines. After a base was established at Leyte, American forces landed at Mindoro island on 13 December. This operation was conducted to secure airfields that could be used to attack Japanese shipping in the South China Sea and support the largest element of the liberation of the Philippines, a landing at Lingayen Gulf in north-western Luzon that was scheduled for 9 January 1945.[11] The Imperial Japanese Navy (IJN) suffered heavy losses in its attempt to attack the Allied fleet during the Battle of Leyte Gulf in October 1944 which, when combined with the losses during the Battle of the Philippine Sea in June 1944, left it unable to conduct further major battles. However, it remained capable of raiding Allied positions.[12]

During late 1944 Admiral William Halsey Jr., the commander of the United States Third Fleet, sought to conduct a raid into the South China Sea and led the development of plans for such an operation.[13] On 21 November he asked Admiral Chester W. Nimitz, the head of the United States Pacific Fleet, for permission to begin the attack but was turned down.[13]

  1. Royal Navy 1995, 133쪽.
  2. Spector 1985, 17–18쪽.
  3. Spector 1985, 29쪽.
  4. Dommen 2001, 75쪽.
  5. Craven & Cate 1953, 491–492쪽.
  6. Parillo 1993, 89–90쪽.
  7. Bailey 2017, 113쪽.
  8. Dommen 2001, 62–63쪽.
  9. Spector 1982, 29쪽.
  10. Smith 2008, 40쪽.
  11. Royal Navy 1995, 123쪽.
  12. Royal Navy 1995, 134쪽.
  13. Morison 2002, 1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