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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집 수정 자료 참고 / 20829

양촌집(陽村集)은 여말선초의 학자 권근의 시문집으로 전 40권으로 되어있으며 권근의 둘째 아들 권도세종 초에 편찬 간행하였다. 양촌은 스스로 지은 권근의 호로 고려말 충주에 유배되었을 때 현재 충주시 소태면 양촌리인 양촌에 살게 되어 양촌을 호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고, 틈만 나면 양촌으로 가려고 했던 점을 보아 양촌을 출생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 [1]


` 시조 시 / 30312


` " 꽃피고 새 운다고 다 봄이 아니구나

` 씨 알을 깨워내야 참 땅이 아닐런지

` 뉘라서 조화구슬 겹겹 벗겨내여 빛낼까 "


,< 明 志 >


` * 立 / 20919


우리는 종종 남들이 자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하는 일을 저평가 했을 때

자기를 진정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곤 한다.단지 나의 이름을 기억하거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까지 알아주는 사람, 곧 지기(知己)의 부재를 아쉬워한다.

그런데 나보다 나은 사람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다지 관심이 없고 나보다

못한 사람은 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만한 눈이 없다.

그나마 나와 비슷한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편이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는 것이 사람 마음이고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이 백이면 백 다 다른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이런 나의 마음을 뉘라서 쉬 알아줄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어떤 말을 했을 때 얼마나 고심 끝에 그 말을 꺼냈는지

생각 없이 말하다 보니 그런 말이 나왔는지

남들은 모를지라도 자기 자신만은 속속들이 안다.

어떤 일을 했을 때도 마지못해 형식만 갖춰 한 것인지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한 일인지 남들은 모를지라도 자기 자신은 안다.

남이 아무리 내 마음을 알아준다 한들

나 자신이 나를 아는 데에는 미치지 못한다.

진실로 자기 자신을 안다면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글쓴이는 말한다:


“지기를 구하는 길은 내가 나 자신을 아는 것만 한 것 없다.”


` 글쓴이 : 오재환(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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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權近)에 대하여[편집]

1352년(공민왕 1)∼1409년(태종 9).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진(權晉),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 권보(權溥)의 증손이다.


1. 조선 개국전의 정치활동


1368년(공민왕 17)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하여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을 주장하였으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관대사성‧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1388년(창왕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

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서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을 때,

명나라 예부자문(禮部咨文)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에 중도에 몰래 뜯어 본 죄로 우봉(牛峰)에 유배되었다.

그 뒤 영해(寧海)‧흥해(興海) 등을 전전하여 유배되던 중,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한때 청주 옥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뒤에 다시 익주(益州)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충주에 우거(寓居)하던 중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


2. 조선 개국초의 정치활동‧관력


1393년(태조 2) 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 태조의 아버지 桓祖의 능침)의 비문을 지어바쳤는데, 이 글들은 모두 후세사람들로부터 유문(鎪文)‧곡필(曲筆)이었다는 평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 뒤 새 왕조에 출사(出仕)하여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중추원사 등을 지냈고, 1396년 이른바 표전문제(表箋問題)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그는 외교적 사명을 완수하였을 뿐 아니라, 유삼오(劉三吾)‧허관(許觀) 등 명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응제시(應製詩) 24편을 지어 중국에까지 문명을 크게 떨쳤다.

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고, 정종 때는 정당문학(政堂文學)‧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사병제도(私兵制度)의 혁파를 건의, 단행하게 하였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402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曉) 등을 뽑았고, 1407년에는 최초의 문과 중시(重試)에독권관(讀卷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3. 학문적 업적


한편, 왕명을 받아 경서의 구결(口訣)을 저정(著定)하고, 하륜(河崙) 등과 《동국사략》을 편찬하였다.

또한, 유학제조(儒學提調)를 겸임하여 유생교육에 힘쓰고, 권학사목(勸學事目)을 올려 당시의 여러가지 문교시책을 개정, 보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詞章)을 중시하여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하였고,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연구에 정진하여 고려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주로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으로 대표되는바,《입학도설》은 뒷날 이황(李滉) 등 여러 학자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고,

《오경천견록》 가운데《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은 태종이 관비로 편찬을 도와, 주자(鑄字)로 간행하게 하고 경연(經筵)에서 이를 진강(進講)하게까지 하였다.

이밖에 정도전의 척불문자(斥佛文字)인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에 주석을 더하기도 하였다.

저서에는 시문집으로 《양촌집》 40권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菊澗에 쓰다 20906


澗上幽人一畝官 鮮鮮秋氣滿籬東

欲知今日思君意 如見吾家文正公


시내 위 숨은 사람

한 이랑 집에 우리 집 문정공

가을 기운 고와고와 울을 들렀네

오늘날 임그리는 뜻을 알면은

우리 집 문정공을 뵌 듯하네


그사람은

[蹇驢影裏碧山晩] 절름발이 노새 그림자 속에 푸른 산 저물어 가고

[斷鴈聲中紅樹秋] 외기러기 울음 속에 가을 단풍 짙어간다

[獨鶴何歸天杳杳] 하늘 어둑한데 외로운 학은 어디로 돌아가는 건가

[行人不盡路悠悠] 행인 그치지 않고 길은 멀고 멀다’

라는 한 구절을 기억하였으나,

[獨鶴何歸天杳杳] 하늘 어둑한데 외로운 학은 어디로 돌아가는 건가

[行人不盡路悠悠] 행인 그치지 않고 길은 멀고 멀다’

[蹇驢影裏碧山晩] 절름발이 노새 그림자 속에 푸른 산 저물어 가고

[斷鴈聲中紅樹秋] 외기러기 울음 속에 가을 단풍 짙어간다


` 四宜齊 / (다산 선생)


生覺은 마땅히 澹泊하게 하고

外貌는 마땅히 嚴正하게하고

言辭는 마땅히 寡黙하게하고

行動은 마땅히 重厚하게 하라


고맙습니다 !!


자소집서 / 20703 연암 박지원


참된 문학은 어디에...

아아 ! 예법이 도읍에서 살아지면 초야에서 찾는다더니...

그 말이 틀림없지 않은가 ? 지금 중국의 모든 사람들이 머리깍고 오랑케 옷을 입었으니

저 한나라 때 부터 내려 오던 관리의 위엄있는 차림새를 알지 못한직 벌써 백년이나 넘었다.

그런데 유독 연극마당 에서만 검정색 관모와 옷깃이 둥근관복, 옥 허리띠와 ,

상아 홀을 뽄 . 아니면 혹시 연극마당에서 이를 즐겁게 구경하면서

예로 부터 전해오는 제도를 상상하는 사람이라도 있겠는가 떠서 장남과 웃을 거리로 삼고있다.

아아 ! 중원으 유노들은 다 세상을 더났지만. 그래도 혹시 낮을 가리고

차마 그 꼴을 보지 못 할 사람이 있겠는가  ?

새해 문안차 조공을 바치러 가는 사신이 북경에 들어 갔을 때 오 지방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 우리 고장에 머리깍는 기계가 있는데. 성세낙사라고 써놓았더랍니다

" 하므로 서로보며 한바탕 웃다가 그만 눈물을 흘릴뻔 했다고 한다.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서글퍼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 습관이 오래되면 천성이 되는 법이다. 민간에서 습속이 되었으니

어찌 변화 시킬수 있겠는가 ? 우리나라 부인네 의복이 바로 이일과 매우 비슷하다.

옛 제도에는 바로 허리띠가 있으며,모든 맵시 옷이 소매가 넓고 치마 길이가 길었다

그러나 고려말에 이르러 원 나라 공주에 장가드는 임금이 많아지면서, 궁중의 머리 모양이나 ,

옷차림새가 모두 몽골의 오랑케 제도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자 사대부들이 다투어 궁중의 양식을 숭모하는 바람에 . 마침내 풍속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삼 사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제도 변하지 않고 있다.

저고리 길이는 겨우 어깨를 덮을 정도이고 . 소매는 졸라맨듯이 좁아서 경망스럽고 단정치 못한

모습이 너무 한심 스럽다. 그런 반면 여러 고을 기생의 읭복은 도리어 원삼에 선을 둘렀다.

지금 그 옷의 넓은 소매가 여유있고 긴 띠와 죽 드리워진 것을 보면 유달리 멎저서 만족스럽다.

그런데 지금 예법을 제대로 아는 집이 있어서 그 경망스러운 습관을 고쳐 옛제도를 회복하고자 해도

민간의습속이 오래 되어 넓은 소매와 긴 띠를 한 기생의 의복과 비숫하다고 여긴다.

" 이흥재군은 스므살 때 부터 나에게 글을 배웟다. 하지만 장성해서 중국어 통역을 익혔으니 .

그 집안 대대로 역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에게 다시 문학을 권하지 않았다.

이 군은 중국어 통역을 익히고 나서 ,관복을 입고 서역원에 출근하게 되었다.

나 역시 속으로 " 이군이 전에 글을 읽을 적에 자못 총명하여 문장의 도를 능히 알았는데.

지금 다 일어 버렸을 터이니 재주가 살아지고 말것이 한탄스럽다. 고 생각하였다. 하루는 이군이

자기가 적은 글이라고 말하면서 , 자소집 이라 이름을 붙이고서 나 에게 보여주었다.

論, 辯, 序, 記, 書, 說등 각종 문체의 글 백 여편이었다. 모두ㅡ 해박한 내용에다

웅변을 토하고 있어 특색있는 저작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처음 의하해 하며,

" 바신의 본업을 버리고 이런 쓸데 없는 일에 종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

하고 물었더니,이군은 미안해 하면서,"이것이 바로 본업이며 쓸데가 있습니다."

대개 중국과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외교 문서를 잘짖고 근거가 되는 선례에 밝은 것도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서역원의 관리들이 밤낮으로익히는 것을 모두 고전적인 산문이며 ,

글재를 주고 재주를 시험하는 것도다 여기에서 취합니다.

" 하였다. 이에 나는 낮빛을 고치고. 탄식하여 이렇게 말했다.

" 사대부 들은 태어나 어렷을 적에는 제법 글은 읽네 하지만. 성장해서는 과거 시험 문장을 배우고

화려하게 꾸미는 변리체의 글을 익숙하게 짖지, 과거에 합격하고 나면 이를 더 이상 슬데 없는 것으로

여기고 합격 못하면 머리가 허엿게 되도록 이에 매달리네 그러니 어찌 다시 이른바

고전적인 산문이 있씀을 알겠는가" 역관이란 직업은 사대부들이앝잡아 보는 바이다.

하지만 나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책을 저술해서

후세에 훌륭한 글을 남기는 참된 학문을 도리어 서리들의 하찮은 기예로 간주 될까 두렵다.

그렇게 되면 그것을 연극 마당의 검정색 관모나 ,고을 기생들의 긴 치마 처럼 여기지 않는

사람이거의 드믈 것이다. 나는 그러므로 이렇게 되란 것이 두려워 , 이 문집에 대해 특필하고 나서

다음 과 같이 서문을 붙인다.

"아 아 ! 예법이 도읍에서 사라지면 초야에서 찾는 법이다. 예로 부터 전해 온

중국 고유의 제도를 보려면 마땅히 배우들에게서 찾아야 할것이요, 예 스럽고

우아한 부인네 의복을 찾으려면 마땅히 고을 기생들에 게서 보아야 할 것이다

훌륭한 문장을 알고 싶다고 한다면 나는 실로 미천한 관리인 역관들에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


고맙습니다 !!

  1. 최효식, 양촌 권근의 조선왕조 입조와 그 공과, 경주사학 제24,25합집 2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