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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10년 전 (Neoalpha님) - 주제: 디시 역갤에서 오셨군요.

8천설이 허구라는 것에 대해 징징대는 한국인. 이 한국인은 8천설이 허구라는 것이 각 사료로 확실하게 확인되는걸 자꾸 개인의 의견이라며 징징댄다.[편집]

아마도 110.13.49.230님과 동일한 사용자이시겠지요? 제가 110.13.49.230님에게 남긴 토론에서 말씀 드렸듯이 출처가 지금 해 놓은 것보다 훨씬 분명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지어 번역된 책을 책 제목만 보여서는 출처라 할 수 없겠지요. 정확한 서지와 쪽 수를 밝혀 주세요. 그리고, “신립군 8천설의 허구” 항목은 완연히 위키백과:독자 연구 금지에 위배됩니다. 객관적 서술이라면, “군 병력 수 논란”이라는 표제어를 두고, “기존 연구에서는 몇 명이라고 한다, 어떤 데서는 몇 명이라고 한다.” 식으로 객관적 정보를 출처 갖춰 보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해당 항목은 의도적으로 한 쪽의 의견에 치우쳐 서술되어 있습니다. 당부 드립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 혹은 조예를 일방적으로 이곳에 풀어 내려고 하지 마시고, 기존 문서와 조화를 이루는 서술, 체계를 갖춰 주시기 바랍니다.--Eggmoon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02:12 (KST)답변

-신립군 '8천'이 허구라는건 백과에 적은 내용만 봐도 충분히 알수있습니다. 충주에서 징집한 병력만 가지고 논합니까. 궁궐에서 징집한 병력이 수천(정만록에 의하면 1만명)이고 유성룡이 신립에게 따로 준 장사 수만 해도 8천명입니다.

위키백과는 그걸 논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해당 항목은 신립군 8천설을 까기 위한 것이라 한쪽에 치우쳐 있으므로 객관적 서술이 아닙니다. 〈군 병력 수 논란〉이라는 항목을 두고 어디서는 8천, 어디서는 1만...., 명확한 출처를 갖춰 제시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백과사전은 옳고 그름을 재단하는 곳이 아닙니다. 사실을 출처 갖춰 보여주면 됩니다. 자신의 의견이 맞다는 논설은 210.205.208.187님의 블로그에 쓰거나 학회에 논문으로 발표하세요. 백과사전은 논문이 아닙니다. 위키백과:위키백과에 대한 오해 중 “위키백과는 개인의 의견이나 생각을 발표하는 곳이 아닙니다.”, “위키백과는 설명서, 안내서, 교과서, 학술 잡지가 아닙니다.”를 찬찬히 읽어 보고 편집에 임해 주기 바랍니다.--Eggmoon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20:14 (KST)답변

-객관적 서술이 아니라는건 당신 생각이고. 충분히 백과에 표기했습니다. 불만이면 징징대지말고 반대 의견을 적든가요.

신립군이 8천이든 100만대군을 몰고 갔든, 그건 위키백과에서 논하는 사항이 아닙니다. 그냥 출처를 갖춰 제시만 하세요. 지금 우리가 신립군은 8천인데 왜 아니라고 하냐 이걸 주장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불만은 귀하가 한쪽으로 치우쳐서 편집하는 것이지, 신립군의 규모가 아닙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21:09 (KST)답변

-신립군이 8천이 아니라는건 한쪽으로 치우쳐 편집하는게아니라 '팩트'를 기술하는겁니다. -- 조선군의 숫자에 대해서는 그동안 8천 정예 병력으로 알려져 왔으나, 실록에 전하는 바는 이와 다르다.

유성룡의 징비록 : "신립이 충주 고을들에서 8천 군사를 모았다."

그러나 독실한 예수회 신자 고니시 유키나가의 친구이자 일본쪽 예수회 신부들의 우두머리인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 [일본사]에 탄금대 전투 당시 신립군의 숫자를 8만이라 적고 전투 상황을 조선 기록들과는 달리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충주 근처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이 흐르고 있다. 아고스띠뇨(고니시)가 군대를 거느리고 그 마을에 도착하자, 역관(경응순)이 약속대로 와서 기다리기는커녕 조선 국왕의 회답 대신 최후의 운명을 걸고서 서울로부터 온 8만 명의 군대가 그들을 목표로 출진(出陣)해 왔던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기마병으로서 일본군과의 야전을 치르기 위해 선발된 왕궁의 신분 있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병력 수에서도 훨씬 우세하였고, 아고스띠뇨의 군대가 도중에 피로를 무릅쓰면서 무리해서 진격해 오기 때문에 승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사실 일본인들도 피아의 병력 차가 너무 크고 불균형한 것을 보고 적잖게 당황하고 주저하였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따라서 유성룡이 말한건 단지 '충주 고을들'에서의 8천을 징집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선조실록의 내용이다. 신립군을 10만 정예병 대군大軍이라고 적는다.

"변란이 있을 처음에 신립(申砬)이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어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조령(鳥嶺)에서 적을 방어하였는데, 신립이 험조한 곳에서 대항할 생각을 하지 않고 평원 광야(平原廣野)로 영입(迎入 :적군을 유인)함으로써 좌우에 적이 가득 차서 미처 교전도 못하고 10만의 정병(精兵:정예병)이 모두 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끝내는 경성(京城)을 지키지 못하고 임금이 파천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變初, 以申砬爲都巡察使, 領大軍, 禦賊于鳥嶺。 砬不爲據險把截之計, 迎入於平原廣野, 左右彌滿, 曾未交鋒, 而十萬精兵, 一敗塗地。 遂使京城不守, 乘輿播越, 痛哉! -선조실록 71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1월 24일(신묘)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keyword=신립

다음은 의병장 조경남의 난중잡록 내용이다. 각 도의 정예병과 중앙군으로 구성된 6만이라 적는다. 6만 대군大軍이라 적고있으며 충주백성들은 신립군사가 대군大軍이기에 피난가지않았다고 적는다.

"신립은 여러 도의 정병(精兵)과 무관 2천 명, 종족(宗族) 1백여 명, 내시위(內侍衛)의 군졸 등 도합 6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령으로부터 다시 충주로 후퇴하였는데" 申砬盡率諸道精兵及武官二千,宗族百餘員,內侍衛卒幷六萬餘兵.自鳥嶺還退忠州.從事金汝?.因李鎰之言.請堅守山路. 砬不聽曰.過海之賊.不能?步.遂背?川.結陣于彈琴臺.>. <我 國 精 兵. 盡 殲 於 忠 尙 之 兩 役 云.비안(庇安)의 왜적이 예천(醴泉)의 다인현(多仁縣)으로 나가 주둔하고 중도(中道)의 대부대 왜적이 인하여 충주를 함락시키니, 목사 이종장(李宗長)은 도망쳐 달아나다. 그때 충주 등지의 사람들은 신립의 대군만을 믿고 집에 있다가 변란을 당한 것인데 뜻밖에 신립의 군대가 패하였다. 적병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죽이고 약탈하고 하는 참상이란 더욱 말할 수 없다. 왜적이 우리나라에 말을 전해오기를, “정탁(鄭琢)과 이덕형(李德馨)을 내보내라. 운운.” 하다."-의병장 조경남의 난중잡록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 선조실록 ,난중잡록이 적는 신립군의 숫자는 8만,10만,6만으로 숫자가 서로 비슷하다.

다음은 일본측 정사 기록 '서정일기'의 내용이다. 신립군을 '수만'이라 적고있다. 수천은 확실히 아닌 것이다.

"4월28일 맑음, 인각에 문경 출발, 진각에 안보 통과, 오각에 충주 도착. 충주부 북쪽 반리 지점 송산에 신입석(신립의 오류) 장군이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결진. 대주(종의지)와 섭주(소서행장) 병력이 공격하여 전과 참수 3000급, 포로 수백명. 적 대장 신입석 전사." - 일본 서정일기 4월27일자

이외에도 신립의 병력이 8천이 아니라는건 아래의 신립의 병력 모집 사항과 관련 기록을 보면 충분히 알수있다.

그럼 그걸 신립군의 규모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각 사료마다 다르게 표시하고 있다.고 간단히 적을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그러고 나서 주석으로 8만의 근거, 10만의 군거, 6만의 근거 이렇게 적으면 되지, 정리를 좀 하시라구요.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21:20 (KST)답변

-징징대지말고 똑바로 들으시죠. 각 사료마다 다르게 표시하는게아니라, 애초에 8천설 자체가 징비록의 충주에서의 8천 모집만을 가지고 착각한거에서 나온겁니다. 각 사료는 '수만'명입니다. 그러니까 8천이 허구라는겁니다.


문서는 잘 정리됐고 한국,일본,유럽 기록으로 세분화되어 정리되었는데. 문서가 정리안된다고 징징대는 한국인[편집]

제 말이 잘 전달이 안되는 모양인데, 저는 그 망할놈의 신립군이 8천이든 100만이든 관심 없습니다. 오로지 문서가 정리 안되는게 짜증나는 겁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21:25 (KST)답변

자꾸 백과사전을 반달시키는 한국인[편집]

위키백과는 책의 내용을 전부 싣는 장소가 아닙니다. 최대한 간추리세요.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18:39 (KST)답변

'한국,일본 탄금대 전투 기록'으로 항목 이름 수정했습니다. 책의 내용을 전부 싣으려는게아니라 정확한 팩트를 위해서 한,일 탄금대 전투 기록을 실어두는 것이니 반달 테러 자제좀 하세요.
탄금대 전투문서는 지금 백과사전 수준의 문서가 아닙니다. 좋은 내용을 기여해주시려는 점은 정말 감사하나, 정말 제대로 기여해주시고 싶으면 백:아님을 제발 읽어주세요. 일단 대폭 정리합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18:56 (KST)답변
반달 테러 하지좀마세요.
문서 정리가 반달이라는 건 듣느니 처음입니다. 저 문서 한번 읽어보십시오. 저게 지금 독자들 읽으라고 써놓은 겁니까?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19:11 (KST)답변
제발 문서 정리좀 합시다. 역사학자나 역사에 매우 관심있는 역덕후는 저 문서 읽고 이해가 가겠지만, 지금 그런사람들만 읽으라고 문서 만드는게 아닙니다. 누구나 읽고 이해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야지, 소수만이 읽을 수 있는 문서를 만들자고 위키백과가 있는게 아닙니다. 제발 호소하니, 정리좀 합시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19:22 (KST)답변

-제발 호소하니 반달 좀 하지 맙시다. 출처 다 표기해서 문서 정리했으니까 반달 테러 하지마세요.

귀하의 출처가 근거 없다는 것도 아니고,그냥 단순히 정리좀 하자는데 그걸 반달이라고 하시니 정말 유감입니다. 저렇게 지저분하게 쓰지 않아도 내용 전달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리고, 고니시에 대한 설명은 고니시유키나가 문서를 보면 될 일을 굳이 주석에 기입할 이유도 없습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20:15 (KST)답변

-정리가 아니라 반달인데. 반달을 반달이 아니라하니 정말 유감입니다. 지저분하다는건 당신 주관적인 생각인데. 내용전달이 충분하긴 뭐가 충분이요. 한,일 전투 기록을 실어놓아서 잘 모르는 사람들도 객관적 팩트를 알수있게 하려는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막는거요. 당신이 신립이나 고니시 유키나가인가.

디시 역갤에서 오셨군요.[편집]

위에서 밝혔듯이 전 그 빌어먹을 조선군이 8천이든 8만이든 100만 대군을 이끌고 왔든 관심 없습니다. 아, 한가지 더. 전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군의 뼈와 살이 분리됬다고 여깁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22:22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