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하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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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rine of Bahá'u'lláh
바하올라

미르자 알리 호세인(Mírzá `Alí Ḥossein, 1817년 ~ 1892년)은 뒤에 바하올라(Bahá'u'lláh, 아랍어로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뜻)이라는 직함을 사용했다. 그는 바하이 신앙의 창시자로서 자기 자신이 신문명 시대의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사자라고 주장했다.

그의 종교는 당시에 이란에서 크나큰 이슈로 등장했던 바비교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 바비교는 다시금 오늘날 이란의 국교인 시아파 이슬람교의 교리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요약해 기술하자면, 이슬람교의 일부 시아파에서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바르게 해석하고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슬람 사회를 포함한 인류 세계를 인도할 지도자가 누구인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성직의 지도자를 이맘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모함마드의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포함하여 그 후손 총 12명을 인정하고 있다. 그중 맨 마지막 12번째 이맘이 인간 세속에서 사라졌는데 이를 성식이라고 하며, 성식한 이맘이 다시금 세상에 나타나고 성지에 순례 올 것이라는 예언을 믿고 있다. 이 이맘을 특별히 마디라고 한다. 바비교의 창시자의 바압(일명 바브)가 바로 그 마디라는 것이다. 이 바압이라는 교주는 7년간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자신 이후에 하느님의 사자가 나타날 것이니 그를 영접하라는 말씀을 간곡히 거듭 부탁하셨다. 바하이 신앙을 가진 이들은 그를 일컬어 "하느님이 현시하실 분"이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 하느님의 뜻을 인류에게 전달할 분이 곧 나타나실 것이라는 예언을 바압이라는 분이 남기셨다는 것이다. 그 예언에 따라 종교 역사에 마침내 등장하신 분이 바로 이 바하올라라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하올라께서는 당신 자신이 이 시대의 하느님의 현시자이자, 재림한 예수(라틴어 성경에서는 요한복음 14,15,16장에서 보혜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이자, 이슬람 전통인 하디쓰의 호세인이자, 불교의 미륵불이자 힌두교 크리슈나의 환생(부활) 등 인류가 접했던 과거의 종교의 예언에 나오는 궁극적인 대언자(하느님의 메시지를 인류에게 가르치는 성인)에 해당한다고 선포하셨다. 이 때가 1863년 5월 23일이다. 바하올라는 당신이 나타난 바로 이 시대가 과거의 종교의 경전에서 표현되는 그토록 갈망했던 "날"이며 당신과의 만남이 모든 하느님 믿던 신실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그토록 애타게 고대하는 바로 그 목적이었다고 역설했다. 또한 당신의 새로운 계시로써 과거의 모든 종교의 계시의 가르침이 보다 고양되고 궁극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바하올라의 묘는 이스라엘의 바아지(Bahji)에 있다. 바하올라는 그러한 계시로서 여러 책을 남겼는데 이란어와 아랍어로 쓰여진 원전의 극히 일부만이 영어, 프랑스어, 에스파냐어, 중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그의 저서 중 케타베악닥스(지성서; 이 시대의 인류가 행복하게 살기 위한 하느님의 율법서)가 2006년 이전에 출판될 예정이며 케타베이깐(확신의 서; 당시의 바압이 이슬람교 경전인 꼬란의 예언대로 하느님 뜻에 따라 나타나신 분이라는 확증을 담은 책)의 대부분의 내용이 번역되어 2010년쯤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가족과 유년시절[편집]

바하올라 (Baha’u’llah)는 1817년 11월 12일 페르시아, 현재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태어났다. 바하이 저자들은 그의 조상 내력이 아브라함 (Abraham)의 아내 그두라 (Keturah) 를 통해 조로아스터 (Zoroaster)와 야즈디기르드 3세 (Yazdigird III), 사산왕국(Sassanid Empire)의 마지막 왕, 그리고 이새 (Jesse)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바하이 저자 존 에이블 (John Able)에 따르면, 바하이들은 바하올라가 “아브라함과 사라 (Sahrah)에서는 둘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두라 사이에서는 따로 이중후손” 으로 여긴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Khadíjih 하눔 (Khadíjih Khánum)이고 아버지는 미르자 보조르그 (Mírzá Buzurg)이다. 바하올라의 아버지 미르자 보조르그는 파트 알리 샤 카자르 (Fat′h Ali Shah Qajar)의 12번째 아들 Imám-Virdi 미자르 (Imám-Virdi Mírzá)의 고관을 지냈다. 미르자 보조르그는 후에 보르드즈허드 (Burujird)와 라리스탄 (Lorestan)의 총독을 지내지만 모함마드 샤 (Muhammad Shah)의 왕위 세습 중 일어난 정부 숙청에서 지위를 박탈 당한다. 아버지의 죽음 뒤 바하올라는 새로 발탁된 고관 하지 미르자 Aqasi (Hajji Mirza Aqasi)로 부터 관직 참여 부탁을 받지만 이를 거절한다.

바하올라는 세번 결혼 하는데, 첫번째 부인은 귀족집안의 딸인 Ásíyih 하눔 (Ásíyih Khánum)으로 1835년 테헤란에서 결혼, 당시 그는 18세 그리고 그녀는 15세였다. 그녀는 칭호 “The Most Exalted Leaf” 와 나밥 (Navváb)을 부여 받았다. 그의 두번째 결혼은 그의 미망인 사촌 Fátimih 하눔 (Fátimih Khánum)과 1849년 테헤란에서 였는데 그의 나이 32세 그녀의 나이 21세였다. 세번째 결혼은 1863년 바그다드 (Baghdad)에서 가와르 하눔 (Gawhar Khánum)과 이다.

바하올라는 Ásíyih 하눔(Ásíyih Khánum)을 그의 “perpetual consort in all the worlds of God” 으로, 그녀의 아들 압돌바하 (`Abdu’l-Bahá)를 그의 대리인으로 공표했다. 그는 네명의 딸과 열명의 아들, 도합 14명의 자손 있고 그 중 다섯은 먼저 여의었다. 바하이들은 Ásíyih 하눔과 그녀의 자손들, 미르자 Mihdí (Mírzá Mihdí), Bahíyyih 하눔 (Bahíyyih Khánum)과 압둘바하를 바하이 성 가족으로 여긴다.

바비교 운동[편집]

1844년 쉬라즈 (Shiraz) 출신의 25세 남자 시이드 미르자 알리-무하마드 (Siyyid Mírzá `Alí-Muḥammad)는 바압 (Báb), “문 (Gate)” 이라는 칭호를 자신에게 부여하며 자신이 약속된 이슬람의 구세주, 마흐디 (Mahdi)라고 주장한다. 바비교 (Bábism)운동은 페르시아 왕국 내에 빠르게 퍼져 나가 이슬람교의 성직자들과 크게 반항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압 자신은 1850년 30세의 나이에 타브리즈 (Tabriz)의 공립광장에서 총살집행대에 의해 처형 당하고 1852-3년에는 바비교 공동체가 거의 몰살되는 상황이 된다.

바압은 자신이 현시자라 주장했지만 자신이 최후의 현시자라는 주장은 하지 않았다. 그의 거의 모든 저명한 글에서 바압은 ‘약속된 분’을 암시하며 “하느님이 시현하실 그 분” 이라 자주 일컬었다. 바압에 의하면, 이전 종교들의 성서에 약속 되어왔던 이인물이 지상에 하느님의 왕국을 구축할 것이며, 하느님으로부터 시현될 ‘그’ 의 출현이 임박하다는 것이 바압의 여러 저서에 명시되어 있다. 바압이 저작한 책들에서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앞으로 나타날 하느님이 시현하실 ‘그’ 를 따르라 거듭 간청 했다. 바압은 그의 운동에서 기존 기관에 존재하는 후계자 관례 또는 대리인직을 없애며, 자신이 죽은뒤 하느님이 시현하실 ‘그’ 가 나타날 때까지 어느 누구의 글도 구속력이 될 수 없음을 공표했다.

바압의 수용[편집]

바하올라가 바압에 관해 들은 것은 27세때 였고, 바압이 보낸 물라 호세인 (Mullá Husayn)의 방문을 받아 바압과 그의 사명에 대해 듣게 된다. 바하올라는 바압의 사명을 받아들이고 바비교인이 되어 이 새로운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것에 참여하며, 특히 그의 고향 누르(Núr)에서는 가장 영향력있는 신자 중의 하나가 된다. 현지인이라는 점이 그에게 많은 기회가 생기는 계기가 되었고 그의 선교 활동은 종교 계급층에도 전해질 만큼 성공적이었다. 그는 또한 Táhirih (Táhirih)등의 바비교인들을 보호하는 일을 도와 일시적으로 테헤란의 감옥에 수감되어 매질을 당했다. 1848년 바하올라는 81명의 저명한 바비교인들이 모여 22일 기간의 Badasht 회의 (conference of Badasht) 에 참석하였으며, 이 회의에서 이슬람법을 유지하는가 아니면 바압의 성명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율법을 채택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바하올라는 새로운 율법에 찬성하며 이는 곧 정식 채택된다. 이 회의에서 바하올라는 바하(Bahá)라는 이름을 채용 한다.

1848년 말 바비교인들과 카자르 정부 사이의 폭행이 시작되면서 바하올라는 마잔다란(Mazandaran)의 세이흐 타바르시(Shaykh Tabarsi)에 농성중인 바비교인들을 찾아가나 도착하기 전에 잡혀 수감된다. 이듬해 부터 1850년까지 바압 자신이 하느님의 현시자라는 공개 주장 후부터 바비교인들은 여러 지역에서 대학살을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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