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비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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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천 전투
날짜670년 7월[1]
장소
칭하이성 대비천
결과 토번의 승리
교전국
당나라 토번
지휘관
설인귀
곽대봉
아사나도진
논흠릉
병력
불명 40만명[2]
피해 규모
50만명[1] 불명

대비천 전투(大非川戰鬪)는 670년 7월[1] 대비천에서 일어난 토번과 당나라 사이에 일어난 전투이다. 대비천(大非川)은 칭하이호의 남쪽에 위치하며 포라하(布喇河)라고도 불린다.[3]

배경[편집]

663년, 가르통첸토욕혼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히자 은 위협을 느겼으며 그로 인해669년, 당 고종설인귀로 하여금 토번을 치게하게 된다.

전투[편집]

곽대봉이 설인귀의 명령을 듣는것에 불만이 있어 기습을 하라는 설인귀의 지시를 무시한다.[2] 그런 상황을 이용해 가르친링은 곽대봉과 설인귀의 군대를 궤멸시킨다. 그 후 설인귀·곽대봉과 아사나도진은 생포되어서 가르친링에게 끌려왔고 다시는 토번을 공격하지말라는 훈계를 듣고 풀려난다.[2]

각주[편집]

  1. 鄭淳台. “韓國史의 운명을 결정한 현장-靑海省을 가다 (1)”. 
  2. 사마광 (2009). 〈권201 당시대II〉. 《자치통감. 21: 당시대 2》. 권중달 역. 서울: 삼화. 451-452쪽. ISBN 9788992490214. 곽대봉은 먼저 설인귀(薛仁貴)와는 같은 반열에 있었는데, 토번(吐蕃)을 정벌하게 되면서 그 밑에 있게 된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설인귀가 말한 것은 곽대봉이 대부분 이를 어겼다.
    군사가 대비천(大非川, 청해호의 남쪽)에 이르러서 곧 오해(烏海, 청해성 다마현의 고해)로 향하여 가려고 하면서 설인귀가 말하였다.
    "오해는 험하고 먼 곳이어서 군사들이 가는데 심히 어려우니, 치중(輜重)을 스스로 가지고 간다면 이롭게 되기가 어려운데, 의당 2만 명을 남겨 두어 대비령(大非靈, 청해호의 남쪽) 위에다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치중을 모두 목책 안에다 두고, 우리들은 경무장의 정예를 인솔하여 배나 빠른 속도로 밤낮으로 가서 그들이 대비하지 않은 것을 습격하면 그들을 격파하는 것은 분명하다."
    설인귀는 무리들을 인솔하고 앞서 가서 하구(河口, 積石하구)에서 토번을 쳐서 그들을 대파하여 목을 베고 붙잡은 것이 아주 많았으며 나아가서 오해에 주둔하고서 곽대봉을 기다렸다. 곽대봉은 설인귀의 계책을 채용하지 않고서 치중을 인솔하고 천천히 나아갔다. 오해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토번의 20여만을 만나서 곽대봉의 군사들은 대패하여 돌아서 달아나며 치중을 모두 버렸다.
    설인귀는 물러나서 대비천에 주둔하였는데 토번의 재상인 논흠릉(論欽陵)이 군사 40여만을 거느리고 와서 그를 치니, 당의 군사는 대패하고 죽거나 다쳐서 거의 다 없어졌다.
    설인귀·곽대봉은 아사나도진(阿史那道眞)과 함께 몸을 빼내어 죽음을 면하였고 논흠릉과 화의를 약속하고 돌아왔다. 대사헌 악언위(樂彦瑋)에게 칙령을 내려서 군부대로 가서 그 패배한 상황을 조사하게 하고 묶어서 경사로 호송하게 하였는데, 세 사람은 모두 죽음에서 면제되고 제명되었다.
    논흠릉은 녹동찬(祿東贊)의 아들인데, 동생 찬파(贊婆)와 실다우(悉多于)·발론(勃論)과 더불어 모두 재주와 지략을 가지고 있었다. 녹동찬이 죽자 논흠릉이 그를 대신하였고, 세 동생은 군사를 거느리고 밖에 있으니 이웃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3. 크리스 피어스. 《전쟁으로 보는 중국사》. 황보종우 역. 수막새. 144쪽. ISBN 9788991205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