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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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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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대한민국 | |||
생년월일 | 1952년 2월 23일 | (72세)|||
출신지 | 대한민국 | |||
신장 | 176 cm | |||
선수 정보 | ||||
수비 위치 | 투수 | |||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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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우식(南宇植, 1952년 2월 23일 ~ )은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출신의 기업인이다.
생애
[편집]그는 초등학교 때에 야구부에 입단했으나 경북중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포지션은 포수였으나 중학교 2학년 때에 야구부 박창용 감독이 '투수에 알맞은 폼'이라면서 투수 전향을 권했고 이후 투수 전향을 해 은퇴할 때까지 투수 생활을 계속했으나 타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전국 대회 6개 중 5개를 제패했으며, 이후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했다.[1]
고등학교 시절 팀의 거의 모든 경기에서 완투를 했으며, 1971년, 고등학교 3학년 때 거의 모든 대회의 경기를 완투하면서 고교야구 사상 최초로 5관왕을 이루어 냈다. 한·일 고교야구 교환 대회에도 출전, 6전 전승을 도왔다. 이후 한양대학교에 진학했으나[2] 고교 시절 어깨와 팔꿈치에 가해진 과부하가 대학 진학과 함께 문제를 드러내어[3] 고교 시절의 빠른 공은 다시 볼 수 없었으며 이 탓인지 성인무대에서 평범한 강속구 투수로 전락했다.
1975년 7월, 실업팀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으나 이후 1976년부터 1978년까지 3년간 상무에 복무하였다. 이때 박철순을 만나게 되었고, 박철순에게 투구에 대한 지도를 해 주었으며[4] 공군(성무)에서 제대한 뒤 1979년 다시 팀으로 돌아왔으나 은퇴를 선언했다[5]. 은퇴를 결정한 뒤에 롯데 그룹에 입사했으며 2009년 푸르밀의 이사로 임명받았고[6] 경북고 시절 스승이었던 서영무가[7]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초대 감독에 임명되자 투수코치 물망에 올랐지만 고사했다.
투구
[편집]그는 오버핸드 강속구 투수로 구질은 포심 속구를 비롯해 슈트, 커브, 드롭, 너클볼 등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부분 직구로 승부했다.[1] 구속은 그 당시에는 스피드 건이 없었으나 그의 동기생은 150km 정도 나왔다고 증언했다.[8]
각주
[편집]- ↑ 가 나 최민규 (2007년 7월 5일). “철완투수 남우식의 1971년과 그 뒤 36년”. 스포츠 2.0. 2009년 1월 15일에 확인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최민규 (2007년 7월 5일). “역대 고교야구 최강팀은?(4) 1971년 경북고”. 스포츠 2.0. 2009년 1월 15일에 확인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최홍섭 자유기고가 (2021년 7월 6일). “원조 ‘오빠부대’ 몰고 다닌 청룡기의 전설들”. 주간조선. 2022년 5월 8일에 확인함.
- ↑ 이재국 (2009년 1월 31일). “[피플인메모리] 푸르밀 대표이사 변신 불세출의 강속구 투수 남우식”. 동아일보(스포츠동아). 2023년 9월 22일에 확인함.
- ↑ 전창 (2004년 6월 20일). “[스포츠카페]71년 황금사자기 경북고 우승 주역 남우식씨”. 동아일보. 2023년 9월 22일에 확인함.
- ↑ 이명진 (2009년 1월 14일). “고교야구 스타가 기업 CEO 됐다”. 매일경제. 2009년 1월 15일에 확인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유해길 (2005년 6월 6일). “[한국야구 100주년]⑬우승 제조기 서영무”. 세계일보. 2023년 9월 22일에 확인함.
- ↑ 장강훈 (2009년 1월 14일). “'전설적인 투수' 푸르밀 남우식 대표 '인생도 스트라이크'”. 스포츠서울. 2009년 1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1월 18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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