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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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고각(汲古閣)은, 중국 (明) 말기에서 (清) 초기에 걸쳐 활약했던 학자 모진(毛智)의 장서루(개인 도서관)이자 출판사로, 84,000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모진도 '급고각'을 자신의 당호로 삼았다.

청 동치 연간의 《소주부지》(蘇州府志)에는 상숙(常熟) 영춘문 밖 칠리교에 소재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모진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의 다섯째 아들 모의(毛扆, 호를 급고후인汲古後人이라 하였다)이 급고각과 아버지의 과업을 물려받았다.

급고각의 옛 터는 사가병진(沙家浜鎮) 조빈촌(曹浜村)에 있었다.[1]

역사[편집]

우산모씨급고각도(虞山毛氏汲古阁图)

모진은 명 만력 27년(1599년)에 태어났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한 그는 이후 어머니 과씨(戈氏)로부터 조언을 받고 관리가 되지 못한 대신 그들이 사용할 책을 찍어내기로 결심했다. 천계 6년(1626년)에 아버지가 죽고 수천 경에 이르는 땅을 상속받은 그는 어머니의 지원을 받은 후 재산을 내어 20명이 넘는 각수(목판 제작자)를 고용해 책판 조각을 시작했다.

『우산모씨급고각도』에 급고각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숭정 15년(1642년), 모진은 통가 왕함회(王咸繪)에게 의뢰해 이 그림을 그렸다. 그림에는 아홉 채의 건물과 두 곳의 연못이 그려져 있고, 연못 위에는 이여정(二如亭)과 녹군정(綠君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모진은 녹군정에 머무르면서 생애 수십 년에 걸쳐 자신이 지휘해 찍어낸 책의 목판들을 일일이 교감하고 수정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림 속에 그려진 두 개의 연못 중 하나는 이후 강의 범람으로 사라졌고, 다른 하나는 1970년대에 농경지로 개간되면서 메워졌다.[1]

찍어낸 책(급고각본)[편집]

모진의 급고각에서는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인 《십칠사》(十七史)나, 《진체비서》(津逮秘書), 《육십종곡》(六十種曲) 등의 거질의 서적들이 간행되었고, 그밖에 희귀하고 독특한 서적들도 많이 간행되었다. 그는 고유한 사본을 수집하기 위해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한번은 자신의 집 문에다 "다른 집에서 책값으로 천금을 낼 때 이 집 주인은 천이백금을 냅니다(別家出一千, 門內主人出一千二百)"라고 써 붙이기까지 했다. 심지어 '360일 내내 장사하러 다니느니 모씨 집에 책이나 한 권 팔지(三百六行生意,不如鬻書于毛氏)'는 현지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책을 찍어 내는 비용도 책 하나당 백은 3냥이 소요되었다.[1]

《상소합지고》(常昭合志稿)에 따르면 급고각의 책 간행에 사용된 종이는 강서성에서 맞춤 제작한 것으로 얇은 것은 모변(毛邊), 두꺼운 것은 모태(毛泰)라고 하였다. 그렇게 찍어낸 책들은 모두 원본과 똑같았고, 이를 '모초(毛抄)'라고 불렀다.[1]

소장 도서[편집]

급고각본은 후대에 많은 장서가와 문인의 사랑을 받았으며, 오위업은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급고곡가(汲古閣歌)를 쓰기도 했다.[2] 모진이 처음에 자신의 일을 시작하면서 쓴 《급고각교각서목》(汲古阁校刻书目)에서는 534종의 책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청조에 회도인(悔道人)이라는 사람이 빠진 것을 더 보충해서 44종의 책을 추가, 총 578종의 책을 편찬하였다.

청 말기의 도상(陶湘)은 급고각에서 찍어낸 서적들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하여 급고각에서 찍어낸 책 가운데 총 540종을 보유하고 있었다. 도향이 편찬한 《명모씨족각서목록》(明毛氏汲古阁刻书目录, 1권)에는 623종의 서적이 수록되어 있고, 그 가운데에는 도향 자신이 수집하지 못한 75종의 책도 포함되어 있다. 《명모씨급고각각서목록》(明毛氏汲古阁刻书目录) 서문에는 "포방곡(鲍芳谷)에게는 급고각판존망고 한 권이 있다"라고 했는데, 이는 회도인이 쓴 《급고각각판존망고》(汲古阁刻板存亡考)를 가리킨다. 다만 실제로 회도인은 포방곡이라고 부를 수 없고, 실은 청대 사람 정덕무(郑德懋)이다.[2]

참고자료[편집]

  1. 張玉俊,尋訪汲古閣,蘇州雜誌,2003年06期
  2. 苏晓君,毛晋与汲古阁刻书考略,中國典籍與文化,2006年03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