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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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가쿠(일본어: 高麗楽 고려악[*])는 한국으로부터 일본에 전해진 가가쿠(雅樂)의 일종이다.

역사[편집]

「고마가쿠」(高麗楽)라는 단어 자체가 등장하는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 덴무 천황(天武天皇) 12년(683년) 1월조에 "이 날, 오하리다노마히(小墾田儛) 및 고마(高麗, 고려), 구다라(百済, 백제), 시라기(新羅, 신라) 세 나라의 우타마히(楽)를 뜰에서 연주하였다."[1]는 기록이다.

악사의 수는 직원령(職員令)17에는 네 명, 《영집해》(令集解)에 인용되어 있는 아악대속미상정족설(雅楽大属尾張浄足説)에는 무사(儛師) ・ 산악사(散楽師) ・ 공후사(箜篌師) 각 한 명으로 모두 세 명이라고 되어 있고, 다이토(大同) 4년(809년) 3월의 격(格)에는 횡적사(横笛師) ・ 공후사 ・ 막목사(莫目師) ・ 무사 이렇게 네 명이 되었다. 그 뒤 사이코(斉衡) 2년(855년) 8월 21일 태정관부(太政官符)에서는 오절무사(五節儛師)를 빼고 고려고사(高麗鼓師)를 두게 하였다.[2]

속일본기》(続日本紀)에 따르면 덴표(天平) 3년(731년) 6월에 「아악료(雅楽寮)의 잡악생(雑楽生)의 인원을 정하였다」고 되어 있고, 이로부터 악생(楽生)의 수가 결정되었다. 그에 따르면 고마가쿠는 8인이었으나[3] 요로령(養老令)에서는 20명이 되어 있다. 그 내역은 가쇼(嘉祥) 원년(848년) 9월의 격에서는 횡적생(横笛生) 네 명, 막모생(莫牟生) 두 명, 공후생(箜篌生) 세 명, 무생(儛生) 여섯 명, 고생(鼓生) 네 명, 농창생(弄槍生) 두 명으로 이루어졌다. 그 해에 이들 가운데 무생 두 명을 빼고 정원이 열여덟 명이 되었다. 또한 덴표 15년(743년) 7월 13일에 고마가쿠닌 공문(高麗楽人貢文)에는 「高麗楽人合廿五人〈一人官人、二人師〉」으로 기록되어 있다.[2]

이보다 전인 덴표 13년(741년) 7월에 쇼무 천황(聖武天皇)은 구니(恭仁)의 새 궁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여악(女楽)과 고마가쿠를 연주하게 하였다.[4] 이는 야마시로국(山背国)에 살고 있던 고구려계 도래인들에 의해 공연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는 구다라가쿠(百済楽) ・ 시라기가쿠(新羅楽) 등을 통합하여 좌방(左方)의 도가쿠(唐楽)에 대비해 우방(右方)의 고마가쿠로 형성되었고,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가쇼 원년(848년) 9월의 격에서 백제악 ・ 신라악의 악생이 대폭 감소되었던 것과는 달리 고려악의 악생은 감소되지 않았던 것은 좌우 양부제의 형성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구성[편집]

고마부에(高麗笛) · 히치리키에 산노쓰즈미(三鼓) · 쇼우코(鉦鼓) · 다이코(太鼓)를 쓴다. 고마가쿠에는 고마 이치고쓰죠(高麗 壹越調), 고마효오죠(高麗 平調), 고마 소오죠의 세 가지를 쓰는데, 고마 효오죠 등 고마가쿠에 쓰이는 조(調)는 도가쿠에 쓰이는 것보다 장 2도가 높다. 고마가쿠의 박자에는 요효오시(四拍子-8박이 1마디를 이루고 4마디가 한 장단을 이룬다)와 아게효오시(揚拍子-4박이 1마디를 이루고, 2마디가 한 장단을 이룬다), 가라효오시(唐拍子-4박이 1마디를 이루고 2마디 첫박에 북을 친다)의 세 가지가 있다. 고마가쿠는 도오가쿠처럼 라이(來-장고의 굴림채에 해당)를 쓰지 않고 부점(附點)의 리듬을 가진 것이 특이하다. 고마가쿠의 고악보(古樂譜)는 《산고요오로쿠》(三五要錄)와 《진치요오로쿠》(仁智要錄)에 기록되어 있다.

각주[편집]

  1. 『日本書紀』巻第二十九、天武天皇下、12年正月18日条
  2. 岩波書店『続日本紀』2 p548補注11-9
  3. 『続日本紀』巻第十一、聖武天皇、天平3年6月29日条
  4. 『続日本紀』巻第十四、聖武天皇、天平13年7月13日条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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