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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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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을 [[한군현]](漢郡縣)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에는 중국 측 기록에 낙랑군이 정복된 사실이 없고 낙랑왕 최리의 존재 역시 등장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이에 따라 낙랑군과 낙랑을 별도의 존재로 파악하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주요 주장으로는 낙랑군에 소속된 여러 국읍(國邑) 가운데 하나였다는 시각<ref> 권오중, 《낙랑군연구》, 일조각, 1992 </ref>, 호동이 옥저로 사냥을 나갔던 기록에 주목하여 낙랑국을 옥저 일대의 부족 국가로 비정하는 시각<ref> 문안식,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낙랑·말갈사료에 관한 검토〉, 《전통문화연구》5, 1997 </ref> 등이 있다.
낙랑을 [[한군현]](漢郡縣)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에는 중국 측 기록에 낙랑군이 정복된 사실이 없고 낙랑왕 최리의 존재 역시 등장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이에 따라 낙랑군과 낙랑을 별도의 존재로 파악하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주요 주장으로는 낙랑군에 소속된 여러 국읍(國邑) 가운데 하나였다는 시각<ref> 권오중, 《낙랑군연구》, 일조각, 1992 </ref>, 호동이 옥저로 사냥을 나갔던 기록에 주목하여 낙랑국을 옥저 일대의 부족 국가로 비정하는 시각<ref> 문안식,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낙랑·말갈사료에 관한 검토〉, 《전통문화연구》5, 1997 </ref> 등이 있다.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있었던 "낙랑"은 [[한민족]]이 세운 독립 국가이며, 한나라가 세운 괴뢰 정권은 만주의 동북지방에 따로 존재하였다고 주장한다.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서 발견된 '[[정백1호동 고분]]'과 '[[정백2호동 고분]]' 발굴 결과 당시 낙랑은 중국의 고대 왕조인 [[한나라]]의 문화와 관련이 없는 자기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ref>《역사연구》, [[조선사회과학원]] 민족문화연구소 (정확한 권호수, 필자, 연도 등은 불명)</ref> 또한 일부 민족사학자 및 재야사학자는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또는 요서 일대로 비정하고, 기존의 낙랑군 위치인 평안도 지역에 낙랑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ref> 신채호, 《조선상고사》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웅진닷컴 </ref>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현재 한국사학계에서 인정되고 있지 않다.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있었던 "낙랑"은 [[한민족]]이 세운 독립 국가이며, 한나라가 세운 괴뢰 정권은 만주의 동북지방에 따로 존재하였다고 주장한다.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서 발견된 '정백1호동 고분'과 '정백2호동 고분' 발굴 결과 당시 낙랑은 중국의 고대 왕조인 [[한나라]]의 문화와 관련이 없는 자기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ref>《역사연구》, 조선사회과학원 민족문화연구소 (정확한 권호수, 필자, 연도 등은 불명)</ref> 또한 일부 민족사학자 및 재야사학자는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또는 요서 일대로 비정하고, 기존의 낙랑군 위치인 평안도 지역에 낙랑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ref> 신채호, 《조선상고사》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웅진닷컴 / 박선희 교수, 〈[http://n.breaknews.com/sub_read.html?uid=193609&section=sc1 출토 옷감서 찾은 낙랑공주 '최리왕 낙랑국']〉, 《브레이크뉴스》, 2011년 12월 5일</ref>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현재 한국사학계에서 인정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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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4일 (일) 13:11 판

낙랑(樂浪)혹은 낙랑국(樂浪國)은 1세기 중엽에 있었던 고대 정권으로 32년 또는 37년고구려에 의해 멸망한 나라이다. 한군현(漢郡縣)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과 동일한 정치체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역사

삼국사기》에 따르면, 낙랑의 왕 최리(崔理)는 서기 30년 경에 옥저(沃沮) 지역으로 사냥을 나온 고구려의 왕자 호동(好童)을 만나 사위로 삼았다. 호동은 고구려로 돌아간 후 최리의 딸(낙랑공주)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낙랑의 고각(鼓角)을 부수도록 하였고 32년에 낙랑을 기습하여 항복을 받아낸다.[1]

신라 본기에 따르면 37년에 낙랑의 백성 5천여 명이 신라로 와서 투항하였으며 고구려 본기에도 37년에 낙랑을 멸망시킨 기사가 있어, 32년으로 기술한 위의 기록과 멸망 시점이 엇갈린다. 32년부터 시작된 낙랑과의 전쟁이 37년에 종결된 것으로 보기도 하며, 37년에 멸망한 낙랑을 한군현(漢郡縣)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으로 보기도 한다.[2]

낙랑과 낙랑군

조선시대까지는 낙랑과 낙랑군을 같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에 일반적으로 낙랑군의 위치로 파악하였던 평안도황해도 일대가 낙랑의 위치로 비정되었으며, 박지원 등의 일부 실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낙랑을 한군현(漢郡縣)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에는 중국 측 기록에 낙랑군이 정복된 사실이 없고 낙랑왕 최리의 존재 역시 등장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이에 따라 낙랑군과 낙랑을 별도의 존재로 파악하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주요 주장으로는 낙랑군에 소속된 여러 국읍(國邑) 가운데 하나였다는 시각[3], 호동이 옥저로 사냥을 나갔던 기록에 주목하여 낙랑국을 옥저 일대의 부족 국가로 비정하는 시각[4] 등이 있다.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있었던 "낙랑"은 한민족이 세운 독립 국가이며, 한나라가 세운 괴뢰 정권은 만주의 동북지방에 따로 존재하였다고 주장한다.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서 발견된 '정백1호동 고분'과 '정백2호동 고분' 발굴 결과 당시 낙랑은 중국의 고대 왕조인 한나라의 문화와 관련이 없는 자기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5] 또한 일부 민족사학자 및 재야사학자는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또는 요서 일대로 비정하고, 기존의 낙랑군 위치인 평안도 지역에 낙랑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6]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현재 한국사학계에서 인정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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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삼국사기》에는 이 멸망 기사 이전에도 백제 및 신라가 그 초기에서부터 낙랑과 군사적 갈등을 겪은 기사가 꾸준히 등장하나, 대부분은 낙랑군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짐작된다. 다만 위의 멸망 기사는 최리를 태수가 아닌 낙랑의 '왕(王)'으로 칭하고 있어 '낙랑'의 성격이 모호해진다. '왕'으로 칭하고 있으니 독립적인 정권이 분명하다는 시각, 군(郡)의 수령을 왕(王)으로 칭하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니므로 낙랑군으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 낙랑군의 지배자가 혼란을 틈타 잠시 왕을 칭했을 뿐이라는 시각 등이 있으나 어느 주장에도 확실한 근거는 없다.
  2. 대무신왕#낙랑 정벌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3. 권오중, 《낙랑군연구》, 일조각, 1992
  4. 문안식,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낙랑·말갈사료에 관한 검토〉, 《전통문화연구》5, 1997
  5. 《역사연구》, 조선사회과학원 민족문화연구소 (정확한 권호수, 필자, 연도 등은 불명)
  6. 신채호, 《조선상고사》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웅진닷컴 / 박선희 교수, 〈출토 옷감서 찾은 낙랑공주 '최리왕 낙랑국'〉, 《브레이크뉴스》, 2011년 1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