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쉐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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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쉐량 張學良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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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8년 6월 4일 청나라 둥베이 지방 랴오닝 성 안산 부 하이청 현 |
사망 | 2001년 10월 15일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 | (103세)
성별 | 남성 |
국적 | 청나라 국적(前) 중화민국 타이완 국적 미국 영구거주권 |
별칭 | 아명(兒名)은 장샤오량(張孝良) 별명은 샤오솨이(小帥) 미국식 이름은 Peter Chang |
학력 | 중국 둥베이 육군강무학교 졸업 |
직업 | 군인, 정치가 |
소속 | 前 중화민국 서북초비사령부 부사령관 |
부모 | 장쭤린(부) |
배우자 | 위펑즈(이혼), 자오이디(재혼) |
자녀 | 슬하 1남 1녀 |
장쉐량 張學良 | |
별명 | 샤오솨이(小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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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청나라 둥베이 지방 랴오닝 성 안산 부 하이청 현 |
사망지 |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 |
복무 | 중화민국 육군 |
복무기간 | 1920년 ~ 1937년 |
근무 | 중화민국 서북초비사령부 |
최종계급 | 중화민국 육군 소장 |
지휘 | 중화민국 서북초비사령부 부사령관 |
장쉐량(중국어 정체자: 張學良, 병음: Zhāng Xuéliáng 장학량[*], 미국식 이름은 Peter Chang, 1898년 6월 4일 ~ 2001년 10월 15일)은 중국의 군벌 정치가이다. 랴오닝 성의 하이청 출신이며 아명(兒名)은 장샤오량(張孝良)이다. 20세기 중엽의 중국 군벌 가운데 한 사람이며 1936년 12월 12일 시안(西安)에서 장쉐량이 장제스(蔣介石)를 구금하고 제2차 국공 합작을 요구한 시안 사건을 주도하였다.
생애
중국 군벌 장쭤린(張作霖)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장쭤린은 펑톈군벌의 수장이었으며 친일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1928년 6월 7일 장쉐량의 아버지인 장쭤린이 일본 제국 관동군 소속의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에 의해 폭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일제가 여성편력과 아편중독이 심한 것으로 알려진 장쉐량을 중국내 영향력 행사에 이용하기 더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은 장쉐량은 이를 극복해 내었고, 장쉐량과 장쉐량이 이끌게 된 봉계 군벌은 항일 성향으로 전환하였다.
1931년에 관동군의 공격으로 만주 선양의 영향력을 잃었다.
1936년 반공산군 공세를 위해 방문한 중화민국의 장제스를 시안(西安)에서 감금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요구한 시안 사건을 주도하여 제2차 국공 합작을 이뤄낸다. 장제스를 감금한 혐의로 10년 간의 징역형을 받았고, 출감 후 1949년에 타이완으로 끌려가서 중국 국민당 정권에 의해서 1991년까지 자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장제스가 죽은 후, 1993년에 처음으로 중화민국 당국에 의해 출국이 허용되어 곧바로 미국으로 떠났으며, 1995년부터 2001년 사망할 때까지 하와이에서 거주했다. 2001년 10월 14일 오후 8시 50분,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 자택에서 향년 10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연표
- 1898년 6월 4일: 동북 군벌 장쭤린의 맏아들로 출생.
- 1919년: 동북 3성 육군강무당의 제1기 포병과 입소.
- 1928년: 장쭤린, 선양 (瀋陽) 부근에서 관동군의 폭발물에 사망
- 1936년 12월 12일: 시안사건 주도. 장제스 체포 후 '내전 중지 및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한 항일전쟁' 설득.
- 1937년 - 1991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에 의해서 구금 및 자택연금.
- 1991년: 연금 해제. 미국으로 출국.
- 2001년: 하와이에서 향년 104세의 나이로 사망
봉천(奉天)이라는 지명
아버지인 장쭤린의 출생지는 봉천성(중국어: 奉天省, 병음: Fèngtiān Shěng 펑톈 성[*])[1] 하이청(중국어: 海城, 병음: Hǎichéng)이고, 아들인 장쉐량의 출생지는 랴오닝 성 하이청으로 종종 다른 것처럼 쓰인 자료가 있는 이유는 아버지 시대인 청나라 봉천성의 행정 구역 일부가 현대의 랴오닝 성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태어난 도시는 같다. 또한, 봉천성과 봉천시도 다르다는 것을 유의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