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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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때 중국대륙의 군벌들 세력.

중국의 군벌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군사력을 기반으로 전국 또는 지방의 일부에 웅거하면서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중국의 고급 군인 및 그들의 병력을 뜻한다. 군벌주의 등의 표현에서 쓰이는 사전적 의미의 군벌일본의 군벌 등하고는 차이가 있다.

중국 군벌의 분류[편집]

북부 군벌[편집]

북양 군벌[편집]

훈련 중인 북양군

중국의 군벌을 말하자면, 위안스카이 (袁世凱 원세개)의 북양군벌이 자주 거론된다. 위안스카이는 1901년에 청나라 조정에서 북양대신 (北洋大臣)으로 임명되면서, 그 후 북양군을 형성하는 등으로 동북 삼성의 군권을 장악하게 된다. 북양군벌이라는 명칭은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에서 따 온 이름이다.

1909년에 위안스카이는 잠시 해임되어서 군권을 잃지만, 북양군은 이미 위안스카이의 심복들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었다. 북양군은 1912년청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위안스카이의 기반이 되어 주었으나, 위안스카이가 1915년 12월에 무리하게 중화제국의 황제를 자칭하다가 극렬한 비난 속에 실각한 후, 북양군은 북양 군벌 계파별로 갈라지며 "군벌들의 전국시대"라고 할 만한 치열한 내전을 시작한다.

북양군벌은 여러 차례 심각한 내전을 벌이며, 그 와중에서도 두 차례 국공합작을 행하는 등의 유명한 여러 역사적 사건의 주체가 된다. 북양 군벌에는 계파에 따라서 직예 군벌, 안휘 군벌, 봉천 (봉계) 군벌 등의 파벌이 있었고, 이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여러 차례 서로 전쟁을 벌인바 있다.

안휘파[편집]

위안스카이 사후 직예파와 함께 권력을 잡은 파벌이다. 주요 인물은 돤치루이(段棋瑞), 서수쟁(徐樹錚)이다. 안휘파의 지도자격인 돤치루이는 일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구성원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갈라질 가능성이 높아 조직력이 떨어졌고, 대부분이 군 실무직이 아닌 고위층에 위치한 탓에 실제적인 군권이 약했다.

위안스카이 사후 총통이 된 리위안훙(黎元洪)이 정치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안휘도독 장쉰(張勳)을 1917년 베이징에 불러들였다가 장쉰이 왕정복고 쿠데타를 유발하여 완전히 힘을 잃은 뒤 정부를 장악했다. 이무렵 쑨원광둥에서 남부 군벌세력과 손잡고 호법군 정부를 세워 북양군벌에 대항하자 대대적인 남정을 계획하지만 직예파와의 갈등으로 무산, 봉천파를 끌어들여 직예파를 압박해 다시 한번 남정을 준비하다 역시 직예파의 무시로 좌절되었다. 결국 독자적인 군사력 확보를 위해 일본의 차관으로 참전군을 조직하지만[1] 전쟁 끝나고 조직된 탓에 엄청난 항의를 들었다. 결국 이에 불안을 느낀 직예파와의 대립으로 1920년 7월 14일 안직전쟁이 발발, 협조외교 노선을 지향하던 일본이 안휘파 대신 봉천파를 선택함에 따라 사면초가에 빠져 전쟁에서 패배한 뒤 실권을 잃었다.

직예파[편집]

안휘파와 권력을 잡은 파벌이다. 주요 인물은 펑궈장(馮國璋), 차오쿤(曹錕), 오패부(吳佩孚)이다. 안휘파와 달리 직예파는 차오쿤, 오패부 등이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이들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힘이 더 강했다.

안휘파와 달리 광둥의 호법군 토벌에는 관심이 없었고, 호법군과 협상을 통해 베이징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쪽에 관심이 있어 돤치루이의 안휘파와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양측에 안직전쟁이 발발, 일본의 지원을 받던 안휘파를 견제하는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얻었고, 끝내 승리를 거둬 봉천파와 함께 베이징 정부를 장악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부 진출을 노리던 봉천파 군벌 장쭤린과 갈등이 발생했고, 1922년 제1차 직봉전쟁이 발발했으나 직예파가 승리를 거두고 대세를 장악했다. 그러나 1924년 다시 힘을 기른 장쭤린의 반격으로 제2차 직봉전쟁이 발발, 예상치 못한 펑위샹의 배반으로 베이징 정부 실권을 내주게 된다.

봉천파[편집]

만주를 기반으로 한 군벌이다. 다른 두 군벌과 달리 북양군이 아니라 마적단에 기반해 출발했다. 주요 인물은 장쭤린(張作霖)과 그의 아들 장학량(張學良)이다. 이들은 안휘파에 이어 일본의 지원을 받았다.

본래 마적단 출신이었던 장쭤린신해혁명 당시 동북지역의 혁명군을 진압하고 지역군권을 장악해 위안스카이의 황제취임 당시 위안스카이를 위협해 봉천, 길림, 흑룡강 등 동삼성 총독직을 얻었다. 그러나 장쭤린은 애초에 베이징 정부 정권 장악과 베이징 진출이 꿈이었던 사람이라 때에 따라 안휘파, 직예파 양쪽을 편들며 기회를 노렸고, 베이징 정부를 장악한 직예파와 두차례에 걸친 전쟁을 벌여 결국 베이징을 장악했다. 그러나 직예파를 배신하고 베이징을 장악한 펑위샹(馮玉祥)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장쭤린의 부하 곽송령(郭松齡)을 끌어들여 장쭤린에 대항했고, 봉천 남부에서 새로운 군벌 손전방(孫傳芳)이 유력하게 떠올라 위기에 빠진다. 그러나 소련과 가까웠던 펑위샹을 염려한 일본의 개입으로 구사일생, 힘을 모아 반란을 진압하고 펑위샹 토벌에 나섰고, 장종창, 옌시산 등 다른 군벌들의 지지를 얻어 최종적으로 베이징 정부를 장악했다.

국민당의 북벌 당시 국민혁명군의 주적으로서 오패부, 손전방 등 다른 군벌들과 함께 국민당군에 맞섰으나 전세는 불리한 편이었다. 장쭤린은 지속적으로 국민당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위로 돌아갔고, 제남까지 진격한 국민당군을 일본군이 막아주는 사이 일본의 제안으로 장작림이 만주로 귀환하면서 베이징 지배를 포기한다. 그러나 1928년 6월 4일 장쭤린이 탄 열차에서 폭탄이 터져 장작림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아들 장학량장제스의 국민당과 협조하기로 하면서 국민당과의 전쟁을 끝낸다.

지방 군벌[편집]

산서군벌[편집]
서북군벌[편집]
신강군벌[편집]

남부 군벌[편집]

계(桂)계 군벌[편집]

광둥, 광서성에 기반한 남부군벌이다. 광둥 군벌과 광서 군벌로 구성되어 있으며 광서 군벌은 구(舊) 광서, 신(新) 광서로 나뉘어 있다. 주요 인물은 광둥성의 진형명(陣炯明), 광서성의 육영정(陸榮廷), 이종인(李宗仁)이다. 1917년 귀국한 쑨원과 협력하다가 '뒤통수 때리기'를 여러차례 반복한 이들이다. 북벌이 종료된 뒤에도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굉장히 비협조적이라 1929년 편견(編遣)회의 문제로 한차례 국지전을 벌였고, 1930년 옌시산, 펑위샹과 연합하여 중원대전을 일으켰으며, 1931년 광저우 국민정부 선언 이후에는 거의 반독립 상태였다. 1937년 또다시 장제스의 국민정부와 국지전이 벌어질 뻔했으나 일본의 침입에 공동으로 맞서겠다는 장개석의 약조를 받은 뒤 이종인이 군을 물림으로서 전쟁위기를 넘겼다.

운남군벌[편집]

운남 성에 기반한 군벌이다. 주요 인물은 당계요(唐繼堯), 용운(龍雲)이다. 민국초기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에 대항하여 1916년 호국 전쟁을 전개한 군벌세력이다.

지역적 특성 덕분에 중일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도 세력을 온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2차 국공내전 시기에 지도자인 용운장제스의 압력으로 홍콩으로 피신하면서 조직이 와해됐다.

쓰촨군벌[편집]

국민당[편집]

공산당[편집]

쑨원과 군벌들의 관계[편집]

내전의 시대[편집]

1916년부터 계속된 이러한 군벌들의 심각한 내전은 1928년 장제스가 북경에 진입할 때까지 계속된다. 1928년 이후 표면적인 내전은 종식되지만, 서로간의 반목과 의견차는 1950년 대, 장제스가 대만으로 이동할 때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주[편집]

  1.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이 명분이었다

참고서적[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