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아 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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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 아피아비아 아피아 트라이아나를 나타낸 지도.
로마에 위치한 현존하는 아피아 가도. 콰르토 밀리오 근처
로마 근처

아피아 가도 (라틴어이탈리아어: Via Appia) 는 이탈리아로마 공화정 시대에 지어진 도로이다. 고대 로마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도로이기도 하다. 이 도로는 로마에서 시작되어 풀리아 주브린디시까지 이어진다. 아피아 가도의 중요성은 당시 스타티우스가 문헌에 기록했던 이름에서부터 나타난다.[1][2]

Appia teritur regina longarum viarum
아피아 테리투르 레지나 론가룸 비아룸
"아피아 가도는 도로의 여왕이다."

아피아 가도라는 이름은 로마의 감찰관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삼니움 전쟁 중이었던 기원전 312년에 처음으로 군사 도로로 사용한 뒤에 붙여졌다.

기원

'포르타 산 세바스티아노' (Porta San Sebastiano) 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위치한 아피아 가도의 정문이다.

도로 건설의 필요

로마 군대는 전장에서 퇴각할 경우[출처 필요] 에 군대를 재정비하고 다시 전투를 준비할 수 있는 기지에 의존했다. 이 기지는 전장에서 바로 공격할 기회를 기다릴 수 있도록 많은 수의 로마 병사를 수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기지들은 수도인 로마에서부터 연결되어 출입이 쉽고 물자 공급이 수월한 좋은 도로를 필요로 했다. 이 때문에 기원전 4세기 중반, 아피아 가도는 군사적 물자 교류를 위한 메인 도로로 건설되었다.

아피아 가도는 엄밀히 말해서, 군사 교류 목적으로 로마의 영역 (이는 로마 제국과는 다르며, 초기의 로마 공화국을 말한다.) 을 벗어나서 건설된 최초의 도로가 되었다. 에트루리아 인들이 지배했던 초기의 로마 시대에 지어진 몇몇 도로들은 대개 로마를 벗어나서 에트루리아를 이어주었다. 공화정 시대부터 로마인들은 도로 건설의 주역이 되어 이탈리아 내의 도로들을 확장했다. 이러한 도로들은 이티네라리움 (Itinerarium) 을 통해 목적지를 결정하고 계획하여 도로들을 로마 시에서 그들의 영토 경계선까지 확장되었다. 이 시대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라는 속담이 생기게 되었다.

삼니움 전쟁

로마는 그들과 같이 에트루리아 인들의 영향을 받았던 캄파니아 지방을 노리고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 로마는 캄파니아 내에 있는 도시인 카푸아와 동맹을 맺을 목적으로 삼니움 족들을 부추겼는데, 이 때문에 삼니움 전쟁이 일어났다. 라티움 지방에 살던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은 이미 오래 전에 로마에 의해 정복되어 정치적으로 편입되었었다.

대부분의 삼니움 족들은 카푸아 북부의 산지에 남아 있었는데, 이 산지는 그리스 치하의 도시인 네아폴리스의 바로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기원전 343년, 로마와 카푸아는 동맹을 결성했다. 로마 입장으로서는 카푸아 정복의 길이 더욱 가까워 진 것이었다. 삼니움 족들은 군사를 내보내 다시 공격했다.

폰티네 습지의 성벽

프리스실라 무덤.
비아 아피아의 길목에 위치한, 이시스의 여사제였던 카이우스 라피리우스 포스투무스 헤르모도루스, 루시아 라비리아 데마리스, 우시아 프리마의 기념 무덤에 있는 조각. 콰르토 밀리오 근처에 위치한다.
산 세바스티아노 푸오리 레 무라, 산 세바스티아노에 위치한 카타콤 무덤.

다리 위 습지에 위치한 카푸아와 로마 사이의 폰티네 늪지에는 말라리아가 창궐했고, 구불구불한 해안로는 티베르 강과 네아폴리스 사이에서 손상되었다. 라티나 가도는 그 고대와 간신히 더 접근할 수 있는 라치알리 언덕레피니 언덕의 산기슭의 언덕 길을 따라 났는데, 이전의 늪 너머로 보이는 탑이다.

제 1차 삼니움 전쟁(343–341 BC)에서, 로마인들은 늪지 건너의 삼니움인들에 맞서 평원에서 군대를 지원하거나 재공급할 수 없음을 알았는데다가, 더욱이 라틴 동맹의 반란은 그들의 자원을 빼내었다. 그들은 미수에 그친 연합을 포기했고 삼니움인들을 진정시켰다.

건설 이후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부하들의 처형

Emperor Trajan built a deviation of Via Appia. This is a tract of Via Appia Traiana near Egnatia.

기원전 73년, 카푸아에서 노예 출신 검투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주동자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따서 스파르타쿠스 전쟁으로 알려진 반란은 대부분의 이탈리아 인구가 노예 신분이었던 로마에 대한 저항이었다.

2년 넘게 지속되었던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실패로 끝난 뒤, 로마인들은 기원전 71년 포로가 된 노예 6천 명을 모두 십자가형에 처하여, 아피아 가도를 따라 로마에서 카푸아까지 이르는 200km에 달하는 도로변에 그것을 늘어놓았다.

1960년 하계 올림픽

1960년 하계 올림픽을 위하여 아피아 가도는 남자 마라톤 코스의 일부가 되었으며 에티오피아아베베 비킬라가 금메달을 차지하였다.[3][4]

주석

  1. Sylvae, 2.2
  2. Povoledo, Elisabetta (2008년 4월 5일). “Past Catches Up With the Queen of Roads”. 뉴욕 타임즈. 2008년 4월 5일에 확인함. 고대의 아피아 가도는 로마에서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브린디시까지 이어졌으며, '도로의 여왕'이라는 뜻의 '레지나 비아룸'이란 뜻으로 통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교통 밀집, 반달, 관리인들의 불만, 불법 개발 등의 문제로 그 명색이 조금씩 녹슬고 있는 실정이다. (In ancient times the Appian Way, which links Rome to the southern city of Brindisi, was known as the regina viarum, the queen of the roads. But these days its crown appears to be tarnished by chronic traffic congestion, vandalism and, some of its guardians grumble, illegal development.) 
  3. 1960 Summer Olympics official report. Volume 1. pp. 80-81.
  4. 1960 Summer Olympics official report. Volume 2. Part 1. pp. 1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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