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기 (백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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威光 (토론 | 기여)님의 2013년 3월 31일 (일) 00:04 판

두기(杜畿, ? ~ ?)는 중국 후한 · 조위(曹魏)의 관료로, 백후(伯侯)며 사례(司隷) 경조윤(京兆尹) 두릉현(杜陵縣) 사람이다.[1] 고간조조의 대립 중에 낀 하동군을 조조에게 완전히 복속시켜 고간의 세력 확장을 저지했고, 하동에서 선정을 펼쳤다.

행적

초기 행적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계모에게 학대를 받았으나, 효행으로 이름을 알렸다.[1] 20세가 되어 출사하여 경조윤의 공조(功曹)가 되었고, 정현령(鄭縣令)을 대리했다.[1] 당시 정현에는 미결수가 수백 명 있었는데, 두기는 친히 옥에 와서 일일이 모두 판결했고, 비록 전부 타당한 판결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이로써 군 사람들은 두기가 젊은 나이에 큰 뜻을 품었다고 여기고 놀랐다.[1]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고 한중부승(漢中府丞)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형주로 갔다가 건안(建安) 연간(196년 ~ 220년)에 돌아왔다.[1] 허(許)에서 경기(耿紀)를 만나 밤늦게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 대화를 들은[2] 상서령(尙書令) 순욱(荀彧)이 조조(曹操)에게 두기를 천거하였고, 조조는 두기를 사공사직(司空司直)으로 삼았다.[1] 호강교위(護羌校尉) · 사지절(使持節)로 승진하고 서평태수(西平太守)를 겸했다.[1]

하동 평정

병주자사(幷州刺史) 고간(高幹)이 일단 기주(冀州)를 격파하고 원상(袁尙)을 북쪽으로 내쫓은 조조에게 항복했다가 건안 10년(205년) 10월에 다시 반기를 들자, 하동태수(河東太守) 왕읍(王邑)이 마침 중앙에서 불린 차에 하동군의 위고(衛固)와 범선(范先)은 속으로 고간과 내통하고 꾀를 꾸미고 있었다.[1] 조조는 이를 걱정했고, 순욱이 두기를 천거하여 두기는 하동태수가 되었다.[1] 위고 등은 섬(陝) 나루를 끊어서 두기가 부임하는 것을 방해했다.[1] 조조가 하후돈(夏侯惇)을 보내 이를 치려고 하였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 순욱은 두기에게 대군을 기다리라고 일렀다.[1] 두기는 이를 반대하고, 하동군의 3만 호가 전부 난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 아닌데 대군이 오면 의지할 곳이 없어서 위고 등에게 붙을 것이라고 했다.[1] 그러고는 위고 등은 겉으로는 신임 태수를 환영하고 있으니 새로이 온 윗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며, 자신은 홀로 가서 뜻하지 않은 곳으로 나갈 것이고 위고는 계책이 많으나 결단을 못 하니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속일 것이고, 그래서 자신이 하동군에서 한 달만 있으면 족하다고 말하고, 길을 속이고 두(郖) 나루를 건넜다.[1]

범선은 두기를 죽이고자 했으나, 주변에서 두기를 죽이면 악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여 그만두었다.[1] 두기는 위고와 범선을 말로 추켜세워주고, 위고는 도독(都督)으로 삼고 군승(郡丞)의 일을 대행시켰으며 또 공조를 대리하게 하고, 범선으로는 교리병 3천여 명을 거느리게 했다.[1] 위고 등이 대규모로 병사를 징발하려고 하자, 두기는 위고 등을 설득하여 지금 그리하면 무리들이 반드시 동요하리니 재물로 병사를 모으도록 했고, 위고 등은 이를 따랐다.[1] 덕분에 많은 병사를 모으지 못했다.[1] 두기는 또 위고 등에게 장병들에게 휴가를 주었다가 필요할 때에 부르게 하기를 권했고, 위고 등은 중의를 거슬릴까봐 그대로 하여 위고 편의 병사들은 흩어지고 이들 편이 아닌 사람들은 암암리에 두기의 편이 되었다.[1] 마침 장성(張晟)과 고간이 군사활동을 개시하자 상당(上黨)과 홍농(弘農)도 어지러워졌고, 위고 등도 병사를 모았다.[1] 두기는 여러 현들이 자기 편임을 알고, 수십 기만 거느리고 장벽(張辟)에서 항거하여 지키니, 수십 일 안에 4천 명이 모였다.[1] 위고 등은 고간 · 장성과 함께 두기를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대군이 도착하자 고간과 장성은 졌고 위고 등은 주살되었으며 나머지는 사면되었다.[1]

두기가 하동을 다스리면서는 관용과 은혜를 숭상했다.[1] 일찍이 백성이 소송을 걸자 쌍방을 만나 도리로써 설득했고, 만약 돌아가서 생각해도 미진한 것이 있으면 자신을 찾아오게 했다.[1] 고을의 부로들이 이를 듣고 두기를 번거롭게 한다며 소송을 건 사람을 꾸짖었고, 이후로는 송사가 줄었다.[1] 또 속현에서 효자와 정부와 조부모를 잘 섬기는 손자를 천거하여 요역을 면제했고, 백성들에게 소 · 말 · 닭 · 돼지 등의 가축을 기르도록 하였으며 백성들은 농사에 힘써 집집마다 거둔 것이 풍성했다.[1] 백성들이 부유해지자 겨울에는 강무를 하고, 또 학궁을 열어 경전을 가르쳤다.[1] 이로 인해, 《위략(魏略)》에서는 지금(위략이 쓰일 당시)까지도 하동에는 유학자가 많았다고 전한다.[3]

건안 16년(211년), 한수(韓遂) · 마초(馬超) 등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자 홍농과 풍익(馮翊)에서는 한수 등에게 호응하는 자가 많았으나, 하동은 적과 접하였으면서도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다.[1] 조조와 한수 등이 싸울 때 하동군에서 군량을 대었고, 한수 등이 마침내 격파되었을 때에도 20만여 곡이 남았다.[1] 조조는 이를 칭찬하고, 두기의 봉록을 중(中) 2천 석으로 올렸다.[1] 조조가 한중을 칠 때에는 두기가 5천 명을 보내 수송을 맡겼는데, 이들은 두기를 위해서라며 한 명도 도중에 도망치지 않았다.[1]

중앙 관료

하동에 16년간 재직하다가 위나라가 건국되고서는 상서(尙書)가 되었다.[1] 문제(文帝)가 왕이 되고서 관내후(關內侯)가 되었고, 풍락정후(豊樂亭侯)로 봉읍이 올랐으며 사례교위(司隷校尉)를 대행했다.[1] 당시에는 기록에 따라 과부들을 올려보냈는데, 다른 군에서는 기록에 따라 이미 남편이 있는 여자까지도 강제로 징발했으나, 두기는 과부만을 보냈으므로 그 수효가 적었다.[3] 두기의 후임 조엄(趙儼)이 과부를 많이 보내자, 문제는 두기에게 그 까닭을 물었고, 두기는 대답했다. “신은 전에 기록된 바 죽은 자의 아내만을 보냈는데, 지금 조엄은 산 사람의 아내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문제와 그 좌우의 사람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3]

문제가 (吳)를 치러 가자, 두기는 상서복야(尙書僕射)가 되어 뒷일을 맡았다.[1] 문제가 허창(許昌)으로 행행할 때에도 두기는 유수하였다.[1] 조서를 받아 황제의 누선을 만들었는데, 도하에서 시운전하다가 바람을 만나 물에 빠져 죽었다.[1] 당시 제갈탄(諸葛誕)도 같이 물에 빠졌는데, 호분(虎賁)이 제갈탄을 구하려 하자 제갈탄은 먼저 두기부터 구하라고 소리질렀으나, 결국 두기를 구하지는 못했다.[4]

두기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런 말이 있다. 두기가 일찍이 동자를 만났는데, 동자가 말했다. “사명(司命)이 자신에게 아이를 불러오라고 했다.”[5] 두기가 간곡히 청하자, 당신을 대신할 자를 찾겠으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고 사라졌다. 20년 후, 두기가 이 말을 하고서는 그날에 죽었는데, 향년 62세였다.[6]

친척 관계

관련 인물

두서 두예

주석

  1. 진수(陳壽): 《삼국지(三國志)》 권16 임소두정창전
  2. 부현(傅玄): 《부자(傅子)》 (진수의 《삼국지》 권16 임소두정창전의 배송지의 주석에서 재인용)
  3. 어환(魚豢): 《위략(魏略)》 (진수의 《삼국지》 권16 임소두정창전의 배송지의 주석에서 재인용)
  4. 손성(孫盛): 《위씨춘추(魏氏春秋》 (진수의 《삼국지》 권28 왕관구제갈등종전의 배송지의 주석에서 재인용)
  5. 이 말은 수명을 관장하는 신(사명)이 두기(아이)의 목숨을 거두겠다는 말인 듯 하다.
  6. 위와 같음 (진수의 《삼국지》 권16 임소두정창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