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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威光 (토론 | 기여)님의 2014년 9월 14일 (일) 10:10 판 (→‎사적)

동리 곤(東里袞, ? ~ ?)은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이다.

사적

건안(建安) 23년(218), 동리곤은 번성(樊城)에서 관우(關羽)와 대치 중인 조인(曹仁)을 남양태수(南陽太守)로서 지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가혹한 군역에 불만을 품은 대장(大將) 후음(侯音) · 위개(衛開) 등이 10월에 반란을 일으켜 완성(宛城)을 점거했고, 동리곤은 혼란 속에서 공조(功曹) 응여(應余)와 함께 성을 빠져나갔다. 후음은 사람을 보내 동리곤 등을 쫓았으나, 응여가 몸을 바쳐 이를 막아냈기에 달아날 수 있었지만 결국 사로잡혔다.

한편 완성에서 응여를 대신해 임명된 공조 종자경(宗子卿)은 후음에게 동리곤을 풀어주도록 설득했다. 후음은 종자경의 말대로 했으나, 종자경 또한 한밤중에 성을 빠져나가 동리곤과 함께 패잔병을 수습하고 완성을 포위했다. 머지않아 번성에서 조인이 원군을 이끌고 왔고, 건안 24년(219) 1월 완성을 함락시켰다. 동리곤은 후음 등 5백여 명을 사로잡았고, 후음은 처형되었다.

이윽고 관우가 번성을 포위하니, 동리곤은 우금(于禁)의 사마(司馬)가 되어 관우와 대치하였다. 하지만 우금의 군세는 장마에 휩쓸렸고, 동리곤은 우금 · 호주(浩周) 등과 함께 관우에게 사로잡혔다.

손권(孫權)이 관우를 죽인 후, 동리곤 등의 신병은 손권에게 넘겨졌다.

건안 25년(220), 위왕(魏王) 조조(曹操)가 죽고 조비(曹丕)가 뒤를 이었다. 손권은 동리곤 등을 돌려보냈고, 헌제(獻帝)는 조칙을 내려 이들을 보았다. 호주는 헌제에게 손권은 신하로서 복종할 것이라고 아뢰었으나, 동리곤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아뢰었다. 과연 손권은 여러 핑계를 대며 인질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출전

  • 진수(陳壽), 《삼국지》(三國志) 권1 무제기(武帝紀)
  • 《삼국지》 권4 삼소제기(三少帝紀)
  • 《삼국지》 권9 제하후조전(諸夏侯曹傳)
  • 《삼국지》 권18 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二李臧文呂許典二龐閻傳)
  • 《삼국지》 권26 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 《삼국지》 권47 오주전(吳主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