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립 피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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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립 피살 사건 또는 김입 피살 사건1922년 2월 11일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운동가인 김립중화민국 상하이 불조계 자베이(閘北)로에서 상하이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의 국원 노면직, 오종균 등에게 암살된 사건이다. 김구는 그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김립블라디미르 레닌의 자금을 임시정부에 납부하지 않고, 땅을 사서 투기를 하고 광동 여자를 첩으로 삼아서 향락을 즐겼다고 기록해놓았으나 사실 여부는 불투명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동휘는 임정 국무총리직에서 사퇴했고, 사회주의자들은 임정을 떠나거나 임정에 적대적인 태도로 변하게 된다.

김구김립 제거의 원인을 사치와 향락이라 주장하였으나, 김립의 암살 원인은 임시정부레닌의 자금을 상납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라는 시각이 있다.

원인

배경

국제공산당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한민족을 도우려고 하였고 국제공산당은 한인 독립운동에 200만루블을 원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922년 레닌이 지원한 자금 중 김립, 이동휘, 한형권 등은 운송받은 200만 루블을 모두 옮겨갈 수 없어 지원받은 200만 루블 중 60만 루블만 가져가기로 하였다.

김립, 이동휘, 한형권 등은 함께 60만 루블만을 받아가지고 와서 사용하였으며[1], 상하이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에게 분배했다. 레닌이 지원한 자금을 내놓지 않고 한인사회당 등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하였다.[2] 그러나 분배 과정에서도 상하이파 한인사회당원들에게 더 주고,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적은 액수를 분배해 주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는 자금을 주지 않았다. 레닌의 자금을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독립운동과 혁명운동에 사용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에는 내주지 않자 임시정부는 그가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하였다.[2] 한편 레닌은 200만 루블과는 별도로 전당포나 귀금속점에 가지 않고도 현물로 바꿔서 쓸 수 있는 금괴를 한형권김립, 이동휘 앞으로 부쳤다.

암살 직전

일경문서에 의하면 이동휘, 문창범, 박용만 등의 일파가 1921년 2월 22일 재노령 각지 대표자 100여 명을 하바로프스크에 소집하여 한족공산당본부를 동지에 설치하기로 하는 한편 선전원을 갖이에 파송하고 니콜라예프스크에서 파르티잔 부대를 규합, 무력정비를 하여 1921년 여름을 기해 간도로 남하할 계획이라고 하였다.[3] 이후 김립, 원현준 양인은 선전위원으로서 간도, 연길현 숭례향명월구에 4월 8일 나타나 7일간 머무르며 선전에 종사한 후 지부를 설치하고 15일 명월구를 떠나 영고탑으로 향하면서 양 위원은 훈춘현 태평구에도 지부를 설치하고 그 지방에 200여 명의 무력단체를 조직하였다.[3]

1921년 5월부터 국민대표자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이무렵 미국에서는 워싱턴 회의가, 모스크바에서는 극동인민대표회의가 연달아 열리고 있어 국민대표회의가 잠시 중단되었다.[4]

1921년 6월 김립 등은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발생 후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간부들이 거의 러시아로 이동하여 이르쿠츠크 집단과의 군권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혼자서 상해본부를 지키고 있었다.[5] 이때 김철수 등 소수가 와서 상하이고려공산당 근거지를 함께 지키고 있었다.

당시 임시정부신규식 등이 이끌며 내분을 종식하려 노력했다.[4] 그러나 무장투쟁계열의 인사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1922년 1월에 열린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이동휘와 김립 등은 성토문을 발표했다.[6] 두 계열은 이 자리에서 피 튀기는 난투극을 벌였다. 결국 의정원 의원이 대거 사퇴했고 "반동의 괴수는 모화주의자 신규식이다."라는 비난이 쏟아졌다.[6]

경과

한편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사회당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관계에 있었다. 1921년 6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발생 후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간부들이 거의 러시아로 이동하여 이르쿠츠크집단과의 군권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운송책의 한 사람이었던 김립은 혼자서 상해본부를 지키고 있었으며[7], 1921년 말 임시정부에서 보낸 김구의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등 청년들이 김립을 찾아 1922년 2월 11일 상하이 불조계의 자베이(閘北)[8] 거리에서 암살당했다.[2] 도로변에서 암살당한 그의 시신은 며칠 뒤 고려공산당김철수에 의해 수습된다.

김립은 다른 한국인 사회주의자인 김철수, 유진희, 김하구와 함께 있다가 이들의 은신처를 알아내 잠입한 오면직노종균, 양여주 등의 총격을 받고 죽었다. 곧 상하이 불조계 근처의 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원래 레닌이 지불한 200만 루블의 목적은 한국인 및 각국의 사회주의자들의 활동 자금으로 지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후일 박노자는 "1922년 초기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지만, 반병률 교수(한국외대)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9]"고 평가했다.

임시정부에 자금을 내놓지 않고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자금으로 사용한 그의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만으로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설이 통설이었지만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9] 김립의 횡령 행위는 사실이라기보다는 한인사회당 등 공산주의 정당에 대해 적대적인 세력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의 동지들에게 세 차례에 걸쳐 나눠서 전달된 200만루블의 자금은 한인사회당과 고려공산당 등에 어렵게 운반해 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혁명 사업비로 활용되었지만, 그 자금이 김구임시정부의 우파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던 것으로 보고 있다.[2] 김립의 암살 등으로 나머지 140만루블은 구경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1]

사건 직후

오면직·노종균김구의 부하였으며 김립을 암살한 것은 김구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10] 김철수는 문서처치와 김립의 시신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바로 은행으로 가서 남은 돈을 다른 곳으로 옮겨두었다. 한편 상하이의 한인 사회주의자 최동욱, 이호반, 한광우 등은 임시정부에 대해 김립에 대한 복수를 기도하기도 했다. 시신은 상하이 송경령공원(원 상해 만국공묘)에 안장되었다.[11] 또한 이때 상하이로 들어오던 안병찬 역시 임시정부 경무국원이 쏜 총에 맞고 현장에서 즉사한다.

그가 암살당하자 상하이로 급하게 건너온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분개했다. 한편 그의 동지들은 김립을 죽이고 지운 김철수마저 죽이려는 김구를 죽이고자 했으나 지운은 독립운동 동지들끼리 피를 흘려서는 안된다고 간곡히 말린다.[12] 이 보고를 접한 소련 공산당에서는 상하이에 있는 한인 공산당 조직을 해소하고 조직을 이동할 것을 지시했으며, 상하이 임시정부에 대한 호의를 거두게 된다.

사후 김구백범일지에 기록한 대로, 그가 군자금 40만 루불을 사적으로 유용, 낭비한 것으로 알려져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와서 구 소련 비밀문서 등이 공개되면서 그가 임정의 자금을 횡령하지 않았다는 것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기타

한편 이태준은 김립에게서 돈의 일부를 받아 베이징으로 가져가다가 몽골을 점령한 백군파에게 붙들려 총살되었다.[13]

사건 관련자 명단

사건 현장에 있던 사람들

기타 관련자

참고 항목

주석

  1.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2. 폭력’은 정당한가(한겨레 21)2007년04월12일 제655호
  3. 권희영, 《한인 사회주의운동연구:한국사연구총서 21》 (국학자료원, 1999) 259페이지
  4.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1:해방 그날이 오면》 (한길사, 2004) 47페이지
  5.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9999_1_0001529
  6.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1:해방 그날이 오면》 (한길사, 2004) 48페이지
  7.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9999_1_0001529
  8.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9999_1_0001529
  9.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칼럼 : 한겨레21
  10. 김구,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돌베개, 2006) 313쪽
  11. 불멸의 발자취(47)—상해에서의 공산주의운동 / 중앙인민방송국
  12. 상해, 공산주의자로 독립운동에 온힘을 쏟다
  13.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223페이지

참고 문헌

  • 한국공산주의운동사 1(金俊燁·金昌順, 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67)
  •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임경석, 역사비평사, 2003)
  •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김학준, 민음사, 2005)
  • 백범일지 (김구, 도진순 역, 돌베개,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