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알렉산데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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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 2세
전임자니콜라오 2세
후임자그레고리오 7세

교황 알렉산데르 2세(라틴어: Alexander PP. II, 이탈리아어: Papa Alessandro II)는 제156대 교황(재위: 1061년 9월 30일 - 1073년 4월 21일)이다. 세속명은 안셀모 다 바지오(이탈리아어: Anselmo da Baggio)이다.

이탈리아밀라노 근교의 바지오에서 태어났다. 1055년 교육을 받은 후 신부로 서품되었다. 한때 베크에서 랑프랑의 제자가 되어 파타리노들과 협력하여 교회 개혁에 동참하였다. 1057년 루카의 주교가 되어 교황 니콜라오 2세를 도와 추기경 힐데브란트와 페트루스 다미아누스와 함께 밀라노에 사절로 파견되었고 교회 쇄신 정책을 위해 함께 일하다가 전임 교황의 선종으로 교황 선출이 연기되자 힐데브란트와 노르만족의 도움을 받아 교황으로 선출되어 신성로마제국의 개입 없이 교황좌에 올랐다.

신성로마제국의 지지를 받아 반대하던 주교들과 로마 시민들이 파르마의 카달루스교황으로 뽑아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소집한 바젤 지방 공의회에서 교황으로 인정하였으나 1064년 만토바 공의회에서 단죄되어 포기하였다. 이러한 어려움이 있어도 개혁 정책은 꾸준히 진행되어 나갔다. 교황은 그 시대의 3가지 큰 악이었던 평신도 서임, 성직 매매, 성직자들의 결혼 또는 축첩 생활을 근절하려고 노력하였다. 부패의 주요 원인은 황제에 의해 준비가 안 된 세속인들이 교회의 공직을 받았고 성직자 양성 학교가 제대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데르 2세의 개혁 의지는 사절들을 롬바르디아, 프랑스, 에스파냐, 잉글랜드 왕국, 신성로마제국, 보헤미아, 스칸디나비아 등지에 파견하여 모든 지역에 개혁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특히 잉글랜드의 색슨 왕가 말기에 중요한 네 교구가 불법적으로 설정되어 성직자들의 생활이 문란하고 지적 수준이 낮았으므로 노르만 왕조의 초대 왕 윌리엄 대공에게 사절을 보내어 대관식을 거행하고 개혁을 추진하게 하였다. 또한 캔터베리의 대주교좌를 성직매매에 의해 찬탈한 스키건드 대주교를 파직시키고 개혁가이며 베크 수도원의 원장을 역임하고 캉 수도원의 아바스였던 파비아의 랑프랑을 후임자로 임명하였다.

동방정교회와의 관계는 1054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일 케룰라리오스를 파문한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아나니의 페트루스가 비잔티움 제국황제 미카일 7세 두카스에게 사절로 파견되었으나 교회의 일치는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스계 교구들의 라틴화는 노르만족이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점령한 후 교회의 개혁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이루어져 나갔다. 1063년 교황은 프랑스 남부에서 유대인들의 대우가 좋지 않자 그 사건에 개입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1세 때의 금지령을 완화시켰다. 에스파냐에서 프랑스의 기사들과 시칠리아에서 노르만족이 점령한 영토를 교황이 소유하게 되었다.

로마와 신성로마제국의 관계는 노르만족의 개입으로 차차 악화되어 갔고 밀라노 교구와의 분쟁도 교회 내의 큰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전임
니콜라오 2세
제156대 교황
1061년 9월 30일 - 1073년 4월 21일
후임
그레고리오 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