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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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開城 敬天寺址 十層石塔)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국보
종목국보 제86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시대고려 시대 (1348년)
소유국립중앙박물관
주소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開城 敬天寺址 十層石塔)은 고려 충목왕 4년 (1348년) 시기의 강융(姜融)이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에 있는 경천사에 세운 석탑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었다.

역사

이 탑은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회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었는데, 조성 이후 미신 · 반(反)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3층 탑신부까지의 하층부 불교관련 도상들의 파손이 많았다. 1902년 세키노 다다시의 조사보고로 폐사지에 있다고 알려졌고, 1907년 순종의 가례식에 참석한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에 의해 불법해체되어 반출되었다. 반출 이후 많은 비난 여론이 일자 1916년 조선총독부에서는 석탑 반출사실을 조사하고 1918년경 다시 한반도로 반환되었다.[1]1960년에 서울특별시 경복궁 안에 재건하였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형태

3단으로 된 기단(基壇)은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고, 그 위로 올려진 10층의 높은 탑신(基壇) 역시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이었다가, 4층에 이르러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탑의 1층 몸돌에 1348년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은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러 현재 국보 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장식 부조

고려시대 탑파에 장식한 부조로서 중요한 것이 이 탑의 부조이다. 기단과 탑신의 각부에는 십이지상(十二之相)의 불상·보살·천부(天部)·나한(羅漢)·비구형(比丘形)의 각종 군상이 장려하게 조각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륜부(相輪部)·옥개(屋蓋)·기둥 두공 등 목조건물의 세부를 변화있게 조각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여기 부조는 원(元)의 표현 형식이 혼입(混入)되어 있음을 보이는데 원공장(元工匠)이 직접 가담하여 만든 전형적인 기준작(基準作)으로서 중요하다.[2]

사진

주석

  1. 신은정, 〈경천사십층석탑의 조형 연구〉 《불교미술사학》 (2006, 제4집) 317쪽. “그러나 조성이후 미신 · 反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3층 탑신부까지의 하층부 불교관련 도상들의 파손이 많았고, 1907년 日本 宮內大臣 田中光顯(다나카 미츠야키)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무단해체되어 日本으로 반출되는 등 수난을 겪어왔다.1) ... 1) 1902년 세키노 타다시의 조사보고로 폐사지에 있다고 알려진 경천사탑은 1907년 순종의 가례식에 참석한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츠야키(田中光顯)에 의해 불법해체되어 반출되었다. 반출 이후 많은 비난 여론이 일자 1916년 조선총독부에서는 석탑 반출사실을 조사하고 1918년경 다시 우리나라로 반환되었다.(당시의 상황은 한영대, 『조선미의 탐구자들』(학고재, 1997), pp.53~96. 이구열, 『한국문화재 수난사』(돌배게, 1996), pp. 77~82. 신은정, 「경천사십층석탑의 종합적 연구」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3년, pp. 76~81 참조)”
  2.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탑식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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