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북아메리카 비디오 게임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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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비디오 게임 위기1982년 연말 과열된 판매 경쟁으로 발생한 미국 비디오 게임 산업에서 일어난 위기로, 아타리 쇼크[1](Atari Shock)라고도 한다. 게임 업계에서는 이 위기를 1929년 10월 24일에 일어난 주가 대폭락 사건인 검은 목요일에 비교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으며, 이후 아타리 쇼크란 단어는 게임 소프트웨어의 과잉 공급에 의해 소비자의 흥미가 급속히 떨어져 단번에 시장 수요가 사그라드는 현상을 뜻하게 되었다.

개요[편집]

1977년 미국에서 발매된 가정용 게임기 아타리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은 게임기에 내장되어 있던 게임 소프트의 프로그램 롬을 카트리지에서 제거하고 외부로부터 공급할 수 있도록 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또 아타리는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의 프로그램 사양을 공개하여 누구라도 자유롭게 게임을 개발, 판매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게임 시장의 급격한 확대에 이끌려 많은 개발자가 참가한 게임 시장에는 질 낮은 게임이 넘쳐나 소비자들은 점점 흥미를 잃어 갔다. 이에 따른 게임 개발사의 도산과 헐값 처분된 게임들이 시장에 흘러들어가 정가 라인이 붕괴되고 있었다. 이렇게 맞이한 1982년 크리스마스 판매 경쟁에서는 30억 달러의 시장 규모를 예측해서 유통하지만 아타리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 시장은 완전히 붕괴된 후였다. 당시 실제의 시장은 1억 달러 미만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결과 상당수의 재고를 떠안고 도산하는 소매점도 속출했다. 이후 미국판 패밀리 컴퓨터, NES가 발매될 때까지 미국 게임 시장은 침체기에 들어선다.

발생 원인[편집]

이 위기는 여러가지 이유가 합쳐지면서 일어나게 되었다.

  • 제2세대 게임기들은 수많은 프로그램으로 버텨왔다. 게임기의 인기는 5년 만에 하락하였고, 아타리의 시장관리자는 아타리 2600의 5번째 생일을 경축하였다. 콘솔 사업은 새로운 세대의 게임기를 준비하지 못하였고, 길게 연기된 아타리 7800 게임기는 소비자들의 기대를 채워주기에는 너무도 빈약하였다.
  • 게임기가 너무 많아, 미국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선택폭이 너무 넓었다.[2]
  • 회사의 재정을 맞추기 위한 저품질의 게임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1980년대 초에 PC는 특별한 컴퓨터 가게에서만 팔렸고, 그 당시엔 엄청난 가격인 1,000 달러에 팔렸다. 그래서 1980년대 초반에 텔레비전 세트에 연결하는 개인용 컴퓨터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비자들의 시선을 끌 만한 게임기와의 경쟁은 하지 않았다. 컴퓨터가 게임기보다 메모리-게임기보다 좋은 그래픽과 사운드-를 갖게 되면서, 컴퓨터는 게임과 더불어, 문서작성과 가계부 정리까지 가능하게 해주었다. 또한, 컴퓨터 게임은 게임기에서 사용하던 비싸고 구형인 ROM 모듈보다 복사가 쉬운 카세트 테이프나 플로피 디스크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또한 게임기 제작회사 중 코모도르는 할인점이나 백화점, 그리고 장난감 상점에 그들의 물건을 팔았고, 코모도르는 보조적으로 그들의 칩을 다른 회사에 팔았다. 코모도르는 다른회사보다 더 높은 이윤을 위해 공격적인 할인 전략을 펼쳤다. 이 가운데에는 코모도르의 자회사인 MOS 테크놀러지에서 코모도르의 칩을 만들어냈다. 이와 같이 몇몇 회사들은 자회사에서 칩을 만들었는데, 이는 1970년대의 계산기 시장을 보는듯 하다. 그 당시 계산기 회사들은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서 판매한 칩을 사면서,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의 제품에 대항하는 계산기를 만들어 팔았다. 아타리와 같은 다른 회사들은 생산을 자신들의 협력 업체에 계약하기도 하였다.

이 재앙의 첫 번째 신호는 게임이 높은 품질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액티비전의 공동 설립자인 아타리의 게임 프로그래머들이 1979년 회사를 나갔다. 아타리는 그때 게임을 출시할 돈이 없었고 판매에 기초한 사람들의 사용료를 지불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타리는 이것을 만회하기 위해 액티비전의 대량 판매를 고소하였으나, 1982년에 소송에서 패소하였다.

이 소송은 Quaker Oats와 같은 정통 서드파티 개발자들과 회사들이 월스트리트와 소비자들을 겨냥하여, 오픈 비디오 게임 구획을 추진하던 계획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회사들은 서로 다른 프로그래머와 역공학을 사용하여, 상용 게임을 어떻게 만드는가 배우는 중이었다. 아타리는 몇몇 인텔리비전 개발자들을 고용해, 마텔에 대항하는 소송을 벌이도록 선도하였다. 아타리는 또한 그들에게 산업 스파이의 짐을 떠넘겼다.

다음 10년의 게임기 제조사인 닌텐도. 세가, 소니 혹은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회사들은 플랫폼에 공급하는 게임의 독점적인 규제를 잃어버렸다. 이건 장난감 가게에 그들의 물건이 절대로 오르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액티비전이나 아타리, 마텔은 경험있는 프로그래머를 가졌고 많은 새로운 회사들이 그들의 시장에 끼고자 하였으나, 그들은 경험있는 재주로 게임을 만들지 못하였다. "Chase the Chuk Wagon", "Skeet Shoot" 그리고 "Lost Luggage"는 게임회사들이 비디오 게임 붐에 합류하고자 만든 게임의 예이다. 잠시 동안간 많은 광고와 판매가 있었지만, 게임은 최저의 품질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희망도 잡지 못했다는 걸 지각하였다.

산업에 끼친 영향[편집]

직접적 영향[편집]

1982년 저질게임이 소매시장으로 급속히 들어와, 소매시장이 범람하게 되었다. 마텔안의 인텔리비전의 판매담당 간부는 이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2년 동안에 나올 물건들이 1년 동안에 시장에 나왔다. 그리고 그걸 균형 맞출 만한 시스템도 없다." 가게에서는 새로운 게임 회사들에게 받은 물건을 다시 돌려보냈고, 회사는 소매상으로부터 돈을 받을 수 없었다.

1982년 크리스마스에 회사가 망해서 돌려보내지 못하는 게임들을 장난감 가게에서는 마크를 떼고 할인 바구니와 판매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 당시 보통의 게임가격은 $34.95 달러(인플레이션을 포함한 2007년 미국달러 기준으로 $75)였는데, 할인 바구니에서는 게임 하나당 4.95 달러에 팔았다. 1983년 6월 게임시장에서 예전 가격으로 팔던 게임들은 몰락하고, 더 싼 게임들이 그 자리를 채워갔다. 고객들은 가게에 가서 할인 바구니안의 게임들을 사갔고, 고객들은 싼 게임이 비용적 측면에서 매력적으로 보였다. 시간이 흐르고, 고객들은 저질게임들을 퇴출시키고, 이제는 줄어버린 높은 가격의 게임을 사서 쓰거나 게임을 하지 않게 되었다.

커다란 게임시장은 이 결과에 흔들렸고, Magnavox와 Coleco는 게임 비즈니스에서 손을 떼었다. Imagic는 자사 주식상장이후에 몰락하게 되었고, 나중에 파산하게 되었다. 잠시 가장 컸던 서드-파티 카트리지 제작자였던 액티비전은 그 후 몇 년간 더 생존하였다[3]

추가적으로, 장난감 소매상들은 게임에 대한 소비자들의 접근을 조절하면서 비디오 게임은 일종의 변덕이라 결론을 내렸고, 변덕이 끝나자 그들은 다른 제품들을 그들의 선반에 올렸다. 많은 소매상들이 몇 년 동안 비디오 게임을 자기 가게에 올리는 걸 반대하였고, 그리고 이건 닌텐도의 패미컴이 미국에 진출하는 데 걸림돌이었다. 닌텐도는 즉시 패미컴을 게임기 대신에, 엔터테이먼트 시스템이라고 부르고, 컨트롤 덱과 게임 팩과 같은 이름으로 게임을 불렀다. 또한 R.O.B라고 불리던 로봇을 포함시켜 장난감 업체가 그들의 가게에 NES를 올리도록 납득시켰다.

장기적 영향[편집]

미국 비디오 게임 위기는 서서히 복구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로, 가정용 게임기 제작사가 일본으로 이동한 것이다. 1987년 비디오 게임시장이 복구될때, 선두주자로 닌텐도의 닌텐도 엔터테이먼트 시스템은 소생하는 아타리와 세가와 싸우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로, 추락의 가시적인 결과인 서드-파티 제작자가 개발한 소프트웨어의 질적인 문제가 제어되기 시작한 것이다. 경쟁 회사들은 아타리나 마텔의 소프트웨어를 리버스 엔지니어링하지 못하게 되었고, 대신 훈련된 게임 프로그래머를 고용하게 되었다. 닌텐도는 게임에 라이선스 제한을 걸었고, 그리고 역공학을 방지하기 위한 잠금 보안 시스템도 채용하였다. 만약 게임제작자들이 다른 곳에 - 아타리, Coleco, Mattel 같은 곳에 게임을 넘길 수가 없었다. 왜나하면, 카트리지 안에는 무조건 키 칩이 삽입되어 있어서, 다른 게임기상에서는 돌아가지 않았고, 제작자는 그들의 저작권이 닌텐도가 주목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였다. 비록 Acclade는 Sega에 대해 기술적인 승리를 이끌어 내었고, 심지어 세가 라이선스 조약을 양보하게 되었다. 몇몇 개발자 - Tengen(Atari), Color Dreams, 그리고 Camerica는 8비트 시대에 닌텐도의 제어 시스템에 도전하기도 하였다. 이런 제어 시스템에 대한 개념은 현재 소수의 카트리지-기반의 8/16비트 시장에 사용되고 있다. 보안 칩은 교체되어 현대의 대부분의 게임기에는 특별하게 암호화된 광학 디스크로, 읽기만 되고, 복제가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닌텐도는 그들의 시스템에 5개의 게임을 공급하겠다는 제한을 두고 NES 게임에 대한 이윤 일부를 자기 몫으로 떼갔다. 또한, 모든 카트리지를 닌텐도에서 만들어내어, 예전에 그들이 만든 카트리지를 모두가 사갔다. 카트리지는 닌텐도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며, 개발자들은 손해를 입게 되었다. 닌텐도는 저질게임이 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 모든 시스템의 게임에 승인받았다는 금색 딱지를 붙이도록 하였다. 이런 닌텐도의 플랫폼 제어는 그 후 세가나, 소니,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수용하게 된다.

참고 문헌[편집]

  • DeMaria, Rusel & Wilson, Johnny L. (2003).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2nd ed.). New York: McGraw-Hill/Osborne. ISBN 0-07-222428-2.

주석[편집]

  1. 닉슨 쇼크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2. Taylor, Alexander L. III (1982년 12월 20일). Pac-Man Finally Meets His Match. Time Magazine. 2006년 12월 4일에 확인.
  3. Activision eventually faded as well; its name and assets were purchased by a new management team led by Bobby Kotick, who built a new, highly successful, but otherwise unrelated company based on the old brand. This company still exists, and is considered one of the major video game publishers.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