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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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fu man and lady.jpg

한푸(한복, 중국어 정체: 漢服, 간체: 汉服, 병음: hànfú)는 중국 한족고유의 옷이다. 한푸는 또 한장(漢裝), 화복(華服)이라고도 한다. 한푸란 ‘한나라의 복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한족의 전통적인 민족복식을 가리키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유구한 민족복식의 하나이다.

한푸는 문화예술, 시사(詩詞)나 가부(歌賦), 금기서화(琴棋書畵), 무술(武術), 검도, 음악, 무용, 다예(茶藝) 등 다양한 방면에서 중화전통문화와 가장 잘 결합할 수 있는 복식이다. 역사적인 전승과 발전과정 중에 한푸는 선인들의 ‘인(仁), 의(義), 예(禮), 지(智),신(信)’이란 도덕내포와 순선순미(純善純美)한 중국 전통 복식예술의 중요한 상징을 충분히 펼쳐보였다.

한푸의 정의[편집]

한푸란 명사는 처음에는 한인(漢人)의 전통복식에 대한 다른 민족들의 호칭이었다. 마치 호인(胡人)의 전통복식을 호복(胡服)이라고 칭하는 것처럼 한인의 전통복식도 상대적으로 한푸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한푸란 주로 삼황오제(三皇五帝)부터 명나라 말기(17세기 중엽)까지 수 천 년 동안 한족 백성들이 입던 전통복식을 가리키는데 이들 모두를 한푸라 칭한다.

역사[편집]

황제가 '의상을 드리우고 천하를 다스린다 (垂衣裳而天下治)'

많은 사람들이 고서의 기록을 통해 추정한 바에 따르면 삼황오제시기에, 선인들은 새나 짐승의 털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나아가 마(麻)를 이용해 베옷(布)을 만들어 입었다. 나중에 황제(黃帝)의 정비(正妃)인 누조(嫘祖)가 뽕나무를 기르고 누에치는 것을 시작해 백성들에게 베를 짜고 옷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때문에 복식(服飾)제도는 황제(黃帝)시대부터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하나라와 상나라를 거친 후 관복(冠服)제도가 점차 수립되기 시작했고 그 뒤를 이은 서주시대에 주례(周禮)제도가 형성되어 의관예제(衣冠禮制)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생겼고 관복제도가 점차 예치(禮治)의 범위 속으로 들어가 예의문화(禮儀文化)를 표현하는 방식의 하나가 되었다. 한푸는 이때에 이르러 더욱 완벽해졌다.

일찍이 한 성인께서 “한 왕조의 천자에 한 왕조의 신하, 한 왕조의 천인(天人)에 한 왕조의 백성, 한 왕조의 문화, 한 왕조의 복식.”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러므로 중국 고대의 복식은 단순히 왕조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 것만은 아니며 조대(朝代)간의 복식특징에도 아주 큰 구별이 있다. 또한 각자 서로 다른 조대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각기 다른 시기의 인류가 부여받은 지혜를 체현하고 있다.

상나라[편집]

상나라 때는 방직(紡織)과 자수(刺繡) 기술이 아주 발달했는데 최초의 의복은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당시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대부분 허리에 넓은 요대(腰帶)를 둘렀으며 옷깃(領襟), 소맷부리(袖口)에 모두 정교하고 치밀한 자수 장식을 했다.

주나라[편집]

주나라 때는 봉건 제도가 확립되었고 의관제도도 점차 완비되었다. 당시에는 신분의 구별이 심했기 때문에 복식 중에서도 관복등급의 엄격한 구별이 있었다. 제왕과 귀족은 모두 장소와 신분에 따라 적당한 복식을 입어야 했다. 춘추전국시기에 들어와 ‘심의(深衣)’가 나타났다. 심의는 위아래를 나누어 재단한 후 중간 부분을 이어서 만드는데 재단이 아주 독특하면서도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이 연결되어 있다. 심의는 용도는 광범위하여 남녀노소 귀천을 불문하고 모두 입을 수 있었으며 당시에 크게 유행했다.

진한(秦漢)시대[편집]

진나라 때 중국이 통일된 후 각종 제도가 새로 창립되었으며 그중에는 자연히 관복제도를 포함한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았는데 한무제(漢武帝) 때 서역과 문화교류가 강화되면서 복식의 색채가 더욱 다양해졌다. 한나라 때 성행한 복식은 온몸을 감싸는 포(袍) 위주였고 양식은 소매가 큰 것이 많다. 어깨부터 직통으로 발까지 내려가는 긴 장포(長袍)는 당시 가장 전형적인 복장이었다. 한나라는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함에 따라 생활도 부유해졌고 의관(衣冠)과 복제(服制)도 날로 화려해졌다. 한나라 때 귀족의 예복은 치마(裙襬), 옷깃(領口), 소매(袖口)에 모두 정교하고 아름다운 테두리를 장식했다.

위진 남북조 시대[편집]

위진 남북조 시대에는 전란이 빈번하게 발생해 남방과 북방의 백성들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지고 타향을 떠도는 경우가 많았다. 동시에 다양한 민족들이 서로 섞여 거주하는 상태가 나타났고 또 호한(胡漢)문화도 서로 영향을 끼쳤다. 포의박대(褒衣博帶 크고 헐렁한 옷에 넓은 띠)는 이 시기에 유행하던 복식으로 자연스럽게 본성을 따르면서 느슨한 복장을 추구했다.

수당(隋唐)시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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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나타난 화려하면서도 귀족적인 복식은 당시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이 공전의 번영을 누린 전성시기임을 잘 반영한다. 염색 및 실크 직조(織造) 기술이 크게 진보하고 실크로드의 개통 및 대외개방으로 구자(龜茲), 남조(南詔), 토번(吐蕃), 아라비아 및 페르시아 사자들이 각 지역의 문화를 가져왔고 이 시기 당나라 복식이 다양한 민족의 특색을 융합해 크게 이채를 띨 수 있게 했다. 당나라의 염색기술은 아주 뛰어났으며 실크 제품의 염색문양은 전대미문의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므로 당나라 복식의 재료를 연구해보면 색채가 곱고 선명하며 양식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액세서리도 정교하고 아름답다. 대당(大唐)의 복식은 호탕하면서도 대범하고 화려하면서도 우아해 유구한 중국 복식의 역사 중에서도 휘황찬란한 최고봉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 때 남자들의 가장 전형적인 복장은 원령(圓領 둥근 깃)에 포삼(袍衫)을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사모(紗帽)를 쓴 것이다. 복두란 사견(紗絹)으로 만든 사각형 두건(頭巾)을 말하는데 위는 네모지고 좌우에 각(角)을 부착한 모양으로 당나라 때 아주 유행했다. 당나라 여인들은 미를 추구하는 풍조가 성행해 화장, 눈썹그리기, 입술 단장을 중시했으며 연지 찍기를 좋아했다. 복식의 특징은 옷깃이 낮게 내려가고 소매가 크며 치마허리를 높이 묶었다. 주요한 양식은 위에는 짧은 저고리(襦)나 적삼(衫)을 입고 아래는 긴 치마(裙)를 입었으며 반비(半臂 소매가 없거나 짧은 겉옷)를 입고 어깨에는 피백(披帛)을 둘렀다. 긴 치마는 땅에 끌릴 정도였으며 몸 자태는 마치 천선(天仙)처럼 유연하고 세속을 초월한 듯한 고아(高雅)함이 있었다.

돈황벽화[편집]

돈황(敦煌)벽화에 나오는 대량의 채색 그림들 속에는 불국세계를 묘사한 것들이 있고 부처, 천인(天人), 비천(飛天)선녀 등의 형상이 있는데 아주 장엄하고 생생하다. 만약 이들을 상세히 대조해본다면 대당의 복식과 벽화에 나오는 천인들의 복식이 아주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 전통문화는 당나라 시기에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과 빈번한 교류를 했으며 지금 일본의 기모노나 한국의 한복은 모두 대당 복식의 특색을 보존하고 있다.

송나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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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의 의관복식은 당나라의 전통복제를 답습하긴 했으면서도 독특한 점이 있다. 당시 사회적으로 성리학을 숭상해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存天理,去人欲)’한다는 관념을 제창하면서 전통의 보수적인 도덕관을 이끌었다. 이런 영향 때문에 복식도 더 이상 화려함을 추구하지 않게 되었고 자연스럽고 간단하며 소박한 것이 위주가 되었다.

송나라 남자들은 귀천을 불문하고 각종 장소에서 모두 박두(幞頭)를 썼다. 단, 이때의 박두는 비교적 모자와 비슷한 모양의 직각 관모(冠帽)였다. 복식은 둥근 깃을 위주로 다양한 색상의 포삼(袍衫)으로 등급을 구분했다. 송나라 귀족 여인의 예복은 대수삼(大袖衫 소매가 큰 적삼)이었다. 송나라는 주(周)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제사 등 중요한 장소에서는 반드시 예복(禮服)을 입어야 했다. 그러나 일반 평민 여인의 복식은 상의에 유(襦), 삼(衫), 오(襖), 대수(大袖), 반비(半臂), 배자(褙子 조끼) 등을 입어 양식이 다양했고 아래에는 치마(裙子)를 입었다. 이중 배자는 당시에 신분의 귀천을 불문하고 유행했던 복식으로 외투의 일종이며 직령(直領 곧은 깃)과 대금(對襟 웃옷의 두 섭이 겹치지 않고 가운데서 단추를 채우는 맞깃), 무릎까지 길게 내려오는 것이 특색이다.

명나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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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는 건립이후 관복제도에 있어 주(周), 한(漢), 당(唐), 송(宋)의 복제를 참조해 전통적인 한족의 복식제도를 회복했다. 명나라의 복식은 재료가 다양하며 특히 자수 기술이 발달했다. 남자의 복식은 포삼(袍衫)을 위주로 했고 관리들의 조복(朝服)은 옛 제도를 답습해 오사모(烏紗帽)와 원령삼(圓領衫 둥근 깃의 삼)을 입었고 소매는 넓어 3척이나 되었다. 포삼의 색과 도안으로 관직의 품위를 구분했으며 포삼 관복의 앞에는 사각형 자수그림이 있었다. 문관(文官)은 날짐승을 도안으로 삼았고 무관(武官)은 길짐승을 도안으로 했다. 비색(緋色 붉은 색) 포삼은 1품부터 4품까지, 청색 포삼은 5품부터 7품까지, 녹색 포삼은 8품부터 9품까지 입었다. 여성복식은 주로 오(襖), 삼(衫), 배자(褙子), 비갑(比甲) 및 치마였고 당송(唐宋)의 양식을 답습했다. 포삼의 색은 진홍색이나 황색, 청색은 사용할 수 없었고 단지 연분홍색, 자색, 녹색만을 입을 수 있었다. 명나라 부녀자의 예복은 봉관하피(鳳冠霞帔)인데, 후비(后妃)가 제사나 대전(大典) 등 중요한 장소에 참가할 때 입던 옷으로 봉관(鳳冠)위에는 용과 봉황을 새겼으며 하피(霞帔 예복을 입을 때 목에 거는 띠 모양의 장식물)와 함께 사용했다.

특색[편집]

한푸의 가장 중요한 특색은 옷깃을 우측으로 여미고 소매가 넓고 길며 단추대신 매듭을 묶는다는 점이다. 한푸를 입으면 사람의 태도와 행동이 함축적이고 안으로 수렴하면서 단정하고 점잖으며 세속을 초탈한 듯한 기질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이런 특색은 단지 다른 민족의 복식과 다를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한푸의 영향을 깊이 받아 만들어진 일본의 기모노나 한국의 한복과도 다르고 서양의 복장과는 더욱 큰 차이가 난다.

한푸의 양식[편집]

한푸의 양식은 깃(領口), 허리 묶음, 소매를 재단하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수백 종의 다양한 변화를 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은 아래와 같은 9가지 양식을 기본으로 꼽는다.

상의하상(上衣下裳)[편집]

옷깃을 좌우로 교차하며 상의(上衣)는 안으로 입거나 혹은 밖으로 입는다.

상유하군(上襦下裙)[편집]

옷깃을 좌우로 교차하며 위에는 짧은 의(衣)인 유(襦 저고리)를 입고 아래에는 치마의 일종인 군(裙)을 입는다. 또 요대(腰帶)와 피백(披帛), 액세서리 등을 배합한다.

상의하고(上衣下褲)[편집]

옷깃을 좌우로 교차하며 위에는 짧은 의(衣)를 입고 아래에는 박고(縛褲)를 포함한 바지(褲子)를 입는다.

의상연제(衣裳連制)[편집]

즉 심의(深衣)를 말한다. 옷깃을 좌우로 교차하는데 여미는 방식에 따라 직거(直裾)와 곡거(曲裾) 두 가지로 나뉜다.

직철(直裰)[편집]

장의(長衣)의 일종으로 직신(直身)이라고도 한다. 옷깃을 좌우로 교차하며 테두리(衣緣)가 있고 양옆을 트지 않는다. 길이는 무릎이나 발목까지 내려온다.

포삼(袍衫)[편집]

장의(長衣)의 일종이다. 옷깃을 교차하거나 또는 원령(圓領)이다. 포(袍)는 두 층으로 되어 있고 삼(衫)은 단층이며 길이는 무릎이나 발목까지 내려온다. 양 옆에 트임이 있다.

난삼(襴衫)[편집]

원령(圓領)을 여미는 옷으로 길이는 무릎까지 내려가며 무릎 아래로는 치마(裳)가 연결된다.

배자(褙子)[편집]

일종의 저고리(襦)로 오자(襖子), 대수의(大袖衣), 선오(旋襖)에서 변화한 것이다. 곧은 깃을 서로 연계해 아래로 늘어뜨리되, 반은 걸치고 반은 입는다. 소매가 없거나 반소매로 된 것이 있으며 겨드랑이 아래 양 측면이 열려 있다.

반비(半臂)[편집]

이 역시 일종의 저고리(襦)이며 곧은 깃을 아래로 내려 서로 묶는다. 소매가 없거나 반소매로 되어 있다. 한푸는 이 외에도 예복(禮服)과 일상복(常服)의 구별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한푸를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분류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