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이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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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이(汪暉, 1959년 10월 10일-)는 중국 신좌파의 주요 인물이다.

생애[편집]

1959년 10월 10일 중국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시에서 태어났다.

1976년 루쉰 중학교를 졸업한 뒤 2년간 노동자로 일했다.

1978년 양저우사범대학 중문과 1977학번 학부생으로 입학했다. 1981년 학부 졸업, 1982-1984년 양주사범대학 중문학과 현대문학 전공 대학원생이며 지도 교수는 루쉰 연구자 장석승(章石承)이다.

1984년 난징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 중국사회과학원 대학원 현대 문학 전공 박사 과정에 입학했다. 1988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도 교수는 루쉰 연구자 탕타오(唐弢)이다.

1988~2002년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조연구원, 부연구원, 연구원, 중국사회과학원 대학원 교수를 지냈다.

1991년 말 중국 현대 문학 루쉰 학파의 천핑위안(陳平原), 왕서우창(王守常) 등과 함께 <학인(學人)> 총간을 창간했다.

1996~2007년 <독서> 편집장을 지냈고 2002년에는 칭화대학교 중문과 교수로 임용됐다.

왕후이는 1989년 톈안먼 운동으로 북경 시내가 온통 시끄럽기 전에 구소련의 개혁 정치가 고르바초프의 북경 방문에 기뻐하였던 젊은 학인 중 하나이었다고 한다.

그는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 덩샤오핑개혁 개방의 조화 사회 건설을 위해서 장쩌민에 이어서 연달아 지정한 후진타오 정권에서 후야오방을 지지하였던 청년 학자 출신으로, 칭화 대학에 초빙되었으며, 이후 중국 신좌파의 주요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후펑 등이 중국 현대 문학의 루쉰 문학 계통에서 그의 중국 신좌파적 취향과 어쩌면 가까웠을 수 있다.

2010년 전후로, 그가 인솔하는 중국 신좌파는 적잖은 이들이 그의 의도와는 달리 보시라이를 지지하기도 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미국, 일본, 유럽 등의 유명한 문학 연구자들과 그간 많은 교류가 있어왔지만, 그가 칭화 대학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칭화 대학의 옛 문학 학풍의 다양한 멋을 정갈하게 잇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