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파노 타코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스테파노 타코니
2005년의 타코니
개인 정보
본명 Stefano Tacconi[1]
출생일 1957년 5월 13일(1957-05-13)(66세)
출생지 이탈리아 페루자
1.88m
포지션 은퇴 (과거 골키퍼)
청소년 구단 기록
1972–1974 스폴레토
구단 기록*
연도 구단 출전 (득점)
1974–1975
1975–1976
1976–1977
1977–1978
1978–1979
1979–1980
1980–1983
1983–1992
1992–1995
2008–2009
합계:
스폴레토
인테르나치오날레
스폴레토
프로 파트리아
리보르노
삼베네데테세
아벨리노
유벤투스
제노아
아르콰타
000 00(0)
000 00(0)
030 00(0)
007 00(0)
033 00(0)
038 00(0)
090 00(0)
254 00(0)
043 00(0)
00X 00(0)
425 00(0)
국가대표팀 기록
1987–1991 이탈리아 007 00(4)
*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

스테파노 타코니,OMRI 기사장(이탈리아어: Stefano Tacconi ˈsteːfano takˈkoːni[*], 1957년 5월 13일, 움브리아 주 페루자 ~)는 이탈리아의 전 프로 축구 선수로, 현역 시절 골키퍼로 활약했다. 그는 모든 유럽대항전 우승을 거둔 유일한 골키퍼로, 그는 유벤투스에 몸담으며 이 업적을 달성했다.[2] 그는 국가대표팀에서 주로 발테르 젱가의 후보 골키퍼 자리를 맡았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후보 골키퍼"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그는 1988년 하계 올림픽, 유로 1988, 그리고 1990년 월드컵에 이탈리아 선수단 일원으로 참가했다. 평론가들은 그를 당대 최고의 골키퍼로 손꼽으며, 이탈리아의 역대 최고 골키퍼로도 손에 꼽는다.[3]

클럽 경력[편집]

타코니는 스폴레토 축구단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그 후, 이미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주목을 받았던 그는 프로 파트리아[4]리보르노에서 잠깐 프로 선수로서의 경험을 했고, 삼베네데테세에 합류했다. 그는 이후 아벨리노 소속으로 1980-81 시즌에 세리에 A 무대를 밟았다. 그는 아벨리노에서 3년을 보내다가 1983년에 루차노 보디니를 대신해 입단 시기에 현역에서 물러난 전설적인 수문장 디노 초프의 대체자로 낙점되어 유벤투스에 합류했다.

조반니 트라파토니의 휘하의 유벤투스에서, 타코니는 국내 및 국제 무대에서 선전했는데, 1984년1986년작은 방패를 2번 땄고, 1984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을 들어올렸고, 1985년 유러피언컵도 품었으며, 같은 해 인터콘티넨털컵에서는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를 승부차기로 이기고 우승했다. 1990년, 타코니는 유벤투스 소속으로 UEFA컵코파 이탈리아를 동시 석권했다. 이듬해 그는 비록 선수단 주장을 맡았지만, 유벤투스는 세리에 A를 우승한 나폴리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패했다. 이 시기, 유벤투스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력한 선수단이었고, 타코니는 당대 최고의 골키퍼로 항상 거론되었다.[3][5]

유벤투스와 10년을 동행하던(1985-86 시즌에는 예외적으로 후보였다) 타코니는 1992년에 제노아로 떠났다. 그러나, 제노아는 불행하게도 시즌 말에 세리에 B로 강등되었다. 그는 1994년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3]

국가대표팀 경력[편집]

타코니는 유벤투스에서 맹활약하며 큰 성공을 일구어냈으나,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아첼리오 비치니호에서 처음에는 조반니 갈리와, 나중에는 현역 시절 경쟁자였던 발테르 젱가 등의 수 많은 훌륭한 수문장들과 경쟁하면서 입지를 다질 수 없었고,[3][6][7][8][9] 말년에는 잔루카 팔리우카가 급비상하면서 그에 따라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 젱가의 후보 선수로서 지위에 놓여 있었다.

타코니의 첫 국가대표팀 경기는 1987년 6월 10일, 취리히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의 경기로, 이탈리아가 3-1로 이겼다.[3] 1980년대 말, 그는 감독이자 전 골키퍼인 디노 초프의 부름을 받아 U-23 이탈리아 올림픽 대표팀 일원으로 발탁되어 1988년 하계 올림픽에서 4강 진출의 성과를 이룩했다. 타코니는 [[UEFA 유로 1988|유로 1988에서도 젱가의 후보를 맡았는데, 이탈리아는 이 대회에서도 준결승 진출의 성적을 냈고, 안방에서 열린 1990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는 전 대회 우승국 아르헨티나에 승부차기로 석패한 뒤 3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타코니는 1987년부터 1991년까지 도합하여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경기에 7번 출전했는데, 출전한 경기 모두 친선경기였고, 그동안 이탈리아는 2골만을 내주었다. 그는 1991년 2월 13일, 테르니에서 열린 벨기에전에서 마지막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경기를 치렀는데, 친선경기 결과는 0-0 무승부였다.[3]

경기 방식[편집]

비록 타코니는 민첩하지 않았지만, 강력하고 운동신경이 살아있는 골키퍼로, 꾸준함과 선방 능력에 두각을 나타냈고, 수 차례 인상적인 선방, 특히 이를 중요한 순간에서 보이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말로서 골문 앞을 전두지휘하는 타코니는 지도자적 역량, 평정심, 그리고 개성적인 면으로 알려져 수비진의 실수 시 강하게 동료를 지적하곤 했다.[3] 비록 그는 배급되는 공을 가로채거나 골문 앞에서 막는 능력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는 말년이 되면서 서서히 약점을 보완해 나갔고, 초프의 도움으로 그는 비록 넓은 공간에서 배급되는 공을 잡아 회수하는 것에 회의적이었지만ㅡ 영역을 벗어나 그를 향해 높이 찌른 공을 회수할 수 있었다.[3][10][11][12] 그는 승부차기에서 선방하는데 적응력을 확인시킨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13] 비록 그는 공을 매우 깊게 침투시켰지만,[14] 발로 공을 다루는데 서툴었고, 뒤로 넘긴 공을 잡을 수 없는 규정의 도입한 데에 새 규정에 적응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았다.[15][16] 그는 지역 방어 체계에서 스위퍼-키퍼로 활약하는 데에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17]

현역 은퇴 후[편집]

현역 은퇴 후, 타코니는 정치에서 부진한 행보를 보였다. 1999년, 그는 국가동맹 당원으로 유럽 연합 의회 총선에 비례대표 출마했지만, 의석을 얻지 못했다. 2005년, 그는 극우 정당인 신이탈리아 사회운동당 소속으로 롬바르디아의 회장으로 출마하기로 발표해 논란을 야기했지만, 득표율이 저조해 낙선했다. 2006년, 그는 국가동맹당원으로서 레티치아 모라티 시장 후보을 지지해 밀라노의 시의회원으로 밀었지만, 득표가 57표에 불과해 낙선했다.

2008년 4월, 51세가 된 타코니는 세콘다 카테고리아의 아르콰타 입단에 합의를 보아 마르케 주 아르콰타 델 트론토에서 다시 축구화를 신고 현역 골키퍼가 되었다.[18]

사생활[편집]

2011년 5월 13일, 타코니는 오래 이성친구로 교제하던 라우라 스페란차를 배우자로 맞이했는데, 타코니와 스페란차는 슬하에 4명의 자식을 두고 있다.[19]

수상[편집]

유벤투스[20]
이탈리아[20]
개인
서훈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Tacconi Sig. Stefano” [스테파노 타코니 씨]. 《Quirinale》 (이탈리아어). Presidenza della Repubblica Italiana. 2020년 12월 12일에 확인함. 
  2. “Journey through the Stars: Stefano Tacconi”. Juventus.com. 2011년 6월 24일. 2014년 12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6월 1일에 확인함. 
  3. Stefano Bedeschi. “Gli eroi in bianconero: Stefano TACCONI” (이탈리아어). Tutto Juve. 2014년 11월 12일에 확인함. 
  4. Stefano TacconiBustocco.it.
  5. “Where Are The Members of The Italia 90 Squad Today? Stefano Tacconi”. 2014년 12월 23일에 확인함. 
  6. LICIA GRANELLO (1987년 11월 19일). “MIA CARA INTER TI LASCIO COSI' (이탈리아어). La Repubblica. 2017년 10월 29일에 확인함. 
  7. Fabio Bianchi (2002년 10월 18일). “Zenga e Tacconi: quando la rivalità era uno spettacolo” (이탈리아어). La Gazzetta dello Sport. 2017년 10월 30일에 확인함. 
  8. FULVIO BIANCHI (1990년 9월 25일). “HO FATTO TROPPA PANCHINA” (이탈리아어). La Repubblica. 2017년 10월 30일에 확인함. 
  9. Nicola Cecere (2014년 5월 21일). “Calcio, La beffa di Maradona rovina le notti magiche” (이탈리아어). La Gazzetta dello Sport. 2017년 10월 30일에 확인함. 
  10. GIANNI MURA (1984년 11월 13일). “E' L' ADDIO DELLA BELLA SIGNORA?” (이탈리아어). La Repubblica. 2016년 8월 4일에 확인함. 
  11. “Stefano Tacconi, lo spaccone che prese il posto di Zoff” (이탈리아어). Yahoo!. 2016년 5월 25일. 2017년 10월 30일에 확인함. 
  12. GIANNI BRERA (1991년 3월 12일). “FATE RIPOSARE QUESTO BAGGIO” (이탈리아어). La Repubblica. 2017년 10월 30일에 확인함. 
  13. Giovanni Spinazzola (2014년 6월 7일). “Tacconi: "Per parare i rigori ci vuole fortuna" (이탈리아어). Tutto Juve. 2016년 8월 4일에 확인함. 
  14. Gianni Ranieri (1990년 7월 2일). “Zenga: Napoli ci amerà” (이탈리아어). La Stamoa Sera. 6쪽. 2017년 10월 30일에 확인함. 
  15. “Portieri, anche i piedi hanno le ali”. 《Corriere della Sera》 (이탈리아어). 1993년 6월 28일. 2015년 10월 10일에 확인함. 
  16. GESSI ADAMOLI (1999년 12월 30일). “TACCONI, ULTIMO SHOW” (이탈리아어). La Repubblica. 2017년 10월 30일에 확인함. 
  17. Pastore, Giuseppe (2019년 8월 1일). “Tra Maifredi e la Juventus non-poteva funzionare” (이탈리아어). Ultimo Uomo. 2020년 6월 17일에 확인함. 
  18. “Tacconi torna in porta” (이탈리아어). Sportal.it. 2008년 8월 25일. 2011년 5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8월 27일에 확인함. 
  19. “Stefano Tacconi sposo oggi pomeriggio a Orta on the 3rd of April 2015 a television interview on the Italian Program "Le Iene" Tacconi was accused of not paying debts to people that have provided him with goods and services”. 《OK Novara》 (이탈리아어). 2011년 5월 13일. 2011년 5월 16일에 확인함. 
  20. “Stefano Tacconi”. Eurosport. 2015년 12월 20일에 확인함. 
  21. “Premio Nazionale Carriera Esemplare Gaetano Scirea” (이탈리아어). 2015년 1월 21일에 확인함. 
  22. “Onoreficenze”. 《quirinale.it》 (이탈리아어). 1991년 9월 30일. 2015년 3월 19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