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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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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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일반 일간신문
판형 타블로이드배판
출판사 (주)조선일보사
창간 1920년 3월 5일
언어 한국어
웹사이트 http://www.chosun.com
v  d  e  h
조선일보
개정 로마자 표기: Joseon Ilbo
매큔-라이샤워 표기: Chosŏn Ilbo
공식 표기: The Chosun Ilbo
(주)조선미디어
Chosun Media Co., Ltd.
주요 주주 방상훈 30.03%
방성훈 16.88%
방일영문화재단 15%
방우영 12.08%
그 외 주주 26.01%
[1]
자회사 ㈜조선일보사
㈜디지틀조선일보
㈜조선방송
조선뉴스프레스
조선미디어렙
웹사이트 http://about.chosun.com

조선일보(朝鮮日報)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발행되는 조간 일간지이다. 1920년 3월 5일에 창간되었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에 있다. 현재 대표이사는 1993년에 선임된 방상훈 사장이다.

발행 부수[편집]

대한민국 신문 구독률 36.8% 가운데 조선일보는 11.9%를 차지하였으며, 구독점유율은 24% ~ 30% 로 나타나고 있다.[2][3][4]특정 신문 구독 여부에 관계없이 지난 일주일간 어떤 신문의 기사를 봤는지를 알아보는 주간열독률 조사에서 조선일보의 열독률은 16.2%였다. 2009년 한국ABC협회가 실시한 집계에서 발행부수 1,844,783부로 집계되었다. 2011년 기준으로 유료 발행 부수는 1,353,159부였다.[5] 2011년 7월부터 가판 가격이 인상되어 현재 부당 800원이나 월 구독료는 15,000원으로 변함없다.

한국ABC협회가 2013년 발행·유료 부수 현황을 공개한 자료에서 조선일보는 177만부의 공식 발행 부수를 가진 국내 최대 신문이자, 국내에서 유일하게 유료부수 100만부가 넘는 신문으로 확인되었다. 조선일보는 발행 부수 176만9310부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어 중앙일보(129만2498부)·동아일보(106만760부)·매일경제(83만6316부)·한국경제(51만7193부) 등의 순이었다. 실제 판매량을 집계하는 유료 부수에서도 조선일보가 1위(132만5555부)였다. 2·3위인 중앙·동아와는 각각 41만·57만부 격차였다.

평가 지표[편집]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 조사에서 KBS(31.6%) MBC(21.8%) 네이버(17.1%) 다음(4.1%)에 이어서 조선일보는 4.0%를 차지하였고,[6] 가장 신뢰하는 매체에 대한 조사 결과 KBS(30.1%) MBC(21.3%) 네이버(13.7%)에 이어 조선일보는 5.2%를 차지하였다.[2] 2009년 한국기자협회의 언론인 대상 여론조사에서 신뢰도 6위 및 영향력 1위에 조선일보를 꼽았다.[7]

한국갤럽이 2013년 9월 30일부터 2주간 서울·인천·경기 등 수도권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집에서 유료로 정기구독하는 신문'을 기준으로 조사한 가구 구독률에서 조선일보는 11.9%로 압도적 1위였다.[8]

부정적 지표[편집]

"시사인"이 전화 여론조사를 한 결과, 어느 매체를 가장 불신하느냐는 질문에는 중복응답을 기준으로 할 때 조선일보의 응답률이 20%에서 크게 늘어 34.2%를 차지하여[9]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제치고 1위로 나타났다. 또한 현직 기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언론사로는 한겨레가 15.4%, MBC 14.3%, KBS 11.2%, 경향신문 8.7%, 한국일보 4.0%에 이어서 조선일보는 2.4%를 차지하였다.[10]

한편, 조선일보를 비롯한 중앙일보, 동아일보 지국의 98%가 신문고시를 위반한 것으로 조사되었다.[11] 2002년과 2003년 ABC협회의 조사에서 발행부수중 5만 6,000여부가 부풀려져 175만 6,193부로 수치를 조작했음이 드러나기도 했다.[12]

역사[편집]

조선일보 복간을 축하, 김구의 친필휘호

1920년 3월 5일에 창간했다.

창간된 지 1개월 만에 영친왕과 일본 왕족인 마사코(이방자)와의 강제결혼을 비판하는 기사로 인해 압수 당한 것을 시작으로 8월에는 방한한 미국 의원단을 환영하는 조선인들을 일본 경찰이 부당하게 탄압했다고 비판하는 논설 '自然(자연)의 化(화)'를 실었다가 1주간 정간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창업주 조진태 사장이 강제퇴진당하고 2대 사장 유문환이 취임했다. 그 후에도 같은 해 9월에는 "당국의 소위 문화통치는 奇怪(기괴)치 아니한가" 라는 논설로 인해 무기정간을 당하기도 했다. 3대 사장인 안재홍은 "함께 일어나 지켜야 하고, 싸워야 하고, 고쳐가야 하고, 이를 방해하는 어떤 자들이고 부숴 치워 버려야 할 것이다." " 라는 논설 등을 써서 일제에 저항했고 4차례의 옥고를 치렀다. 4대 사장인 이상재가 취임한 후에는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고 문자보급운동의 일환으로 한글교재를 무상배포하는 등 문화보전에 힘썼다. 그 후 방응모 사장이 취임한 후 한일 학생의 교육차별을 비판하는 논설 '교육필화'로 인해 기사가 압수되기도 했으나 그 후 항일의 필봉은 많이 꺾였다. 그 후 1940년 조선총독부의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에 의해 폐간되었으나, 1945년 11월 23일,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속간되었다.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 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13]

이후 조선일보는 사주인 방응모한국독립당 입당과 반탁운동 가담을 계기로 정치적으로는 김구한국독립당을 지지하였다.

1972년 3월 5일 52주년 기념호를 통해 독자가 50만명을 넘어섰다고 공식 선언하고, 1974년에는 미국 ASI의 조사 결과 정기구독자 비율에서 1위를 차지했다.[14]

조선일보사는 1968년에 《주간조선》을, 1980년에 《월간조선》을 각각 발간하였고 1991년소년조선일보》를 창간하였다. 1999년 3월 2일에는 전면 가로쓰기 체제를 도입했다. 1995년 (주)디지틀조선일보를 설립해 인터넷 서비스를 강화하여 2008년 3월 5일부터는 조선일보 지면을 PC상에서 볼 수 있는 소프트웨어 ‘아이리더’ 서비스를 시작하였다.[15]

창립 역사[편집]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비난하는 "골수에 맺힌 조선인의 한" 1920년 6월 조선일보 논설
1927년 2월 14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신간회 창립 모습.[16]

조선일보는 1920년에 창립하였으며 일본의 소위 문화정치가 실시되면서 동아일보와 함께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대정친목회를 모체로 조진태사장으로 시작하였으나, 자금력부족으로 송병준에게 넘어갔다. 송병준은 자신이 신문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고 원로 언론인 남궁훈을 사장으로 영입한다. 1924년 남궁훈은 민족주의자였던 신석우가 인수해 민족의 사표(師表)로 추앙 받던 이상재를 추대할 때까지 사장으로 재임한다 1924년 이 때는 일제와 타협적이던 동아일보와는 달리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다. 좌파우파가 연합한 최대 독립운동조직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홍명희박헌영,김단야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조선일보에 입사하면서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후 계속적인 경영 악화로 조만식을 거쳐 방응모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17] 그 후 보수적인 언론인들이 조선일보사를 주도하면서, 보수적인 시각 차원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자매 언론기관[편집]

조선일보사는 일간지 외에도 주간지 '주간조선', 스포츠지인 '스포츠조선', 관광 숙박시설에 대한 잡지 '월간 산', 취미 문화에 관한 잡지 '월간낚시' 등의 시사지와 잡지를 발행한다. 자회사로는 '디지틀조선', '월간조선', '에듀조선', '헬스조선' 등이 있으며 이 중 '디지틀조선'은 코스닥에 상장하였고, 2004년부터 연간 80억 정도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어린이들을 위해 1931년부터 '소년조선일보'를 발행하고 있으며, 일반단행본과 백과사전들을 편집하는 출판사업도 하고 있다. 조선일보에서 출판한 단행본으로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따뜻한 이야기》(1998년)나 영화 말아톤으로 유명해진 장애우 배형진씨의 이야기를 담은 《달려라 형진아》등이 있다.

또한 온라인버전 조선닷컴이외에 영어판, 일본어판, 중국어판 온라인신문을 운영하고 있다. 이중 조선일보 일본어판은 자회사 '조선일보 일본어판'(구 조선일보JNS)에서 운영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2007년에 비즈니스앤을 개국하고, 2008년 11월에는 방송기자와 피디를 모집, 2008년 2월에는 대구방송, KNN과 함께 "아워 아시아"를 제작, 배급하였다. 이외에도 조선일보는 종합편성방송 심사에서 2위로 통과한 'TV조선'을 소유하고 있으며, TV조선과 조선일보는 보수적 논조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2010년 조선일보는 창간 90주년을 맞아 조선일보와 그 관계사를 아우르는 미디어그룹인 조선미디어를 출범시켰다. 이외에도 '주간조선' '월간조선' 등을 제작하는 조선뉴스프레스라는 자회사가 있다.

기타[편집]

한국신문상 수상[편집]

한국신문협회는 조선일보의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아들' 보도를 2014년 한국신문상 뉴스취재보도부문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들은 "언론이 권력자의 탈선된 사생활을 보도하려 할 때 필요한 덕목인 용기를 잘 보여주었다"고 하며 언론의 역할에 충실한 조선일보를 높이 평가했다.[18]

특이사항[편집]

요덕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적이 있는 강철환 북한전문기자가 있다.[19]


같이 보기[편집]

주 및 출처[편집]

  1. 조선일보에는 2명의 방 사장이 있다.
  2. 최영진 기자. "조중동 ‘방송진입 장벽’ 사라지다", 《위클리경》, 2009년 7월 30일 작성. 2009년 11월 1일 확인.
  3. 신동흔 기자. ""가장 좋아하는 신문" 조선일보 1위", 《조선일보》, 2009년 10월 22일 작성. 2009년 10월 22일 확인.
  4. 신봉석 기자. "조·중·동 신문시장 점유율 50%대로 떨어져", 《경향신문》, 2008년 6월 30일 작성. 2009년 11월 1일 확인.
  5. 종이 신문, 발등에 불 떨어졌다-시사저널
  6. 안경숙 기자. "포털, 영향력·신뢰도 ‘조선’ 앞지르다", 《미디어오늘》, 2008년 7월 10일 작성. 2009년 11월 1일 확인.
  7. 미디어 오늘
  8. 조선일보 177만부(발행 부수)로 압도적 1위, 조선일보, 2013년 11월 14일
  9. "“매체 신뢰도 1위 MBC, 불신 1위 조선일보”", 2009년 8월 10일 작성. 2009년 11월 1일 확인.
  10. 박창섭 기자. "기자들 ‘한겨레’ 가장 신뢰", 《한겨레신문》, 2009년 8월 19일 작성. 2009년 11월 1일 확인.
  11. "“조중동 지국 98% 신문고시 위반”", 《PD저널》, 2009년 6월 18일 작성. 2009년 11월 1일 확인.
  12. 이문영 기자. "문화부 징계 안해 은폐 논란", 《서울신문》, 2008년 7월 11일 작성. 2008년 12월 17일 확인.
  13. '조선일보 역사 읽기' 책은… 《조선일보》2004.06.03
  14. 방우영, 편집혁신 통해 '정상 조선일보' 탈환《조선일보》2010.03.04
  15. 신개념 디지털 페이퍼 '아이리더' 《조선일보》2008.03.05
  16. 신간회는 일제강점기 당시 합법적인 단체로 좌-우 연합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 단체는 안재홍,이상재,홍명희등 비타협적 민족주의 성향의 조선일보 인물들이 중심으로 추진했다.
  17. 조선일보 측에 따르면, 1932년 2월에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이 일제 경찰에 의해 구속당했고 조선일보는 당시 재정악화로 고리대금업자 임경래가 조선일보 발행권을 인수했다 한다. 그리고 임경래는 6월부터 부사장을 맡아 발행인과 편집인을 겸했는데, 여기서 조선일보 사원들의 반발이 극심해졌고 조선일보 사원들은 협의를 통해 1932년 7월에 출소한 여운형을 조선일보 사장직으로 임명할려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외일보(당시 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했던 홍증식이 먼저 여운형을 찾아가 중앙일보 사장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조선일보는 1933년 3월,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까지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그 시기에 조만식이 자신의 평양재산을 털어 조선일보를 인수하였고 방응모가 인수하기까지 혼란을 잠재우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 사람들 일제시대 편> 참고.
  18.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아들' 보도, 한국신문상 수상, 머니투데이, 2014년 3월 25일
  19. 강철환 "북 정치범수용소에서 생체실험"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