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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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춘령(先春嶺)은 고려예종윤관동북 9성을 쌓을 당시 북쪽 경계의 지명으로,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함주에서 공험진(公險鎭)까지 9성을 쌓고, 공험진의 선춘령에 비석으로 경계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1] 공험진은 동북 9성 중 하나다.

지리적 위치[편집]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 기록에서는 "북쪽으로 공험진까지 700리, 동북쪽으로 선춘현까지 700여리"라는 적고 있는데, [2] 그 거리의 기준점은 원래 치소(治所)가 있던 두만강 근처가 아니라 그보다 200리 이상 남쪽에 위치한 부가참(富家站, 현 청진시 부거리, 옛 부령군 부거면)이었다. 해당 기록이 태종 10년에 경원도호부 영역 대부분을 여진족에 빼앗긴 후 세종대왕육진 개척 전까지 부가참('부거참'이라고도 한다)이 임시 치소였을 때를 기준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3]

같은 기록에는 선춘령(선춘현, 先春峴)에 이르는 경로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세종실록 지리지는 선춘령이 현 함경북도 경원군 경원읍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300리(120km)쯤 북쪽에 있는 것으로 가리키고 있다.

동림성(東林城, 현 함경북도 경원군 동림리)에서 북쪽으로 5리쯤 가면 소다로(所多老, 경원군 룡당리)의 영기(營基)가 있고, 그 북쪽으로 30리에 회질가(경원군 경원읍)(會叱家灘)이 있으니 바로 두만강의 하류이다. 강을 건너 10리의 넓은 들 가운데 큰 성이 있으니 곧 현성(縣城, 훈춘시)이다. … 현성 북쪽으로 90리 밖 산 위에 옛 석성(石城)이 있는데 이름이 어라손참(於羅孫站)이다. 그 북쪽 30리에 허을손참(虛乙孫站), 거기서 북쪽 60리에 유선참(留善站)이 있고, 그 동북쪽 70리에 토성 터가 있으니 곧 거양성(巨陽城)이다. … 거양성은 본래 고려 대장 윤관이 쌓은 것이다. 거양성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선춘현(先春峴)이니, 곧 윤관이 비(碑)를 세운 곳이다. 그 비의 4면에 글이 새겨져 있었으나 오랑캐가 글자를 깎아 버렸다. 훗날 그 밑을 파본 사람이 있었는데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네 글자가 있었다. 선춘현에서 수빈강(愁濱江)을 건너면 옛 성터가 있다.

  • 원문: 自東林城北去五里許 有所多老營基, 其北三十里 有會叱家灘 乃豆滿江之下流也. 越江 十里大野中 有大城卽縣城. … 其北九十里 山上有古石城 名曰於羅孫站. 其北三十里 有虛乙孫站, 其北六十里 有留善站, 其東北七十里 有土城基卽巨陽城. … 城本高麗大將尹瓘所築. 自巨陽西距六十里 先春峴卽尹瓘立碑處. 其碑四面有書 爲胡人剝去其字. 後有人堀其根 有高麗之境四字. 自先春峴越愁濱江 有古城基.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위와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自咸州至公險鎭 築九城, 立界至碑石于公險鎭先春嶺.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2. 사방 경계가 동쪽으로 바다까지 20리, 서쪽으로 경성군 두롱이고개까지 40리, 남쪽으로 연해의 굴포(堀浦)까지 12리, 북쪽으로 공험진까지 700리, 동북쪽으로 선춘현까지 700여리, 서북쪽으로 오음회(吾音會, 회령)의 석성터까지 150리이다. (四境, 東距海二十里, 西距鏡城豆籠耳峴四十里, 南距連海堀浦十二里, 北距公險鎭七百里, 東北距先春峴七百餘里, 西北距吾音會石城基一百五十里.)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
  3. 태종 9년에 목책(木柵)을 소다로(所多老)의 영기(營基)에 설치하고 부(府)를 옮겼다. 10년에 오랑캐의 난리로 인하여 경성군에 합쳤다. 17년에 경성군의 두롱이고개 이북 땅을 떼어서 다시 도호부로 삼고, 부가참(富家站)에 목책을 세우고 치소(治所)로 삼았다. (太宗九年己丑, 設木柵于所多毛營基 移府. 十年庚寅, 因野人之亂 合爲鏡城郡. 十七年丁酉, 割鏡城豆籠耳峴以北 復爲都護府, 於富家站建木柵爲治.)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