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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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의 흉상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Lucius Cornelius Sulla Felix, 기원전 138년 - 기원전 78년), 로마 시대의 정치가, 장군이었다. 뛰어난 술수와 군사적 재능으로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두 번이나 진격하였고 독재관이 되어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으로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생애[편집]

초기의 생애[편집]

술라는 로마 공화정의 영향력 높은 귀족 가문 코르넬리우스출신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문은 그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몰락하여 정치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하는 상태였다. 그는 젊은 시절을 로마의 하층민들과 보냈으며 메트로비우스라는 당대의 배우를 만나 평생 함께했다고 한다. 비록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내긴 했지만 술라는 유창한 그리스어를 구사했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07년 당시의 집정관이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사 재무관으로 누미디아 유구르타와의 전쟁에 참가했는데 그때 그는 마우레타니아의 보쿠스왕을 설득해 계략을 꾸며서 로마를 괴롭히던 유구르타를 생포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때의 공으로 술라는 대중에게 처음 알려졌으며 마리우스는 그에 대한 질투를 조금씩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04년 킴부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이 침입하자 술라는 역시 마리우스의 휘하에서 참전하였고 나중에는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의 휘하에서 싸웠는데 이때 그의 군사적 재능이 점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승승장구[편집]

로마로 돌아온 기원전 97년 술라는 엄청난 뇌물을 뿌렸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법무관에 선출되었고 이듬해 전직법무관 자격으로 킬리키아(현재의 터키)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로마의 정치인으로서는 최초로 파르티아왕국의 대사를 만나 외교협상을 벌였고 훌륭한 외교력으로 로마의 이익을 가져왔다. 동방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귀족파에 가담하여 마리우스의 반대편에 섰다.

기원전 91년 동맹시 전쟁이 벌어지자 술라는 남부전선에서 속전속결로 눈부신 활약을 하였고 특히 당시 로마 군단에서 최고의 무훈을 세운 군인에게 수여하는 훈장인 "잔디 왕관"을 받을 정도로 용맹을 떨쳤다.

첫 번째 내전과 미트라다테스 전쟁[편집]

동맹시 전쟁이 종결되자 기원전 88년 술라는 로마 공화정의 최고의 직위인 집정관에 선출된다. 이와 함께 술라는 세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카이킬리아 메텔라와 결혼하여 당시 유력 가문인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문의 후원을 얻었다. 집정관으로서 술라는 때마침 벌어진 폰투스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에 지휘권을 부여 받는다.

그러나 당시 호민관술피키우스 루푸스는 마리우스와 협력하여 민회를 소집하여 술라가 부여받은 미트라데테스 전쟁의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겨줄 것을 결의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술라는 잠시 피신했다가 다시 군사를 규합하고 로마로 진군하여 무력으로 점령한 후, 술피키우스-마리우스 일파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였다. 로마가 안정을 되찾자 술라는 집정관인 옥타비우스와 킨나에게 로마를 맡기고는 미트라다테스 정복전쟁에 나섰다.

기원전 87년 술라는 그리스 대부분을 장악하고 이듬해 아테네를 함락시켰고 보이오티아로 달아난 폰투스-그리스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기원전 86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3만명의 술라군은 엄청난 숫적 열세(4배)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폰투스군은 10만이나 죽은 반면 술라군의 손실은 12명에 머물렀다고 한다. 같은 해, 오르코메누스에서도 압승을 거두었다. 기원전 85년 술라와 미트라다테스 6세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강화를 체결했는데 이 때도 술라는 뛰어난 외교력으로 미트라다테스를 굴복시켰다. 술라는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대한 통치체제를 정비하면서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

두 번째 내전 및 로마 진격[편집]

한편 술라가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있을 때 로마는 다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민중파가 집권하여 술라를 반역자로 만들었다. 마리우스는 곧 죽었으나 뒤를 이은 킨나는 집정관을 지낸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를 기원전 86년 술라에 맞서는 정규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아시아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플라쿠스는 곧이어 일어난 군대의 폭동으로 살해당하고 부사령관 핌브리아가 그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술라는 그의 병력을 적군 가까이에 포진시켜 아군과 적군이 친밀감을 갖도록 했다. 적군을 자연스럽게 흡수하기 위함이었다. 곧이어 적병들은 모두 진영을 탈주했고 결국 그 병력은 고스란히 술라에게 흡수 되었다. 이후 핌브리아는 자살했다. 킨나 또한 술라를 정벌하려고 군대를 편성하다가 반란으로 죽고 말았다.

기원전 83년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한 술라는 귀족파를 규합하고 내전을 벌이고 민중파가 장악한 이탈리아를 2년여에 걸친 처절한 내전을 통해 차례로 복속했다. 기원전 82년 11월 1일 콜리네 문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고, 다음날 로마로 입성한 술라는 대대적이고 철저한 반대파 학살에 착수했다. 술라는 1만명의 노예를 해방시켜 자신의 씨족명 '코르넬리우스'를 하사하여 정적소탕의 행동대로 삼았다. 또한 살생부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적을 숙청했다. 그 살생부에 오른 인물은 모두 4천7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숙적 마리우스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그 시신은 부관참시되었고, 당시 집정관이었던 카르보와 전년도 집정관인 노르바누스와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도 제거되었다. 이때의 살생부에는 18세의 킨나의 사위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있었으나 카이사르는 학살을 면하고 도망쳤다. 한편 술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보고 그의 안에는 수백명의 마리우스가 있다고 보기도 했다.

독재관 취임과 은퇴[편집]

기원전 81년 로마는 집정관이 모두 공석이었다. 술라는 10만의 병력을 배경으로 원로원을 압박해 "공화국을 재건하는" 독재관에 취임했다. 원래 로마 공화정에서 독재관은 임기가 6개월이었지만 술라는 비상사태라는 이유로 무기한 임기의 독재관을 요청했고 민회는 이를 승인했다. 독재관에 취임한 후 그는 대대적인 국정 개혁에 나섰는데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원로원 개혁 : 원로원 수를 600명으로 늘이고 권한을 강화했다.
  • 복지문제 :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시작한 곡물법을 폐지하여 무산계급의 이익을 떨어뜨리고 식민도시에 퇴역병을 이주시켰다.
  • 사법 개혁 : 그라쿠스 형제 이후 기사계급으로 구성되던 배심원을 다시 원로원 의원으로만 구성하였다.
  • 군사개혁 : 로마 직할령(루비콘 강 이남)에는 군단을 이끌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군단을 가지는 전직 집정관, 법무관은 반드시 원로원이 결정하게 함
  • 호민관 개혁 : 호민관직에 있는 사람은 다른 관직에 취임할 수 없게 하고 연임은 10년의 휴지기가 있게함

독재관으로 이러한 개혁을 2년동안 정력적으로 실시한 술라는 기원전 80년 말, 돌연 사임을 발표하고 모든 공직에서 은퇴하였고 나폴리 근처의 바닷가의 소박한 별장에서 은둔하였다. 술라는 1년여 한가한 은퇴생활을 한 후 기원전 78년 시골에서 세상을 떠났다. 술라의 장례식은 그의 부하들이 참가한 가운데 로마에서 성대하게 치러졌고 유해는 나중에 반대파에게 시신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유언과는 다르게 화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비문이 쓰였다고 전한다. "동지에게는 술라보다 더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없고, 적에게는 술라보다 더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없다."

연표[편집]

가계[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