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르크 노비츠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디르크 노비츠키
Dirk Nowitzki
No. 41 –
파워 포워드
개인 정보
국적 독일 독일
선수 경력
NBA 드래프트 1998년 / 1라운드 / 전체 9순위
밀워키 벅스에게 지명됨

디르크 노비츠키(Dirk Nowitzki, 1978년 6월 19일 ~ )는 독일의 농구 선수이자, 미국 프로 농구 댈러스 매버릭스의 선수이다.

독일에서 태어나 뢴트겐 김나지움의 농구클럽 학생으로 농구를 시작하였다. 1998년 독일 아마추어 팀 DJK 뷔르츠부르크에서 선수생활을 하다 1998년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9번 픽으로 밀워키 벅스에 지명되었다. 이후 댈러스 매버릭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신장이 213cm 에 달해 파워포워드 포지션에서 뛰는데 다른 프론트코트 포지션인 센터와 스몰포워드에서 뛸수있는 이동성과 사이즈 그리고 슛팅능력을 가지고 있다. 노비츠키는 댈러스를 11년 연속 NBA 플레이오프로 이끌어왔고 2003년과 2011년에는 컨퍼런스 파이널에, 2006년에는 파이널에 진출했다. nba 올스타와 all nba팀에 각각 10번씩 선정되었다. 그리고 그는 NBA역사에서 MVP를 수상한 첫 번째 유럽출생 선수이다. All-NBA 팀에 선출된 첫 번째 매버릭스 선수이며 수많은 매버릭스 프랜차이즈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노비츠키는 독일 농구대표팀을 2002 FIBA 월드 챔피언십에서 동메달로 이끌었고 유로바스켓 2005에서 은메달로 이끌었으며 양 대회에서 MVP와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농구 역사상 최고의 유럽선수 중 한명으로 여겨지는 노비츠키는 7번 올해의 유럽선수상을 수상했고, 이탈리아 스포츠 신문인 가제타 델라 스포츠에서 선정한 올해의 유럽 농구선수상에 5년 연속 선정되었으며 이탈리아 스포츠 잡지인 슈퍼바스켓이 선정하는 올해의 남자 유럽 선수상과, FIBA 유로 올해의 농구의 선수상에 2005년에 동시에 선정되었다. 2010-11 시즌 결승전에서 마이애미 히트를 꺾고 매버릭스를 승리로 이끄는 데 공헌하였다. 2014-15 시즌 현재 통산 득점에서 커리어 통산 26,953점 올리며 하킴 올라주원(26,946점)을 제치고 NBA 통산 득점 9위에 올랐다.

어린 시절[편집]

독일의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노비츠키는 운동선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Helga는 프로농구선수였고, 그의 아버지 Jörg-Werner는 독일 국가대표 핸드볼 선수였다. 그의 누나인 Silke 는 육상선수출신으로 농구선수였다가 지금은 NBA 케이블 TV에서 일한다. 노비츠키는 아주 큰 아이였다. 대부분 그의 또래들은 그의 다리길이보다 작았다. 그는 처음에 핸드볼과 테니스를했지만 곧 괴물소리를 들을만큼 자라자 결국 농구로 종목을 바꾸었다. DJK 뷔르츠부르크에 참여한 이후에 15살의 이 어린선수는 전직 독일 농구 국가대표 선수인Geschwindner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그의 재능을 점찍고 그에게 일주일에 2-3번의 개인교습을 제안했다. 노비츠키와 그의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낸후에 Geschwinder는 노비츠키를 특이한 훈련 방식으로 가르쳤다. 그는 슈팅과 패싱연습을 강조했고 웨이트 트레이닝과 전술적인 훈련을 피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불필요한 마찰"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Geschwindner 는 더욱 완성된 인격을 만들기 위해 그에게 악기를 연주하고 문학을 읽을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몇년후 이 코치는 감격하면서 노비츠키에게 말했다. "노비츠키 너는 세계무대에서 최고를 상대로 뛰는 것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독일지역의 슈퍼스타로 남는 것을 원하는 것인지 지금 결정해야 한단다. 만일 네가 후자를 원한다면 우리는 곧 트레이닝을 멈출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너를 막지 못하니까. 그러나 네가 전자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시 매일 훈련해야한다." 이틀간의 숙고후에 노비츠키는 전자를 선택했다. Geschwindner는 그를 매일 훈련시켰다 후에 독일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Robert Garrett과 Marvin Willoughby 그리고 Demond Greene 와 함께 그리고 1994년 여름 16살의 노비츠키는 DJK에 스쿼드에 합류했다.

DJK 뷔르츠부르크 (1994년~1998년)[편집]

노비츠키가 팀에 합류했을때 DJK는 분데스리가 2부리그팀이었고 그의 첫 번째 코치는 Pit Stahl이였다. 그는 노비츠키의 슈팅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 골밑에서 활동하기보단 오히려 외각에서 뛰게했다. 분데스리가 2부의 1994-95년 시즌을 야망차게 DJK는 12팀중 실망스러운 6위로 시즌을 마쳤다. 신인인 노비츠키는 그의 낮은 연차때문에 벤치에서 분투 했었고 그것은 오히려 주전으로 뛸때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게 했다. 1995-96년 시즌에서 노비츠키는 스타 포워드인 Matti Kuisma의 옆에서 주전자리를 차지했고 곧 두 자리수 득점을 올리는 득점원이 되었다. 후에 독일 국가대표 코치인 Dirk Bauermann이 그가 24점을 올리는 것을 보고 "디르크 노비츠키는 10년 아니 혹은 15년안에 독일에서 가장 위대한 농구선수가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DJK는 2위로 시즌을 마쳤지만, 노비츠키가 8득점으로 부진한 BG Ludwigsburg 와의 승격 결정전에서 패배로 인해 승격에 실패했다.

1996-97년 시즌에서 팀의 탑 스코어러인 Kusima가 팀을 떠났다. 그리고 Hole Geschwindner가 Pit Stahal 코치를 대신했다. Kusima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노비츠키는 게임당 19.4점을 기록했고 DJK는 다시 정규리그 2위를 차지했으나 승격하는 것은 실패했다. 이어진 1997-98 2부 분데스리가 시즌에서 노비츠키는 독일의 수능시험인 아비투어를 마쳤지만 그의 병역의무를 수행해야만했다 (1997년 9월 1일부터 1998년 6월 30일까지).노비츠키는 이 기간을 "처음엔 힘들었다. 우리는 아무 권리가 없었고 모든 훈련에 참여해야만 했다. 후에는 훨씬 편해졌다"라고 묘사했다. 농구에 관련해서는 이 18살의 소년은 6피트 11인치까지 자랐고 더더욱 번창했다. DJK를 18승 2패로 이끌었고 경기당 28.2점으로 득점왕으로 시즌을 끝마쳤다.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DJK 는 마침내 악순환을 끊었다. 노비츠키는 Freiburg와의 승격결정전에서 26점을 기록함으로써 95-88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독일 농구잡지에 의해 올해의 독일 농구선수에 선정됐다. 해외에서 노비츠키의 발전은 간과되지 않았다. 1996년 FC 바르셀로나는 그와 계약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노비츠키는 고교과정을 마치기 위해 이 제안을 거절했다. 1년이 지나고 노비츠키는 나이키의 Hoop Heros Tour 에 참여했다.그곳에서 그는 NBA 스타인 찰스 바클리스코티 피펜을 상대했다. 30분간의 쇼 매치업에서 노비츠키는 바클리를 압도했고, 심지어는 그의 위로 덩크를 꽂았다. 바클리는 "이 소년은 천재다, 만일 그가 NBA에 오길 원한다면 그는 나를 상대할 수 있다." 고 말했다. 1998년 3월 29일 노비츠키는 뛰어난 농구재능들이 경기하는 Nike Hoop Summit에 초청받았다. 미국의 재능들과 국제적인 재능들 사이에서 노비츠키는 33점을 기록했고 14리바운드를 잡았으며 3스틸을 기록했으며 향후 NBA스타가 된 라샤드 루이스와 알 해링턴을 압도했다. 그는 순발력과 볼 핸드링, 그리고 긴 슈팅 범위로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유럽과 NBA의 클럽들이 그를 스카우트하기를 희망했다.

댈러스 매버릭스 (1998년~현재)[편집]

순조롭지 않은 시작[편집]

DJK의 승격을 이끌고 대입시험과 병역의무를 마친 후에 노비츠키는 NBA로 눈길을 돌렸다. 1998년 1라운드 7픽을 예상한 노비츠키는 많은 대학의 제안을 거절하고 NBA에 입성하기 위해 프리시즌에 참가했다. 보스턴과 댈러스의 헤드코치인 릭 피티노와 돈 넬슨이 특별히 노비츠키를 눈여겨봤고, 노비츠키를 영입하는 것에 대해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보스턴과 45분간의 워크아웃에서 노비츠키는 유감없이 자신의 슈팅, 리바운드, 패싱 스킬을 보여줬다. 릭 피티노는 노비츠키를 셀틱스의 레전드 래리 버드와 비교했다. 릭 피티노는 노비츠키가 셀틱스에 10번 픽으로 드래프트 될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피티노의 계획은 넬슨에 의해 물거품이 되었다. 넬슨의 팀은 6번째 픽을 가지고 있었고, 댈러스 매버릭스는 밀워키 벅스피닉스 선즈와 거래를 했다. 매버릭스는 덕 노비츠키와 선즈의 후보 선수였던 포인트 가드 스티브 내시를 원했다. 벅스는 노비츠키 이전에 지명될 것으로 예상되는 근육질 포워드인 로버트 트레일러를 원했다. 또한 피닉스 선즈는 벅스의 Garrity를 원했다. 드래프트에서 매버릭스는 6번째 픽으로 트래일러를 뽑았고, 벅스는 노비츠키를 그들의 9번째 픽으로 지명했다. 매버릭스는 그 후 트레일러를 벅스로 보내면서 노비츠키와 Garrity를 받아왔고 댈러스는 다시 Garitty를 피닉스에 내주면서 내쉬를 트레이드 해왔다. 돌이켜보면 돈 넬슨은 두드러지는 트레이드 본능을 지니고 있었고 두 명의 평범한 선수로 두 명의 미래의 MVP를 받아왔다. 게다가 이 두 명의 신입생들은 절친이 되었다. 노비츠키는 NBA역사상 4번째 독일인이 되었다 (그전의 세명은 Uwe Blab, Christian Wepl, 그리고 올스타 스윙맨 데틀레프 슈렘프[1]였다). 노비츠키는 DJK 역사상 처음으로 NBA에 진입한 선수로서 자신의 DJK에서의 커리어를 마감했다.

댈러스는 1990년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던 팀이었고 슈팅가드 마이클 핀리가 선수단을 이끌고 있었고, 2픽으로 지명됐던 7피트 6인치의 숀 브래들리와 팀 득점 리더인 세드릭 세발로사가 있었다. 하지만 노비츠키의 NBA 커리어의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 1998-99시즌에 앞서 NBA 커미셔너 데이비드 스턴은 샐러리 캡 제도를 시행하기를 원했는데 이것이 NBA 선수협이 파업을 선언하게 만들었다. 시즌 전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이 상황에서 노비츠키는 DJK로 돌아가서 13경기를 뛰었고, 그 사이 NBA에서는 결국 노사가 타협하면서 1998-99년 82경기 대신에 50경기의 단축시즌이 열리게 되었다. 마침내 시즌이 시작되자 노비츠키는 분투했다. 돈 넬슨에 의해 파워 포워드로 뛰면서 20살의 풋내기는 훨씬 더 운동능력이 뛰어난 NBA 포워드들에게 압도감을 느꼈다. 기대감에 부담을 느끼고, 좋지 못한 수비를 보여줬다. 노비츠키의 이런 모습은 몇몇의 사람들이 노비츠키를 'Defense'(수비)의 'D'를 생략한 'irk nowitzki'란 이름으로 조롱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 노비츠키는 경기당 8.2점, 3.4 리바운드, 20.4분의 출장시간을 기록했다. 이 시절의 돌이켜보면서 노비츠키는 말했다, "저는 매우 좌절했고, 심지어는 독일로 돌아갈 것을 고려해봤어요. 2부 분데스리가에서의 NBA로의 점프는 마치 낙하산이 어떻게든 열리겠지 하면서 비행기 밖으로 점프하는 것과 같아요." 매버릭스는 50경기중 단지 19경기만을 이겼고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비록 노비츠키가 마지막 12번의 게임에서 8번의 두자리수 득점을 기록했지만.

마크 큐반과 "빅 3" (1999–2004)[편집]

1999-00 시즌에 돈 넬슨은 그의 패싱기술을 활용하기위해 노비츠키를 포인트 포워드로 기용하는 것을 원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움직임들중 하나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 때까지 매버릭스의 구단주는 1992년과 1996년 대선에 후보로 나선 사업가 Ross Perot의 아들인 Ross Perot Jr.였다. 그는 1억2천5백만달러에 댈러스를 구매했었지만 선수에 투자할 계획이 없었고 농구에 대해 무지했다. 2000년 1월 4일 그는 매버릭스를 인터넷 백만장자인 마크큐반에게 2억8천만달러에 팔았다. 큐반은 재빨리 매버릭스에 투자했고 팀을 재건했다. 사이드라인에서 매일 경기에 참여하면서 팀에게 4천6백만달러의 식스스타급 보잉 757기를 선물했다. 그리고 팀 예산을 1억불 이상으로 증액했다.

노비츠키가 큐반에 대해서 회상하기를, "그는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줬습니다. 우리는 단지 나가서 이기기만 하면 됐어요." 결과적으로 넬슨의 지도와 큐반의 지원속에서 노비츠키는 현저하게 그의 실력을 향상시켰다. 2년차 시즌에 17.5점 6.5리바운드 2.5어시스트를 게임당 기록했으며 35.8분을 출장했다. 9번의 더블더블 게임을 기록했고 커리어 하이인 32점을 두 번 기록했다. 그는 가장 발전된 선수상 (MIP)에 제일런 로즈에 이어 득표되었고 폴 피어스, 빈스 카터와 함께 올스타 2년차 대표로 선정되었다. 루키 vs 소포모어 매치에서 그는 17점 6리바운드 4어시스트를 기록했고 스티브 프랜시스와 라마 오돔이 이끄는 루키팀에게 연장전끝에 패배했다. 7풋의 노비츠키는 또한 NBA 올스타 3점 경연대회에 선택되었는데 역대 참가자중 가장 장신이었다. 1라운드에서 15개의 3점샷을 연속으로 성공시킨후 그는 파이널 라운드에 참여했다. 결승에서 그는 제프 호나책에게 졌다. 그가 그의 성적을 상승시키는 반면 매버릭스는 40승 42패로 시즌을 마감하면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이어진 2000-01 시즌에서 노비츠키는 더더욱 그의 성적을 상승시켜서 게임당 21.8점과 9.2리바운드 그리고 2.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파워 포워드 포지션에서 뛰면서 그는 NBA 역사상 로버트 호리 다음으로 100개의 3점슛과 100개의 블락을 한 시즌에 기록한 두 번째 선수가 되었다. 그는 151개의 3점슛과 101개의 블락슛을 기록했다. 그의 중대한 성장의 신호로서 그는 팀 캡틴인 핀리와 함께 82경기에 선발출장한 두명 중 한명이었고 그는 30포인트 이상 경기를 10경기나 가졌다. 노비츠키는 All-NBA 팀에 선정된 첫 번째 매버릭스 선수가 되었고 그는 3rd 팀에 선정되었다.게다가 그의 절친한 친구 스티브 내시는 가치있는 포인트가드가 되었다.스코어러 핀리와 더불어 사람들은 이 트리오를 '매버릭스의 빅3'라 불렀다. 53승 29패를 정규시즌에 기록하면서 매버릭스는 마침내 1990년 이래로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5번 시드로 그들은 올타임 어시스트 리더인 존 스탁턴과 올타임 득점 2위인 칼 말론이 이끄는 유타 재즈와 마주쳤다. 먼저 2번의 패배이후 노비츠키는 3,4경기에 33득점을 기록함으로써 시리즈 타이를 만들었다. 5경기에서 매버릭스는 종일 끌려가다가 캘빈 부스의 점프샷으로 9.8초 남기고 84-83으로 경기를 뒤집었다. 재즈의 브라이언 러셀과 말론이 마지막 샷들이 실패하면서 매버릭스가 승리했고 그들은 올스타 포워드 팀 던컨텍사스 라이벌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만났다. 매버릭스는 그들의 첫 3경기를 내줬다. 노비츠키는 감기에 걸렸고 후에 스퍼스 가드 테리 포터와의 충돌로 그의 이빨을 잃었다. 4경기를 승리한 후 노비츠키는 42점 18리바운드를 5경기에서 기록했으나 105-87의 패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매버릭스의 슛이 안좋았다고 지적했으나, 노비츠키는 그의 커리어하이 플레이오프 득점인 42점을 기록했다. 노비츠키는 말했다, "허무하게 시즌을 끝마치게 되어서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2001-02 시즌을 앞두고 노비츠키는 6년 9000만불의 연장 계약을 체결했고 이것은 그를 F-1 챔피언 미하엘 슈마허에 이어 두 번째로 연봉이 많은 독일 스포츠 선수로 만들었다. 그는 발전을 계속했고 경기당 23.4점 9.9리바운드 2.4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all-nba 2nd 팀에 선정되었고 그의 첫 올스타 게임에 참여했다. 노비츠키는 30득점 10리바운드 이상 경기를 13경기를 가졌으며 이는 샤킬 오닐팀 던컨 다음의 수치였다. 새로운 영입선수 우수한 득점원인 식스맨 닉 반 엑셀의 영입에 힘입어 매버릭스 "빅3"는 57승 25패의 기록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매버릭스는 케빈 가넷미네소타 팀버울브스를 2002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3-0으로 스윕했다. 노비츠키는 경기당 33.3점을 기록하며 케빈 가넷의 24점을 압도했다. 2라운드에서 매버릭스는 크리스 웨버새크라멘토 킹스를 만났다. 1승1패를 기록한 후에 킹스 코치 아델만은 수비전술을 변화시켰다. 전에는 웨버가 1:1로 노비츠키를 막았지만 이번엔 더 작지만 빠른 선수인 터키 풀신 스몰 포워드 히도 터콜루를 노비츠키에게 매치업시켰다. 터콜루는 그의 빠른발을 노비츠키를 막는데에 사용해야만했고 노비츠키가 터코글루를 상대로 포스트 업을 시도하면 웨버가 더블팀을 들어왔다. 댈러스에서의 3게임에서 매버릭스는 119-125로 패배했다. 노비츠키는 단지 19점만을 기록했고 그는 말했다. "나는 터코글루를 제칠수 없었어요. 만일 그리 했다면 더블팀과 마주쳤고 많은 턴오버를 기록했습니다." 4게임에서 더 많은 좌절이 이 독일선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버릭스는 한때 14점의 리드를 기록했고 킹스의 선발 프론트 코트진인 블라디 디박과 크리스웨버가 동시에 파울아웃되고 스몰 포워드 페야 스토야코비치가 부상으로 빠진 상태였다. 그러나 노비츠키는 두 번의 게임을 결정짓는 점프샷에 실패했고 매버릭스는 홈에서 113-115로 패배했다. 그리고 게임 5에서 더이상 이 의기소침한 팀은 킹스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101-114로 패배했고 그들은 다시 탈락했다. nba.com은 킹스가 매버릭스보다 더 훌륭히 그들을 공략했다고 했다. 그 5경기에서 새크라멘토는 115번의 레이업을 기록했는데 이것은 킹스가 경기당 23번의 쉬운 공격을 기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노비츠키는 상으로 위안받았다. 가제타 델라 스포츠는 그를 올해의 유럽 농구선수로 선정했고 그는 104표를 얻어 2위인 Dejan Bodiroga와 스토야코비치를 제쳤다.

2002-03시즌 전에 돈 넬슨과 마크 큐반은 훈련방법에 있어서 디펜스에 방점을 두었다. 샷 블라커인 라프란츠와 숀 브래들리에 이점을 사용하여 지역방어에 중점을 뒀다.매버릭스는 그들의 첫 11경기를 모두 승리했으며 핀리와 내쉬 노비츠키는 2002년 11월 이달의 서부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 시즌에는 노비츠키는 다시금 자신의 성적을 올렸다. 경기당 평균 25.1점 9.9리바운드 3.0어시스트를 기록했고 게다가 이 독일인은 41번의 더블-더블(득점과 리바운드 두자릿수 기록) 경기를 가졌다. 이것은 그시즌에 7번째로 높은 수치였다. 평균 25.1점을 기록함으로써 92-93년 크리스 멀린이 기록한 25.9점에 이어 두 번째로 평균득점이 높은 백인선수가 되었고, 그는 한시즌 2000득점이상을 처음 기록한 유럽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91-92년 크리스 멀린이후로 백인선수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에대한 보상으로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그는 all-nba 세컨드팀에다시 선정되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올해의 독일 스포츠 선수 후보에 올랐는데 스키점퍼 선수인 Sven Hannawald에 이은 2위를 차지하였다. 그는 매버릭스를 프랜차이즈 기록인 60승22패로 이끌었고 3번시드를 획득했다. 결국 매버릭스는 6번 시드인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 2003 플레이오프에서 마주쳤다. 7전 4선승제가 1라운드에 처음 도입된 시즌에서 댈러스는 재빠르게 첫 세게임을 이겼다. 그러나 그 후 매버릭스는 완벽히 그들의 리듬을 잃으면서 세경기를 내리 내주었다. 7게임에서 포틀랜드는 거의 게임을 잡아갔다. 그러나 종료 90초를 남겨두고 노비츠키가 그의 클러치 3점슛을 터뜨렸고, 107-95로 매버릭스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것이 내 커리어사상 가장 중요한 경기였습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일찍 휴가를 갈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후에 그는 ESPN 인터뷰에서 덧붙였다 "우리는 우리는 더욱 골밑에서 더욱 강인해야하고 리바운드를 해야합니다. 우리는 모든 시즌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얻기위해 최선을 다했고 지금은 그 어드밴티지를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다음 라운드에서 매버릭스는 다시 킹스를 만났다. 홈에서의 첫경기에서 노비츠키는 25점을 기록했고 팀은 113-124로 패배했다. 그리고 2경기에선 베테랑 식스맨 닉 반 엑셀이 댈러스의 환상적인 132-110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매버릭스는 전반에만 83점을 기록했다. 크리스 웨버가 그의 연골 부상으로 인해 나가면서 노비츠키와 닉 반 엑셀은 매버릭스를 연장끝에 킹스를 3차전에 141-137로 물리쳤다. 83-99로 패배한 4번째 경기에서 노비츠키는 단지 11점만을 기록하고 신경질적으로 수건 뭉태기를 발로 차고 퇴장당했다. 다음 두경기를 나눠가진후에 노비츠키는 7경기에서 결정적인 활약을 보여줬다. 7게임에서 30점에 19리바운드 그리고 강력한 디펜스로 매버릭스의 112-99승리를 이끌었다. ESPN은 노비츠키를 Big D로 칭송했고 승리이후 노비츠키가 덧붙였다 "우리는 어떻게 게임을 끝내는지 배웠습니다." 서부지구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매버릭스는 팀 던컨의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다시 만났다. 1경기에서 노비츠키는 38점을 던컨위로 쏟아부으며 팀의 113-110 승리를 이끌었고 2경기에서 던컨은 노비츠키를 빠른 파울트러블에 빠뜨리며 스퍼스는 132-110으로 시리즈를 원점으로 만들었다. 운명의 3차전에서 노비츠키는 리바운드를 잡는 과정에서 스퍼스 가드인 마누 지노빌리와 충돌했고 그는 무릎 부상으로 시리즈에서 아웃되었다.그들의 탑 스코어러 없이 매버릭스는 2승3패까지 쫓아갔으나 스퍼스의 가드 스티브 커가 6게임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3점슛을 터뜨리면서 시리즈는 마감됐다. 돈 넬슨은 후에 말했다 " 우리는 정말 오랫동안 정말 훌륭히 경기해 왔습니다. 단지 운이 없었을뿐입니다." "잘못된 시간에 추위를 겪겠군요."

노비츠키는 다시 올해의 유럽농구선수로 선정되었고 NBA 단장들에 의해 최고의 유럽 선수로 호명되었다. 그리고 2003-04시즌 마크 큐반과 돈 넬슨은 그들의 선수단에 좀더 공격적인 선수를 더하기로 결정한다. 결과적으로 매버릭스는 두명의 올스타 포워드인 앤트완 재이미슨과 앤트완 워커를 얻었다. 그들은 앤투완 워커를 얻음으로서 센터인 라프란츠를 보냈는데 농구 전문가들은 이 트레이드에 우려를 나타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매버릭스 주전 센터를 보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간이 가면갈수록 이것이 큰 구멍으로 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상당하기 쉬운 션 브래들리로는 그 자리를 더이상 채울수 없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센터를 트레이드 못해왔기 때문에 돈 넬슨은 노비츠키를 축에서 리바운더로 세우고 워커를 노비츠키의 파워 포워드의 자리에 놓고 재이미슨은 높은 득점의 식스맨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더욱 신체적인 그의 역할에 대처하기 위해 노비츠키는 그의 순발력을 희생시키면서 9.1kg의 근육량을 여름에 증량했다. 그리고 득점보다 수비에 방점을 두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성적은 그의 커리어사상 처음으로 내려갔다. 21.8득점 8.7리바운드 2.7어시스트로 떨어졌으나 그는 여전히 매버릭스의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그리고 블락 리더였다.이러한 모습들로 그는 올스타 게임과 all-nba 3rd 팀에 지명되었다. 52승30패를 기록하고 매버릭스는 그들의 친숙한 라이벌인 세크라멘토 킹스를 다시 만났으나 겨우 5게임만에 그들은 패배했다.

댈러스의 프랜차이즈 (2004-)[편집]

2004-05 시즌을 앞두고 매버릭스는 다시금 팀을 재정비한다. 수비형 센터인 에릭 뎀피어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얻어 왔지만, 노비츠키의 가까운 친구인 스티브 내시는 프리 에이전트 계약으로 댈러스를 떠나 전 소속팀이었던 피닉스 선스로 돌아갔다. 그 시즌 동안에 긴 시간동안 감독이었던 돈 넬슨이 사임하고 보조 코치였던 에이버리 존슨이 감독직을 맡게된다. 이러한 변화들속에서도 노비츠키는 그의 게임에 박차를 가하고 커리어 하이인 경기당 26.1점과 9.7리바운드 그리고 1.5블락 3.1어시스트를 기록하는데 이 역시도 커리어 하이였다. 게다가 노비츠키는 모든 게임에서 최소 10점이상을 득점했고 경기당 1.2스틸과 1.2블락 이상을 기록한 4명중의 한명으로 기록되었다. 이것은 또한 그의 두 번째 2000득점 시즌이었는데 그의 경기당 26.1점은 역대 유럽선수중 최고기록이었다. 그리고 1989-90년 탐 챔머스의 27.2점에 이어 백인선수로는 두 번째로 높은 평균득점을 기록하였다. 2004년 12월 2일 노비츠키는 휴스턴 로케츠를 상대로 53점을 기록했으며 이것은 그의 통산 최고 득점 기록이다. 이런 활약들에 힘입어 노비츠키는 All-NBA 퍼스트팀에 처음 올라갔고 그는 MVP 투표에서도 3위를 기록했다. 이것은 내시와 샤킬 오닐에 이은 기록이었다. All-NBA 퍼스트 팀에 선출됨으로써 노비츠키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퍼스트 팀에 오른 사상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매버릭스는 2005 NBA 플레이오프에서 수준 이하였다. 1라운드에서 댈러스는 득점왕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와 7-6의 야오밍의 휴스턴 로케츠를 만났다. 그리고 노비츠키는 무명의 포워드인 라이언 보웬을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nba.com 에서는 보웬을 노비츠키보다 한수 아래로 묘사했다. 그러나 보웬은 노비츠키를 1경기에서 단지 21점으로 묶었고 2경기에서도 26점으로 묶었다. 2경기에서 그는 단지 26개의 슛중 8개만을 성공시켰다. 로케츠는 2-0의 리드를 잡았지만 매버릭스가 3경기 연속으로 승리하였다. 6차전의 패배후 댈러스는 7차전에서 완승을 거뒀고 시리즈를 가져갔다. 그러나 노비츠키는 그의 슈팅에 어려움을 겪었다. 2라운드에서 매버릭스는 피닉스 선즈를 만났다. 이는 내쉬의 새 클럽이었다. 선즈가 마지막 2경기를 이기기전에 둘은 2승2패로 호각세였다. 6경기에서 매버릭스는 연장전의 혈투 끝에 패했다. 노비츠키는 다시금 그의 최상의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28점을 기록했지만 25개의 슈팅중 단지 9개만을 성공했다. 게다가 그는 눈에 띄게 짜증을 부렸고 반복적으로 그의 팀 메이트에게 고함을 질렀으며 연장전에서 그의 5개의 슈팅을 모두 실패했다.

2005-06시즌에 앞서 매버릭스의 베테랑 캡틴이었던 마이클 핀리가 웨이브되었다. 그렇게 "빅3"중 남아있는 선수는 노비츠키가 유일했다. 노비츠키는 유일한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로 기량이 만개했다. 평균 26.6점에 9.0리바운드 그리고 2.8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의 세 번째 2000득점 시즌이었을뿐만아니라 그는 자신의 26.1점 기록을 갱신하며 유럽선수의 평균 득점 기록을 다시 갱신했다. 이는 다시 한번 89-90 시즌의 탐 챔머스 이후에 백인선수로는 가장 높은 평균득점이었다. 그는 그의 슈팅 정확도를 향상시켰다. 그의 개인시즌 필드골 성공률과 3점슛 성공률 그리고 자유투에서 최고기록을 세웠다. 휴스턴에서 열린 2006 올스타 휴식기때 노비츠키는 18점으로 시애틀의 레이 알렌과 워싱턴의 길버트 아레나스를 3점 경연대회에서 물리쳤다. 노비츠키는 매버릭스를 60승 시즌으로 이끌었다. 댈러스는 리그에서 세 번째 높은 승률로 시즌을 끝마쳤다. 그 위에는 디펜딩 챔피언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만이 있었다. 2004-05시즌처럼 그는 MVP투표에서 3위에 올랐고 이번에는 내쉬와 르브론의 뒤를 이었다. 그는 다시금 all-nba 1st팀에 선정되었다. 노비츠키는 플레이오프에서 평균 27점 11.7리바운드 2.9어시스트를 기록함으로써 그가 슈퍼스타임을 확인시켜주었다.매버릭스는 멤피스를 4-0으로 스윕했고 3게임에서 승부를 연장으로 이끄는 클러치 3점을 성공시킴으로써 굉장한 플레이를 보여줬다. 2라운드에서 매버릭스는 샌안토니오와 다시 승부하게 되었다. 6게임을 3경기씩 나눠가진후 매버릭스는 30초를 남기고 마누 지노빌리가 클러치 3점슛을 폭발시키기 전까지 줄곧 앞서있었다.다음 플레이에서 노비츠키가 3점 플레이를 성공시켰고 이것으로 경기는 동점이됐다. 마침내 매버릭스가 119-111로 승리를 했고 노비츠키는 37점 1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노비츠키는 말했다 "나는 공이 어디로 갈지 몰랐습니다. 마누가 제 손을 쳤고 이것은 운이 좋은 튕김(bounce)이었어요." 매버릭스는 컨퍼런스 파이널로 전진했고 거기에서 내쉬와 피닉스 선즈를 만났다. 노비츠키는 50득점을 기록함으로써 2승2패에서 중대한 5번째 게임을 승리로 이끌었고 매버릭스는 6게임마저 승리하며 2006 NBA 파이널에서 마이애미 히트와 만나게 되었다. 만족한 노비츠키가 말했다, "우리는 모든시즌동안 좋은 변방팀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믿었고 시즌동안 상승할때도 하락할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는 결국 마음을 열고 같이 플레이하는겁니다." 노비츠키의 퍼포먼스에 대해 ESPN 칼럼니스트 빌 시몬스가 말했다, "덕은 버드 이후에 그 어떤 포워드보다도 높은 위치에서 플레이중입니다." 매버릭스는 처음 2경기를 잡았으나 3차전 15점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역전 당했다. 그리고는 파이널mvp 드웨인 웨이드에 의해 득점 폭격을 맞았다. 웨이드는 다음 4경기에서 최소 36득점 이상을 기록했으며 이 경기에서 히트는 모두 승리했다. 노비츠키는 댈러스가 지는 3경기동안 단지 55개의 슛중 20개만을 성공 시켰다. 이 독일인은 ESPN에 의해 비판당했다. "명백하게 최상은 아니었던 시리즈. 그것은 어려운 패배였고 (3경기), 그 패배가 정말 전체 시리즈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그 후에 마이애미는 자신감을 얻었다."

2006-07시즌은 노비츠키가 MVP로 뽑힌 해였다. 그는 커리어 베스트인 50.2%의 필드골 성공률을 기록했고 평균 24.6점 8.9리바운드 3.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매버릭스를 프랜차이즈 기록인 67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는 매버릭스가 2007 NBA 플레이오프에서 1번시드를 얻는 것을 의미했다. 노비츠키는 압도적으로 투표로 선정된 MVP가 될 것으로 알려졌고 매버릭스를 8번시드인 골든 스테이트 상대로 쉽게 승리로 이끌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결국 매버릭스는 6게임만에 워리어스에게 패배했고, 8번시드가 1번시드에게 진 7번의 시리즈중에 최고의 시리즈로 기록됐다. 결정적인 6번째 경기에서 노비츠키는 단지 13개의 샷중에 2개만을 성공시켰고 8득점을 기록했다. 스티븐 잭슨에게 무너지면서 노비츠키는 거의 5점에 가까운 평균득점 하락을 기록했을뿐만 아니라 필드골 성공률도 정규시즌의 50%에 비해 38.2%만을 기록했다. 그는 이 패배에 대해 그의 커리어 사상 가장 낮은 점수로 묘사했다. "이번 시리즈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 없었고, 이것이 내가 실망한 이유입니다." 역사에 남을 플레이오프 패배에도 불구하고 노비츠키는 NBA 정규시즌 MVP에 호명되었고 백투백 MVP 스티브 내쉬를 100표 이상 앞섰다. 그는 또한 NBA 역사상 MVP를 받은 첫 번째 유럽 출생 선수가 되었다.

2007-08시즌에 노비츠키와 매버릭스는 시즌 중반의 제이슨 키드 얻는 블록버스터급 트레이드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매버릭스는 단지 서부지구에서 7위를 차지했고 노비츠키는 23.6점에 8.6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커리어 하이인 3.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플레이오프에서 그들은 떠오르는 스타인 크리스 폴뉴올리언즈 호네츠를 맞이했고 5경기만에 시리즈를 내줬다. 이 시즌의 아주 조금의 긍정적인 하이라이트라면 그의 커리어 첫 번째 트리플더블이었다. 그는 밀워키 벅스를 상대로 2008년 2월 6일 29득점 10리바운드 그리고 커리어 하이인 12어시스트를 기록했고 2008년 3월 8일 뉴저지 네츠를 상대로 34득점을 기록함으로써 로날도 블랙맨이 가지고 있는 매버릭스 통산득점 1위 기록인 16644점을 갈아치웠다.

08-09시즌 노비츠키는 25.9득점 8.4리바운드 그리고 2.4 어시스트로 시즌을 마쳤고 그는 득점 4위를 기록했으며 그의 4번째 all-nba 1st팀에 선정되었다. 그는 또한 2009 올스타게임에 참가했는데 이것은 그의 8번째 참가였다. 노비츠키는 댈러스를 간신히 플레이오프에 합류시켰다.초반 2승7패의 스타트이후 댈러스는 50승32패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 독일인은 오랜기간 라이벌인 3번시드 샌안토니오를 4-1로 업셋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매버릭스는 2라운드에서 덴버 너게츠에게 1-4로 지면서 곧 떨어졌다. 노비츠키는 이 시리즈동안 34.4점 11.6리바운드 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매버릭스는 2009-10시즌에 2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것은 그들의 10연속 정규리그 50승 시즌이었다. 주목할만한 스쿼드의 변화는 올스타인 숀 매리언과 캐런 버틀러의 합류였다. 시즌 전반부 막판에 들어선 2010년 1월 13일 노비츠키는 마침내 34번째로 2만득점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고 이는 유럽선수 중에 최초였다. 그리고 그는 평균 25점 7.7리바운드 2.7어시스트 1블락을 기록했다. 그는 2010 올스타게임에 선정되었고 이는 그의 9번째 출장이었다. 매버릭스는 다시 한번 1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를 상대했지만 이번에는 다음 라운드에 가는데 실패했다. 노비츠키는 매버릭스에서 시리즈동안 유일하게 꾸준한 선수였다. 26.7점을 기록했고 제이슨 테리는 정규리그 16.6에비해 떨어지는 12.7점을 기록했다. 노비츠키가 오프시즌동안 FA로서 팀을 옮길거라는 추측이 있었지만, 2010년 7월 5일 그는 댈러스와 4년에 8000만달러에 재계약 했다.

10-11 시즌 결승전에서 마이애미 히트를 쓸어버리고 매버릭스의 우승에 공헌하였다.

국가대표[편집]

노비츠키는 독일 국가대표로 1999년 FIBA 유로피언 챔피언십 이후에 활동해왔다. 그의 국가대표 데뷔무대에서 21살의 루키가 독일의 중심 득점원으로 떠올랐으나 독일은 7위에 머물렀고 2000년 올림픽 출전 자격을 얻는 것에 실패했다. 2001 FIBA 유로피언 챔피언십에서 노비츠키는 28.7점으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MVP 투표에서 세르비아인 페야 스토야코비치에게 밀렸다. 독일은 4강전에 안착했고 주최국인 터키를 거의 이기는데 근접했다. 그러나 히도 터콜루의 버저비터 3점슛을 얻어맞고, 결국 연장전끝에 터키에게 패배했다.독일은 그 후 90-99로 스페인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메달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노비츠키는 평균 28.7점과 9.1리바운드로 득점왕과 리바운드왕을 차지했고 올스타 팀에 뽑혔다. 독일 농구 국가대표팀은 370만의 시청자들은 텔레비전으로 끌어모았고, 이것은 독일 농구사상 초유의 기록이었다. 노비츠키는 마침내 2002 월드챔피언십에서 독일을 동메달로 이끌었다. 8강전에서 파우 가솔이 이끄는 스페인을 상대로 스페인은 3쿼터를 마치고 52-46으로 앞섰지만 노비츠키가 그 후 4쿼터에 10점을 기록하며 독일에 70-62 승리를 안겼다. 4강전에서 그들은 마누 지노빌리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와 마주쳤다. 4분을 남기고 74-69의 리드에도 불구하고, 지노빌리가 발 부상으로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가 86-80으로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독일팀은 뉴질랜드를 상대로 117-94로 이김으로써 동메달을 차지했고 이 토너먼트의 득점왕은 24.0의 노비츠키였고, 그는 MVP로 선출됐다. 독일에서는 400만이 넘는 시청자가 게임을 시청했고 이것은 독일 농구역사에 남을 기록이었다. 2003 FIBA 유로피언 챔피언십은 노비츠키와 독일 대표팀에 큰 실망을 안겼다. 예선전에서 그는 프랑스의 플로렌트 피에트러스(미카엘 피에트러스의 형)와 충돌하면서 발부상으로 고통스러워했다. 결과적으로 노비츠키는 꾸준히 플레이할 수 없었고 자주 하드파울의 대상이 됐다. 이탈리아를 상대로한 결정적인 2라운드 매치에서 (오직 승리자만이 메달 라운드에 가는 것이 허용됨) 독일은 86-84로 패배했고 9위로 2004년 올림픽 게임 출전권을 따는데 실패했다. 노비츠키는 22.5점을 기록했고 이는 3위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집중력과 그 위력을 부상때문에 잃어버린것처럼 보였다. 2005년 FIBA 유로피언 챔피언십에서 노비츠키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놀랍게도 고갈된 독일 국가대표팀을 결승전까지 이끌었다. 8강전에서 강호 슬로베니아와 4강전에서 스페인을 누르고. 유럽농구 전문가들은 두경기에서의 노비츠키에게 감탄했다. 노비츠키는 슬로베니아의 경기에서 (76-62) 22점을 기록하고 말했다. "슬로베니아 사람들이 우리를 얕봤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이 원하는 팀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틀렸다. 당신들은 16강전에서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스페인을 상대로 (74-73) 노비츠키는 게임하이인 27점을 기록했고 결승 득점을 기록했다.스페인 포워드 호르헤 갈바호사를 농락하면서 베이스라인 점퍼를 가바호사의 뻗친 손 위로 날렸다. 종료 3.9초를 남기고. 이 독일인은 후에 말했다, "이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가바호사가 저에게 달려왔고 저는 날렸을 뿐입니다." 결승전에서 그리스에 78-62 패배에도 불구하고 노비츠키는 토너먼트 득점왕에 리바운드 2위에 샷블락 1위였다. 그리고 토너먼트의 MVP로 선정됐다. 그리고 2006년 FIBA 월드챔피언십에서 노비츠키는 독일팀을 8등에 올려놓았다. 그는 말했다 "운이 없었습니다.그러나 종합적으로 세계 8위라는 것은 나쁘지 않아요." 2007년 FIBA유로피언 챔피언십에서 그곳에서 탑3는 자동적으로 2008 올림픽 출전자격을 획득하는데 노비츠키는 독일을 5위로 이끌었다. 그는 24.0으로 득점왕이었다. 5등은 독일이 자동출전권에선 탈락하지만 2008 올림픽 출전 결정전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을 의미했다.

노비츠키는 올림픽 출전권 한장을 놓고 푸에르토리코를 상대로 이 중대한 경기에서 32점을 기록함으로써 독일의 96-82 승리를 이끌었다. 이로써 독일팀은 1992년 올림픽 이후로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여하게 되었다. 노비츠키는 개막식에서 독일 올림픽 팀의 기수로 선정되었다. 노비츠키는 독일을 10위로 이끌었고 평균 17점에 7.6리바운드를 기록했다. 2009년 노비츠키는 FIBA유로피언 챔피언십에 참가하지 않았고, 2010년 7월 그는 2010 FIBA 월드챔피언십도 불참할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가 유로바스켓11에 참가해서 팀이 2012년 올림픽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울것을 선언했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노비츠키는 효과적인 프론트 코트 플레이어다. 상당 시간을 파워포워드 포지션에서 플레이한다. 그러나 또한 센터나 스몰포워드 포인트 포워드로 플레이 한적도 있다. 커리어동안 평균 23점과 8리바운드를 기록했고 꾸준한 더블더블을 기록해왔다. 노비츠키는 게임에서 베스트 슈터중 하나로 여겨진다. 88%의 자유투 성공률과 거의 50% 달하는 필드골 성공률과 거의 40%에 달하는 3점슛 성공률과 그는 또한 2006 NBA 올스타 3점 경연대회에서 우승했다. 2006-07시즌에 노비츠키는 오직 5명뿐인 NBA의 50-40-90 클럽의 멤버가 되었다.50은 필드골 50%를 40은 3점슛 40%를 90은 자유투 90%를 의미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필드골 시도조건은 충족해야한다. 그의 슈팅정확도에 7풋의 키가 합쳐지면서 상대 수비수에게 많은 숙제를 남겼다. 왜냐하면 그는 대부분의 선수들 위로 슛을 할 수 있기때문이다. NBA.com에서 그의 능력을 칭찬하고 있다; "이 7풋 포워드는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준다; 리바운드를 잡을때 속공을 할때 3점을 준비할때." 이 포워드의 주요 문제로 수비가 남아있다. 그는 평균적으로 1블락 이상을 기록하지만 한번도 all-defense 팀에 든적은 없다. 그러나 2005년 ESPN 기사에서 노비츠키는 역대 파워포워드중 10위에 랭크되었고 그의 "혁명적인" 외곽슛 능력은 극찬받았다. 노비츠키는 34번째로 2만득점을 기록한 선수고 댈러스의 역대 득점,리바운드,필드골시도, 3점슛, 3점시도, 자유투, 자유투시도의 압도적인 리더다. 그는 2006-07시즌 NBA MVP 이기도 하고 MVP 선정된 첫 번째 유럽선수이기도 하다. 2006 올스타게임 3점경연대회에서 우승했으며, 라 가제타 델라 스포츠에 의해 올해의 유럽농구선수에 5번 연속 선정되었으며 2002 FIBA 월드 챔피언십과 유로바스켓 2005에서 득점왕과 MVP를 수상했다.

개인생활[편집]

노비츠키의 누나는 디르크를 돈이나 명성에 굴하지 않는 의지의 사나이로 묘사한다. 그는 또한 독서와 색소폰 연주를 즐긴다. 노비츠키는 아비투어 시험을 뢴트겐 김나지움에서 패스했다. 그는 또한 디르크 노비츠키 재단을 설립했고, 이 재단은 아프리카 빈곤 퇴치를 목표로 한다. 노비츠키는 Sybille Gerer와 연애했는데 그녀는 그의 모클럽인 DJK 뷔르츠부르크의 농구선수다. 1992년부터 사귄 그들은 10년간 사귄후 헤어졌다.노비츠키는 말했다 "우리는 서로 각자의 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 사귀는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좋은 친구입니다." 그는 덧붙였다. "저는 확실히 가족을 꾸리고싶고 아이를 갖고싶어요. 그러나 제가 30이 되기이전에는 이것이 일어날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노비츠키는 그의 멘토 Holger Geschwinder와 끈끈한 사이임을 인정했다. 노비츠키는 그를 베스트 프렌드라 부른다. 전 팀메이트인 스티브 내시[2] 역시 그의 친한 친구이다. 내시는 노비츠키와 뛰던 시절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함께 새로운 클럽에 들어왔죠. 새로운 도시에 살게됐죠. 우리는 모두 혼자였고 외톨이였어요. 이것이 우리를 끈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나의 인생을 편하게 만들어줬어요. 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우정은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단단합니다." 노비츠키가 덧붙인다, "우리가 슈퍼마켓에서 만났다고 해도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됐을겁니다."

참조[편집]

  1. 전 시애틀 슈퍼소닉스 포워드
  2. 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소속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