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보도연맹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1949년 6월에 좌익계 인물들을 전향시켜 별도로 관리하려는 목적에서 조직되었던 대한민국의 단체로, 흔히 보도연맹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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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성립 배경
이 단체의 성립은 일제강점기시기 친일 전향단체 대화숙을 본떠서 만든것으로 1948년 12월부터 시행된 국가보안법과 관련이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제주 4·3 사건,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등 각종 사건의 수습 과정에서 전향자들을 체계적으로 보호, 관리, 감시할 기관이 필요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사상 검사로 유명하던 선우종원과 오제도가 결성 과정을 주도했다.[1]
초대 간사장은 민족주의민족전선의 조직부장 출신인 박우천이, 초대 회장은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공산주의 운동가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내려왔다가 전향한 정백이 맡았다. 1950년 초에 집계된 회원 수는 30만 명이 넘는다. 그러나 지나친 가입 독려탓에 좌익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반 농민들이 대다수 가입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최근에는 10대인 중ㆍ고교생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것이 밝혀짐에 따라 보도연맹 가입은 '공무원들의 실적주의'와 '반 강제적 가입'으로 인해 많이 생겨났음이 밝혀졌다.[2]
국민보도연맹원 가입은 지역마다 경찰서별로 할당된 숫자를 채우기 위해 무리해 가입시킨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면책의 약속과 달리, 일단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소집되어 기합이나 체벌을 받아가며 반공교육을 받아야 했다. 교육에 불참하거나 달아나면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입기 때문에 꼼짝없이 당해야만 했다.[3]
보도연맹에는 전향자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되어 있었으며, 활동 목표는 대한민국 정부를 절대 지지하고 북조선 정권을 절대 반대하며 공산주의 사상을 배격한다는 것이었다. 연맹원들은 지하의 좌익분자 색출과 자수 권유, 반공대회와 문화예술행사 개최를 통한 사상 운동 등 실천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다양한 반정부 세력을 간단히 박멸 대상인 좌익으로 몰 수 있게 되면서 이승만 정권의 권력 강화에 기여한 바가 컸다.
[편집] 학살 배경
이 부분의 본문은 보도연맹 사건입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들은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학살되어, 보도연맹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한국 전쟁 때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은 없지만, 최소 20만 명이 학살되었으리라는 추산이 나오고 있다.[4] 일부 우익단체가 가장 우려한 건 위장 전향 좌익세력들이 유사시에 보도연맹 조직을 이용해 반정부적 활동을 취하리라는 것이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보도연맹원의 대량학살엔 이런 우려가 적잖이 작용했는데,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보도연맹 고위간부로 지낸 정백을 들을 수 있다.[4][5] 그러나,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 중 실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관리들의 실적을 위해 문서에 기록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6]
학살은 주로 국군(육,해,공군)과 서북청년회(단)등의 극우 폭력단체의 의해 자행되었으며 간혹 미군 장교의 참관이 있었다. 도시 인근의 야산이나 바다 혹은 폐광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진행되었다. 학살 방법은 주로 총살형이었으며 이중에는 아이를 데리고 있는 아녀자(야밤에 갑자기 밖으로 모두 모이라는 지시에 아무런 준비없이)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일제 순사출신의 군,경 간부는 소지하고 있던 일본도를 이용하여 참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거제, 통영 지역에서 참수된 시체가 강한 조류를 타고 대마도 해안가로 떠밀려가 지역 신문에 기사가 난적도 있다.
전후 피해자 유가족을 중심으로 진상 조사 요구가 받아들여져 1960년대 국회의 '양민학살사건 조사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한정적이나마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5.16 군사정변(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은 이전의 조사 내용및 자료를 모두 소각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유가족 대표들을 국가 보안법으로 처벌하였다. 따라서 향후 학살 피해 유가족들은 시신을 수습하는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현재 보도연맹원 처형자들에 관해 미약하나마 발굴조사를 진행 중이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참고자료
- 김현기 (2006년 12월 1일). 국민보도연맹. 국가기록포털. 2008년 4월 18일에 확인.
[편집] 주석
- ↑ 강지웅 외 (2006년 9월 25일). 〈3. 헤어나지 못한 굴레, 레드 콤플렉스 - 잊혀진 대학살, 보도연맹 (이채훈)〉, 《우리들의 현대침묵사 - 한국현대사 미스터리 추적》. 서울: 해냄. ISBN 9788973377718
- ↑ 보도연맹사건 '10대도 학살' 공식 확인돼
- ↑ 박헌영 평전, p499
- ↑ 가 나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50쪽
- ↑ 한지희 《역사비평 제 35호,》 중 국민보도연맹의 조직과 학살,(역사비평, 1996년 겨울호) 302쪽
- ↑ 보도연맹 가입자가 무려 30만명 넘었는데, 이들 가운데 애꿏은 사람도 많았었다. 가족 중 월북자나 남로당원이 있다는 이유로 반강제로 가입한 경우도 많았으며, 평범한 농부들에게 고무신을 나눠주거나 비료를 주는 조건으로 가입도장을 받아가는 일이 비일비재 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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