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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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비행기에서 본 구룡성채

구룡성채, 또는 구룡채성(중국어 정체: 九龍寨城, 병음: Jiǔlóng zhài chéng 지울룽 자이 쳉[*], 광둥어: 九龍寨城 까울룽자이씽, 영어: Kowloon Walled City)은 영국령 홍콩 내에 존재했던 중화인민공화국 영토로, 실제로는 양쪽 모두의 주권이 미치지 못한 특수지역이었다. 복잡다단한 거대한 무허가 건축물로 이루어진 슬럼 도시로, 마굴, 무법지대 등으로 불리었다. 예전 구룡성채는 3헥타르였고, 1993년에 헐렸다.

역사[편집]

구룡채성[편집]

1898년 사진.

원래 이름은 “구룡채성”으로 그 역사는 송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상 방어의 거점으로 해적의 위협으로부터 지역 산물인 소금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기지로서 세워졌으며, 1810년에는 구룡성 포대가 되었다. 1842년 아편전쟁 이후 난징조약으로 홍콩 섬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자, 영국의 움직임을 감시하고자 했던 청나라의 주요 전략적 거점이 되었다. 1898년 영국과 신계 지역을 추가로 99년 동안 조차하여 사실상 홍콩권역으로 편입하는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단 구룡성채는 중국 관할 지역으로 남았으며, 당시 이 지역에는 약 700명이 살고 있었다. 중국은 구룡성채에 계속 군대와 행정관을 주둔시켜 주권을 행사하겠다고 했으므로, 영국의 행정권은 미치지 못했으나, 영국은 구실을 내세워 청나라의 행정관을 추방시켜 버린다. 구룡성채 관할권을 놓고 어느쪽도 확실한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형성과 철거[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후, 내전이 일어나면서 많은 중국인 난민들이 홍콩으로 밀려들어오게 되는데, 사실상의 주권 공백지대인 구룡성채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늘어난 인구만큼 콘크리트 건물이 우후죽순 증축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불과 0.03㎢의 면적에 최대 약 5만 명의 인구가 빽빽이 밀집하는 미로같은 고층 슬럼이 형성되었다. 이는 1㎢ 당 180만명의 인구밀도로 인류역사상 최대의 인구밀도를 기록했으며 이 기록은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었다. 1980년대 들어 홍콩의 중화인민공화국 반환이 임박해오자, 구룡성채를 둘러싸고 중영 양국의 신경전은 잦아 들었다. 이 무렵부터 홍콩 정부가 구룡성채 지역에 경찰 파견 및 행정권 등의 주권을 행사하기 시작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도 이를 묵인했으며, 1987년에 이 지역의 철거를 공식 발표, 주민과의 사이에 보상을 둘러싼 마찰이 발생했으나, 1993년에 완전 철거되었고, 현재는 구룡성채 공원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철거되기 직전 일본에서 건축학자들이 파견되었으며 일본의 건축학자들은 구룡성채의 설계도를 그려갔다. 건축학자들이 구룡성채의 설계도를 완전히 그리자 곧바로 철거가 실시되었다.

구조[편집]

본래 구룡성채는 2~3층 규모의 작은 단독주택들이 모여있는 곳이였으나 이곳이 주권 공백지대인 탓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었고 2~3층까지만 존재하던 원래 주택에 증축에 증축을 거듭하여 15층까지 쌓아올렸다. 이 때문에 옥상과 가장 외곽에 있는 주택을 제외한 모든 주택은 마치 고시원처럼 햇빛이 차단된 단칸 주거형태가 대부분이였다. 원래부터 15층 건물이 아닌 2층이였던 건물을 15층으로 증축한 건물들의 집합체였기 때문에 구룡성채는 건축학상 안전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때문에 위생 상태는 엉망이였으며 의사들 역시 무면허 의사들이 대부분이였다. 하지만 구룡성채의 중앙만은 쌓아올리지 않았는데 이곳에 구룡성채의 대형상점, 유치원, 양로원 등의 시설이 존재했다.

운영[편집]

정식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이지만, 구룡성채와 홍콩 사이의 통행이나, 이주는 자유로웠다. 홍콩 경찰이 개입하기 이전까지는 치안 유지를 위한 공권력이 없었으므로, 주민자치에 의해 자경단이 운영되었다. 구룡성채 주민은 중국이나 영국 어느 쪽에도 참정권은 없었으나, 사회복지 서비스 등은 홍콩 정부에 납세하는 방식으로 홍콩정부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대중문화 속의 이미지[편집]

같이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