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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화는 목숨을 건진 것을 기뻐하여 개훈에게 감사를 표하였으나, 개훈은 그를 만나주지 않고 전처럼 원한을 품으며 살았다.
소정화는 목숨을 건진 것을 기뻐하여 개훈에게 감사를 표하였으나, 개훈은 그를 만나주지 않고 전처럼 원한을 품으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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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 (후한)|광화]](光和) 7년([[184년]]), 황건적(黃巾賊)이 봉기하였다. 이에 전 무위태수인 주천(酒泉)<ref name=yj/> 사람 황준(黃雋)을 불러들였으나, 기일을 맞추지 못하였다. 이에 양곡은 황준을 상주하여 주살하려 하였는데, 개훈이 나서서 황준을 구해 주었다. 황준은 황금 스무 근을 개훈에게 주며 감사를 표했으나, 개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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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장 등이 그대로 금성(金城)<ref name=yj/>을 공격하여 군수<ref>郡守. 금성태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ref> 진의(陳懿)를 죽이니, 개훈은 좌창에게 금성을 구할 것을 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변장 등이 그대로 진군하여 좌창을 포위하였고, 좌창은 두려워하며 개훈을 불러들였다. 이때 개훈은 종사 신증(辛曾) · 공상(孔常)과 함께 아양에 주둔해 있었는데, 좌창의 격문을 본 신증 등은 출격하려 하지 않았으나 개훈이 화를 내자 두려워하며 그의 말을 따랐다. 개훈은 병사를 이끌고 좌창을 구하였으며, 변장 등을 책망하여 반역의 죄를 물었다. 반군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후 좌창은 돈을 착복한 일이 밝혀져 부풍(扶風)<ref name=sr>사례(司隷)의 속군.</ref> 사람 송효(宋梟)가 후임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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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석==

2011년 1월 29일 (토) 11:43 판

개훈(蓋勳, 140년 ~ 190년)은 후한 말의 정치가로, 자는 원고(元固)이며 양주(凉州) 돈황군(敦煌郡) 광지현(廣至縣) 사람이다.

생애

개훈의 가문은 대대로 2천 석을 받는 관직을 역임하였다. 증조부 개진(蓋進)은 한양태수(漢陽太守)를 지냈고, 조부 개표(蓋彪)는 대사농(大司農)을 지냈다.[1] 부친 개사제(蓋思齊)[2]는 관직이 안정속국도위(安定屬國都尉)에 이르렀다.[3]

개훈은 처음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한양장사(漢陽長史)가 되었다. 이때 무위태수(武威太守)가 권세를 부리며 횡령하였는데, 이에 종사(從事)인 무도(武都)[4] 사람 소정화(蘇正和)가 죄를 조사하여 처단하였다.

한편 양주자사(凉州刺史) 양곡(梁鵠)은 귀족과 외척들을 두려워하였는데, 이에 소정화를 죽여 그들의 원한을 사지 않으려고 하였다. 양곡은 이 일을 개훈과 의논하였다. 개훈은 본래 소정화와는 숙적 관계였는데, 어떤 이는 이를 기회 삼아 소정화에게 보복하면 어떻겠느냐고 권하였다. 이에 개훈이 말하였다.

안 된다. 선량한 자를 죽이려 하는 것은 충의가 아니며, 다른 사람의 위기를 틈타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개훈은 또한 양곡에게 간언하였다.

매를 기르는 것은 사냥을 시키기 위함이 아닙니까? 사냥이 끝났다고 매를 삶아 죽이는 것에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양곡은 개훈의 말을 옳게 여겨 소정화를 죽이지 않았다.

소정화는 목숨을 건진 것을 기뻐하여 개훈에게 감사를 표하였으나, 개훈은 그를 만나주지 않고 전처럼 원한을 품으며 살았다.

광화(光和) 7년(184년), 황건적(黃巾賊)이 봉기하였다. 이에 전 무위태수인 주천(酒泉)[4] 사람 황준(黃雋)을 불러들였으나, 기일을 맞추지 못하였다. 이에 양곡은 황준을 상주하여 주살하려 하였는데, 개훈이 나서서 황준을 구해 주었다. 황준은 황금 스무 근을 개훈에게 주며 감사를 표했으나, 개훈은

나는 당신의 죄가 팔의(八義 ; 8개조의 면책 사유)에 해당하기 때문에 구해 준 것이오. 어찌 내가 대가를 받겠소!

라고 말하며 받지 않았다.[1]

같은 해, 북지(北地)[4](羌)이 변장(邊章) 등과 함께 농우(隴右)를 침략하였다. 이때 자사 좌창(左昌)이 군세 동원을 틈타 수천만 전을 착복하였는데, 개훈이 간언하였다. 좌창은 노하여 개훈을 별동대로서 아양(阿陽)[5]에 주둔시켜 적의 예봉을 막도록 하였다. 본디 좌창은 군사에 관한 일로 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것이었으나, 개훈은 여러 차례 전공을 올렸다.

변장 등이 그대로 금성(金城)[4]을 공격하여 군수(郡守)[6] 진의(陳懿)를 죽이니, 개훈은 좌창에게 금성을 구할 것을 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변장 등이 그대로 진군하여 좌창을 포위하였고, 좌창은 두려워하며 개훈을 불러들였다. 이때 개훈은 종사 신증(辛曾) · 공상(孔常)과 함께 아양에 주둔해 있었는데, 좌창의 격문을 본 신증 등은 출격하려 하지 않았으나 개훈이 화를 내자 두려워하며 그의 말을 따랐다. 개훈은 병사를 이끌고 좌창을 구하였으며, 변장 등을 책망하여 반역의 죄를 물었다. 반군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후 좌창은 돈을 착복한 일이 밝혀져 부풍(扶風)[7] 사람 송효(宋梟)가 후임으로 왔다.

주석

  1. 《속한서(續漢書)》
  2. 사제(思齊)는 자이고, 이름은 알 수 없다.
  3. 사승(謝承), 《후한서(後漢書)》
  4. 양주의 속군.
  5. 천수군(天水郡)의 속현.
  6. 금성태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7. 사례(司隷)의 속군.

틀:삼국지 중요 등장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