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중국 성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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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 : [[전한]] 말기 주술을 사용하여 쿠테타을 일으켰으며, 고구려을 하구려올 부른 인물로 산동 왕씨이다.
*[[왕망]] : [[전한]] 말기 주술을 사용하여 쿠테타을 일으켰으며, 고구려을 하구려올 부른 인물로 산동 왕씨이다.
*[[왕필]](王弼) :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 사상가이다.
*[[왕필]](王弼) :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 사상가이다.
*[[왕희지]](王羲之, 307 ~ 365) : 중국 동진(東晉)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 307 ~ 365) : 중국 동진(東晉)의 서예가이다.
*[[왕건 (전촉)]] : 5대10국 [[전촉]](前蜀)의 개국자로 진경선(陳敬瑄), 전령자(田令孜)를 살해하고 전촉을 개국하였다. 전령자(田令孜)는 왕건의 양부이다.
*[[왕건 (전촉)]] : 5대10국 [[전촉]](前蜀)의 개국자로 진경선(陳敬瑄), 전령자(田令孜)를 살해하고 전촉을 개국하였다. 전령자(田令孜)는 왕건의 양부이다.
*[[왕건]] : 고려의 태조이다. 그는 [[궁예]]의 휘하 장군으로 있다가, 궁예을 몰아내고 왕이되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29명에 이르는 호족들과 결혼 동맹을 맺어 왕권을 유지하였고, 일부 김씨, 박씨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사성하였다. 수도을 개성으로 옮겼으며, 한식 성씨 사용을 장려하였다.
*[[왕건]] : 고려의 태조이다. 그는 [[궁예]]의 휘하 장군으로 있다가, 궁예을 몰아내고 왕이되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29명에 이르는 호족들과 결혼 동맹을 맺어 왕권을 유지하였고, 일부 김씨, 박씨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사성하였다. 수도을 개성으로 옮겼으며, 한식 성씨 사용을 장려하였다.

2010년 3월 22일 (월) 22:22 판

(王, Wang)씨는 중국에서 계출된 성씨로 중국 성씨 순위는 1위, 또는 2위로 나타나는 성씨이다. 중국 인구 통계는 표본 조사을 하기 때문에 순위가 많이 바뀌는데 왕씨는 1위로 나타난 경우가 이씨 보다 많아서 중화 1대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왕씨는 산시성에 위치한 태원 왕씨와, 제나라 전(田)씨에서 파생된 산동 왕씨, 계통이 불분명한 제남 왕씨, 소수 민족 왕씨, 근현대에 왕씨가 경우등이 있다. 인물로는 배우 왕조현, 야구선수 왕첸밍이 있다.

왕씨는 한국 성씨 순위는 82위로 2만명으로, 연원은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등에는 낙랑국에서 왕씨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낙랑계 왕씨들은 한나라가 낙랑군과 한사군을 평양 일대에 세우면서 낙랑군에 살게 된것으로 보이며, 왕산악이 중국의 칠현금을 거문고로 개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순리열전에 따르면 낙랑군과 한사군이 한무제 이전부터 존재하였다고 하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수 없다. 낙랑계 왕씨들은 중국 산동 왕씨계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며, 일부는 토착계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고대 한국 사회에서는 한식 성씨 사용이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토착계 왕씨의 존재 유무는 확증 할수 없다.

한국 왕씨는 고려을 세운 태조 왕건으로 상징되는데, 본래 왕씨였는지는 확계에서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고, 고려 초기 왕씨 왕족들은 당나라 숙종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고려 개국하는 시기에 왕건은 지방 호족의 지지을 얻기 위하여 28명의 호족 여성과 결혼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본래 김씨, 박씨였던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왕씨들은 고려 때 번성하였고, 사성 왕씨들도 생겨나게 되었지만, 조선이 건국되면서 조선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족들은 멸족하였으며, 사성 왕씨들은 본래 성으로 복성하게 하였다. 조선 정조는 남아있던 고려 왕족을 찿아내 본관을 개성으로 정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조 때 왕씨들은 대부분 중국계 왕씨였기 때문에, 현존 개성 왕씨의 정체성이 고려 왕족의 후손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역사 인물

  • 왕건(王建, 전국시대 제나라) : 전국시대 후기 제나라 마지막 왕으로, 제나라에서 강(姜)씨 왕족을 몰아내고 왕족이 된 전(田)씨계 공족으로 알려져 있다. 제나라 군주 왕건(王建)은 진나라 장군 왕분(王賁)의 공격으로 궤멸되었고, 일부 공족은 연나라에 도피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였다.
  • 왕전(王翦) :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 장군으로, 초나라을 섬멸하였다. 그의 아들 왕분(王賁)은 제나라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제나라 마지막 왕이었던 왕건(王建)의 일파는 연나라로 도망하였고, 이후 진(秦)나라가 연나라을 궤멸시키자, 제나라와 연나라의 공족들은 진(秦)나라의 압박을 피하여 요서, 요동으로 도망 갔다. 요서, 요동으로 유입된 연나라와 제나라 세력들은 천손, 신민 사상으로 단결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였는데, 진나라는 요서, 요동에 걸쳐 연나라와 제나라의 잔존 세력을 궤멸시켰으며, 한반도 평양까지 영토을 확대하였다. 이후 연나라와 제나라 잔존 세력은 만주와 한반도로 흩어지게 되었다.
  • 효경왕후 왕지(孝景皇后 王娡) : 한무제의 어머니로, 한경제의 후궁으로 들어와 왕후가 되기 위해 주술을 사용하였다. 왕지는 왕중(王仲)의 딸로 어머니는 장아(藏兒)이다. 장아(藏兒)는 한고조 유방이 공신숙청으로 몰락하였던 장도(藏茶)의 딸이다. 장(藏)씨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은 성이다.
  • 왕망 : 전한 말기 주술을 사용하여 쿠테타을 일으켰으며, 고구려을 하구려올 부른 인물로 산동 왕씨이다.
  • 왕필(王弼) :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 사상가이다.
  • 왕희지(王羲之, 307 ~ 365) : 중국 동진(東晉)의 서예가이다.
  • 왕건 (전촉) : 5대10국 전촉(前蜀)의 개국자로 진경선(陳敬瑄), 전령자(田令孜)를 살해하고 전촉을 개국하였다. 전령자(田令孜)는 왕건의 양부이다.
  • 왕건 : 고려의 태조이다. 그는 궁예의 휘하 장군으로 있다가, 궁예을 몰아내고 왕이되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29명에 이르는 호족들과 결혼 동맹을 맺어 왕권을 유지하였고, 일부 김씨, 박씨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사성하였다. 수도을 개성으로 옮겼으며, 한식 성씨 사용을 장려하였다.

개성 왕씨

개성 왕씨고려의 왕족으로 시조는 고려 왕건의 할아버지 의조 작제건이다. 의조 작제건 이전에는 성씨을 표시하지 않았지만 선계는 왕씨였다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사실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조선 초기 고려 왕족들은 사회 분위기메 맞추어 타성으로 개성하거나 자취을 감추었고 왕씨 본관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조선 정조는 일부 고려 왕족들을 찿아내서, 왕원을 1세조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본관으로 정해주었다. 고려 왕족들은 당대에 본관을 따로 두지 않았으므로, 상식과는 달리 개성 왕씨는 고려 개국 전에 시작된것이 아니고 정조 때 만들어진 본관이다. 고려 왕조는 스스로를 당나라 왕족의 후예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한국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개성 왕씨의 인구수는 2000년 기준 6,148가구 19,808명이다.

제남 왕씨

제남 왕씨(濟南王氏, 왕이문, 왕봉강)의 시조는 중국 산동성 제남(濟南) 출신 왕이문(王以文)이다. 그는 중국 산동성 지난의 장추현[章丘縣]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봉강(鳳崗), 자는 기양(岐陽)으로 후에 효종이 이문(以文)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고조부는 태학사를 지낸 왕훈(王訓), 증조부는 병부상서를 지낸 왕취화(王翠華), 조부는 산시성 순무안찰사도어사를 지낸 왕집(王楫), 아버지는 좌춘방태학사 겸 이부시랑을 지낸 왕충추(王忠推)이다. 왕이문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 때인 1636년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청나라의 침공으로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고 섬으로 피난하였다가 그곳에서 청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어 선양(瀋陽)으로 압송되었다. 당시 선양에 볼모로 잡혀와 있던 봉림대군과 교분을 맺고, 1645년(인조 23년) 봉림대군 일행이 귀환할 때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이때 왕봉강과 함께 왕문상(王文祥), 풍삼사(馮三仕), 황공(黃功), 정선갑(鄭先甲), 배삼생(裵三生), 양복길(楊福吉), 왕미승(王美承), 유계산(柳溪山)등 모두 9명의 명나라 사람이 조선으로 망명하였는데, 이들을 '9의사(九義士)'라 칭한다. 제남 왕씨의 인구수는 2000년 기준 244가구 779명이다.

제남 왕씨(濟南王氏, 왕유)의 시조는 왕유(王儒)이다. 그는 처음에 박씨(朴氏)였는데, 태봉국(泰封國) 궁예(弓裔) 휘하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 궁예의 횡포가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건국하자 등용되어 공을 세워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왕씨(王氏)로 사성받았다. 왕유(王儒)가 본래 박씨였다고 전하지만, 제남은 중국의 지명이기 때문에 본래 왕씨였을 개연성도 있다.

강릉 왕씨

강릉 왕씨(왕유)의 시조는 고려 태조 왕건의 아들 왕유(王裕)이다. 조선 개국과 함께 고려 왕족 계통의 왕씨들은 타성으로 개성하거나 자취을 감추었다. 이후 조선 정조는 고려 왕족의 후손들을 찿아내서 왕씨로 복성시키고, 본관을 개성으로 정해주었는데, 이때 부터 고려 왕씨들은 개성 왕씨로 단일화 되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강릉 왕씨 가운데 왕유의 후손의 유무는, 세보의 실전으로 알수 없다.

강릉 왕씨(김예, 왕예)의 시조는 김주원의 6대손 김선희(金善希)의 아들 김예(金乂), 또는 왕예(王乂, 김주원의 7대손)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김예(金乂)의 딸을 비로 맞고 김예(金乂)에게 왕씨 성을 사성하였다. 강릉 왕씨는 고려 개국과 함께 시작된 성본으로 500년 동안 번성하다가, 조선 초기 왕예(王乂)의 13세손 탄지(坦之)대에 김씨로 복성 하였는데, 이때 대부분의 김주원 계통의 왕씨 후손들도 김씨로 복성하였지만, 강릉 왕씨을 본관으로 하는 후손들이 존재하므로 김주원 계통의 강릉 왕씨는 현재 존재하는 성본이다. 본래 강릉 왕씨는 김주원 계통의 강릉 왕씨을 지칭하는 성본으로, 고려 시대 후손들이 다양한 곳에 세거하면서 번성하였고, 조선 개국의 정치적 변화에도 피해을 입지 않아, 현재 존재하는 강릉 왕씨는 대부분 김주원 계통의 강릉 왕씨일 가능성이 많은데, 정확한 사실관계는 세보의 실전으로 알수 없다.

강릉 왕씨(김순식, 왕순식)의 시조는 강원도 명주의 호족 김순식(金順式), 또는 왕순식(王順式)으로, 김순식은 고려초 왕건에게 왕씨 성을 사성 받았다. 평창군고기에는 김순식을 신라 명주군왕 김주원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조선 초기 본성이 왕씨가 아니었던 성본은 본래 성으로 복성하므로, 현존하는 강릉 왕씨 가운데 왕순식의 후손의 유무는, 세보의 실전으로 알수 없다.

해주 왕씨

해주 왕씨의 시조 왕유(王儒)는 중국 산동성 출신으로 고려조에 귀화하여 태조 때 사성되었고 황해도 해주(海州)를 본관으로 하였다. 인구수는 2000년 기준 146가구 498명이다.

이령 왕씨

이령 왕씨의 본관은 황해도 이령으로 인접한 해주 왕씨의 분파로 추정되지만, 실제 연원은 알수없다. 인구수는 2000년 기준 78가수 262명이다.

대전 왕씨

시조와 유래는 미상이다. 인구수는 85가구 237명이다.

거제 왕씨

조선 초기 고려 왕족들의 일부는 거제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참수되었다. 현존 하는 거제 왕씨들은 당시에 도피한 사람들의 후손이거나, 타성으로 개성했다가 정조 이후 본성으로 복성한 경우로 추정할수 있지만, 세보로써 고증할수는 없다. 인구수는 2000년 기준 56가구 198명이다.

산동 왕씨

산동 왕씨의 본관은 중국 산동성으로 시조와 유래는 알수 없다. 인구수는 2000년 기준 3가구 13명이다.

송도 왕씨

송도 왕씨는 인천 송도의 차이나타운(Chinatown)에 거주하는 화교, 또는 화교에서 귀화한 한국인의 본관이다. 인구수는 2000년 기준 2가구 5명이다.

화북 왕씨

화북 왕씨의 본관은 중국 화북 지역으로 시조와 유래는 미상이다. 인구수는 2000년 기준 1가구 1명이다.

본관 미상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본관을 알수 없는 왕씨들은 17가구 76명으로 나타났다.

기타 본관

2000년 인구조사에 기타 본관으로 분류돤 왕씨들은 9가구 26명으로 나타났다.

관련 기록

고대 기록
  • 왕광(王光) : 평양 정백리 127호분 귀틀무덤의 주인, 낙랑태수연왕광지인(樂浪太守연王光之印)이란 인장 출토, 추정한 연대는 기원전 1세기 전반
  • 왕근(王根) : 평양 석암리 219호분 귀틀무덤의 주인, 왕근신인(王根信印)이란 인장 출토, 출토 유물로 추정한 연대는 기원전 1세기 후반
  • 왕경(王景) : 후한서 순리열전 왕경전에는 왕경(王景), 그의 8대조 왕중(王仲), 왕경의 아버지 왕굉, 반란자 왕조(王調), 광무제가 반란을 일으킨 왕조를 토벌하러 낙랑태수로 파견한 왕준(王遵)등이 등장한다. 왕경전에 따르면 왕경(낙랑군 한인)의 8대조 왕중은 본래 낭야불기인(산동지역, 낭야군 불기현)이며 제북왕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는것을 꺼려하여 해동의 낙랑산중으로 옮겨 일가를 이루어 살았는데 서기 25년 왕조가 군수 유헌을 죽이고 스스로 낙랑태수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광무제는 30년 왕준을 낙랑태수로 삼아 왕조를 토벌하러 보내니 왕경의 아버지 왕굉이 양읍과 더불어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아들였다고 한다.
  • 왕우(王旴) : 평양 석암리 205호분 귀틀무덤의 주인, 오관연왕우지인(五官연王旴之印)이란 인장 출토, 건무(建武) 21년(45), 건무 28년(52), 영평(永平) 12년(69)등의 기년명 칠기출토, 추정 연대 1세기 후반
  • 왕경(王卿) : 황해도 신천군 봉황리 전축분의 주인, 무덤주인의 이름(왕경)과 직위(대방군 장잠현의 수장) 무덤축조년대(정시구년 248)가 새겨진 명전출토, 수장잠장왕군군휘경(守長岑長王君君諱卿), 연칠십삼자덕언동래황인야(年七十三字德彦東萊黃人也), 정시구년(248)삼월입일벽사왕경조(正始九年三月卄日壁師王卿造), 추정 연대 3세기 전반
  • 왕장(王長) : 황해도 신천군 서호리 청산리토성지역에서 발견된 명전, 태강사년(283)삼월소명왕장조 (太康四年三月昭明王長造) 대방군 소명현의 수장으로 보여짐. 3세기 후반
  • 왕준(王遵) : 요동의 장통과 낙랑의 왕준(王遵)이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낙랑의 1000여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하니 모용외가 새로 낙랑군을 두어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은 군사로 삼았다.(자치통감) 이 시점에서 한반도에서 낙랑군은 사라졌다.
  • 왕정(王禎) 515년(북위(北魏) 선무제(宣武帝) 연창(延昌) 4년), 군의 휘는 정(禎)이요, 자는 종경(宗慶)이며, 낙랑(樂浪) 수성인(遂城人)
  • 왕기(王基) 523년(북위(北魏) 효명제(孝明帝) 정광(正光) 4년), 군의 휘는 기(基)이고, 자는 홍업(洪業)이며, 낙랑(樂浪) 수성인(遂城人)
조선 기록
  • .태조 5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4월 15일(갑신) 1번째기사
    • 윤방경(尹邦慶), 오몽을(吳蒙乙)이 왕씨(王氏)를 강화 나루에 던졌다.
  • 태조 5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4월 17일(병술) 3번째기사
    • 정남진(鄭南晉), 함부림(咸傅霖)이 삼척(三陟)에 이르러 공양군(恭讓君)과 두 아들을 참수하였다.
  • 태조 5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4월 20일(기축) 1번째기사
    • 손흥종(孫興宗), 심효생(沈孝生)이 왕씨(王氏)를 거제 바다에 던졌다.
  • 태조 5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4월 20일(기축) 2번째기사
    •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고려 왕씨(王氏)의 남은 자손을 수색하여 참수하였다.
  • 태조 5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4월 26일(을미) 1번째기사
    • 고려 왕조에서 왕씨(王氏)로 사성(賜姓)이 된 사람에게는 모두 본성(本姓)을 따르게 하고, 이외 왕씨의 성을 가진 사람은 비록 고려 왕조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또한 어머니의 성(姓)을 따르게 하였다.
  • 왕우(王瑀, 공민왕의 동생)의 삼부자(三父子)는 선조(先祖)를 봉사(奉祀)하는 이유로써 특별히 사유(赦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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