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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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숙'''(梁山璹, [[1561년]] ~ [[1593년]])은 [[조선]]의 의병장, 문신이다. 본관은 [[제주 양씨|제주]](濟州). 자는 회원(會元)이다. 기묘명현 [[양팽손]]의 손자이며, 대사성 [[양응정]]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여 공로 좌랑(工曹佐郞)을 지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nb_12606001_013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13번째기사]</ref>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출처 필요|날짜=2012-11-24}}
'''양산숙'''(梁山璹, [[1561년]] ~ [[1593년]])은 [[조선]] 중기의 의병장이다. 공로 좌랑을 지내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일생을 벼슬하지 않고 지냈다.


== 생애 ==
본관은 [[제주]], 자는 회원, 시호는 충민으로 기묘명현 [[양팽손]]의 후손이며 대사성 [[양응정]]의 아들이었다.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업했으며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경서에만 전심했다.
우계 [[성혼]]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발발 후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의 부하로 들어갔다. 김천일과 함께 북상해 [[수원]]에서 활약하고 [[강화]]로 이전할 무렵, [[곽현]]과 함께 [[조선 선조|선조]]에게 영남과 호남의 전세를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 공으로 공조좌랑에 제수되었고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 끝까지 싸우다가 김천일과 함께 [[남강 (경상도)|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후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의 부하로 들어갔다. 김천일과 함께 북상해 [[수원]]에서 활약하고 [[강화]]로 이전할 무렵, [[곽현]]과 함께 [[조선 선조|선조]]에게 영남과 호남의 전세를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 공으로 1592년(선조 25년)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7020_008 선조실록 28권, 선조 25년 7월 20일 정축 8번째기사]</ref>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 끝까지 싸우다가 [[김천일]]과 함께 [[남강 (경상도)|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사후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나주]] [[정렬사]]와 [[진주]] [[창렬사]]에 제향되었다.


== 관련 항목 ==
== 사후 ==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나주]] [[정렬사]]와 [[진주]] [[창렬사]]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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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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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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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일]]
* [[고경명]]
* [[최경회]]
* [[김집 (1574년)|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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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제주특별자치도 출신]]

2021년 10월 12일 (화) 17:34 판

양산숙(梁山璹, 1561년 ~ 1593년)은 조선의 의병장, 문신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회원(會元)이다. 기묘명현 양팽손의 손자이며, 대사성 양응정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여 공로 좌랑(工曹佐郞)을 지냈다.[1]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생애

우계 성혼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발발 후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의 부하로 들어갔다. 김천일과 함께 북상해 수원에서 활약하고 강화로 이전할 무렵, 곽현과 함께 선조에게 영남과 호남의 전세를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 공으로 1592년(선조 25년)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었다.[2]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 끝까지 싸우다가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사후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나주 정렬사진주 창렬사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