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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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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문제|양견(楊堅)]]이 북주의 [[북주 정제|정제(靜帝)]]로부터 선양받아 연호를 개황(开皇)으로 고치고 [[수나라|수(隋)]]를 건국하자 우문술은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에 임명되었고 588년(개황 8년)에는 행군총관(行軍總管)이 되어 589년(개황 9년)에는 강을 넘어 [[남조|남조(南朝)]]의 [[진 (남조)|진(陳)]]을 정벌할때 우문술은 석두성(石頭城)을 점령한 뒤 삼오(三吳 : 오군(吳郡)·오흥(吳興)·회계(會稽))을 평정하였다.
[[수 문제|양견(楊堅)]]이 북주의 [[북주 정제|정제(靜帝)]]로부터 선양받아 연호를 개황(开皇)으로 고치고 [[수나라|수(隋)]]를 건국하자 우문술은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에 임명되었고 588년(개황 8년)에는 행군총관(行軍總管)이 되어 589년(개황 9년)에는 강을 넘어 [[남조|남조(南朝)]]의 [[진 (남조)|진(陳)]]을 정벌할때 우문술은 석두성(石頭城)을 점령한 뒤 삼오(三吳 : 오군(吳郡)·오흥(吳興)·회계(會稽))을 평정하였다.


진을 정벌한 공으로 안주총관(安州總管)이 되는데 이때 이때 진왕(晉王) [[수 양제|양광(楊廣)]]은 양주에 주둔하게 되자 우문술이 자신을 위해 양보하자 양광은 우문술을 수주총관(壽州總管)에 임명할것을 주청함으로써 두 사람은 가까워지게 되었다.
진을 정벌한 공으로 안주총관(安州總管)이 되었다 진왕(晉王) [[수 양제|양광(楊廣)]]은 양주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우문술이 자신을 위해 양보하자 양광은 우문술을 수주총관(壽州總管)에 임명할것을 주청함으로써 두 사람은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후 우문술은 양광이 태자에 책봉되는것을 돕기위해 장안에 있는 [[양소 (544년)|양소(杨素)]]의 동생 양약(杨约)을 찾아가 뇌물을 주어 측근으로 끌어들이고 양소와 함께 양광에게 [[문헌황후|독고황후(独孤皇后)]] 앞에서는 바른 말과 행동을 보일것을 간언하였다.
이후 우문술은 양광이 태자에 책봉되는것을 돕기위해 장안에 있는 [[양소 (544년)|양소(杨素)]]의 동생 양약(杨约)을 찾아가 뇌물을 주어 측근으로 끌어들이고 양소와 함께 양광에게 [[문헌황후|독고황후(独孤皇后)]] 앞에서는 바른 말과 행동을 보일것을 간언하였다.

2019년 11월 3일 (일) 13:07 판

우문 술(宇文述, 546년 - 616년)은 중국 수나라의 장군이다.자는 백통(伯通).

생애

북주에서의 생애

본래 선비족 출신으로 대군(代郡) 무천(武川) 사람이며 조상의 성은 파야두(破野頭)인데 선비족 대인 우문일두귀(宇文逸豆歸)의 노복이었다가 주인의 성을 따라 우문씨(宇文氏)로 고쳤다.부친은 우문성(宇文盛)으로 전공을 세워 상주국(上柱國)에 이르렀다.

우문술(宇文述)은 작지만 날래고 민첩했으며 기마와 궁술에 능했다. 또 공손하고 삼갈줄 알며 침밀(沈密)하였다. 북주 말기에 위효관(韋孝寬) 휘하에서 울지형(尉迟迥),울지돈(尉迟惇)의 반란을 토벌하고 군공을 세워 상주국(上柱國) 포국공(褒國公)에 봉해지고 비단 3천필을 하사받았다.

수 문제 치세의 생애

양견(楊堅)이 북주의 정제(靜帝)로부터 선양받아 연호를 개황(开皇)으로 고치고 수(隋)를 건국하자 우문술은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에 임명되었고 588년(개황 8년)에는 행군총관(行軍總管)이 되어 589년(개황 9년)에는 강을 넘어 남조(南朝)진(陳)을 정벌할때 우문술은 석두성(石頭城)을 점령한 뒤 삼오(三吳 : 오군(吳郡)·오흥(吳興)·회계(會稽))을 평정하였다.

진을 정벌한 공으로 안주총관(安州總管)이 되었다 진왕(晉王) 양광(楊廣)은 양주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우문술이 자신을 위해 양보하자 양광은 우문술을 수주총관(壽州總管)에 임명할것을 주청함으로써 두 사람은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후 우문술은 양광이 태자에 책봉되는것을 돕기위해 장안에 있는 양소(杨素)의 동생 양약(杨约)을 찾아가 뇌물을 주어 측근으로 끌어들이고 양소와 함께 양광에게 독고황후(独孤皇后) 앞에서는 바른 말과 행동을 보일것을 간언하였다.

수 양제 치세의 생애

양광이 즉위하자 우문술은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허국공(許國公)에 봉해지고 우문술의 장남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는 태복소경(太僕少卿)에 제수되었다.

양광은 우문술을 총애하여 그가 낸 계책은 경청하여 따랐고 그로 인해 우문술의 권세는 조정을 뒤흔들정도가 되자 성품이 탐욕스럽고 비루해졌으며 평소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 뇌물을 바치니 그의 집에는 재화가 넘쳐나고 노복은 1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612년(대업 8년) 양광이 고구려를 정벌하려하자 우문술은 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었으며 우중문(于仲文)과 함께 별동대 30만명을 거느리고 살수를 넘어 평양으로 향하던 중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乙支文德)의 계책에 빠져 수나라군은 크게무너져 2700명 만이 요서로 간신히 도망하여 돌아왔다.

진노한 양광은 차마 우문술을 죽이지 못하고 그해 11월 우문술을 파직하고 서민으로 강등하였다가 613년(대업 9년) 다시 우문술을 불러들여 고구려를 재차 정벌하려하였다.

이때 여양(黎阳)에서 양현감(杨玄感)이 수나라에 반기를 들어 거병하자 양광이 크게 놀라 6월 28일 밤중에 밀명을 내려 급하게 철군하며 우문술에게 명을 내려 군을 거느리고 하양(河阳)의 양현감을 토벌하게 하여 크게 깨뜨렸다.

그 공으로 우문술은 포목 수천 필을 하사받았으며 614년(대업 10년) 2월 20일 양광은 다시 조칙을 내려 세번째 고구려 원정을 떠나면서 우문술에게 명을받들어 원정에 참여하게 하니 우문술은 회원(怀远)에서 합류하였다.

616년(대업 12년) 7월 강도(江都)에서 용주(龍舟 : 단오절에 용머리 장식을 단채 경조하는 배)를 새로 만들때 우문술은 양광을 따라 강도로 들어와 머무르게 되었는데 얼마지나지않아 우문술은 병에 걸려 몸져눕게되었다.

이에 양광은 위씨(魏氏)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우문술을 살피게하였는데 우문술은 죽음에 이르자 양광에게 두 아들 우문화급,우문지급(宇文智及)을 보살펴줄것을 간절히 청하였다.

우문술의 부탁에 양광은 눈물을 흘리며 "경의 부탁을 어찌 듣지않겠소" 하였다. 같은 해 10월 초육(初六 : 초엿샛날) 우문술이 생을 마감하니 사도(司徒) , 상서령(尙書令)과 10개 군의 태수를 추증하고 시호를 " 공(恭) " 이라 하였다. 우문화급,우문지급 외에 아들 우문사급(宇文士及)이 있었다.

가족관계

아버지 - 우문성(宇文盛)

본인 - 우문술(宇文述)

장남 - 우문화급(宇文化及)

차남 - 우문지급(宇文智及)

삼남 - 우문사급(宇文士及)

참고문헌

《수서(隋書) 우문술 열전(宇文述 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