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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일 (목) 21:55 판

윤석중
尹石重
작가 정보
출생1911년 5월 25일(1911-05-25)
일제강점기 일제 강점기 경성부
사망2003년 12월 9일(2003-12-09)(92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대한민국 대한민국
직업아동문학가, 동화작가, 시인
학력경성 양정고등보통학교 명예 졸업
일본 조치 대학교 신문학과 학사 졸업
종교천주교 (세례명: 요한)
필명호(號)는 석동(石童)
활동기간1924년 ~ 2003년
장르아동문학
동화
음악평론
동시
시문학
영화제작
작사
배우자박용실
자녀슬하 3남 1녀
친지윤양중(이복 아우)
윤영모(이복 아우)
윤경모(이복 아우)

윤석중(尹石重, 1911년 5월 25일 ~ 2003년 12월 9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작가, 아동문학가로, 호는 석동(石童)이다.

그는 양정고보를 거쳐 1942년도쿄 조치 대학(上智大學) 신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24년 《신소년》에 동요 〈봄〉, 1925년 잡지 《어린이》에 동요 〈오뚜기〉가 당선된 뒤 많은 동요를 발표하였다.

생애

서울에서 태어났다.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재학하였으나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 운동이 발발하고, 이에 동참하지 못하고 졸업장을 받는 게 양심의 가책이 되어 <중외일보>에 '자퇴생의 수기'를 투고한 후 졸업을 며칠 앞두고 자퇴를 한다. 1930년 가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지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귀국을 하게 된다. 이후 1942년 일본 조치 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잡지 어린이에 그의 동요 〈오뚜기〉가 당선된 뒤 많은 동요가사를 창작, 발표하였다.

1933년, 방정환의 뒤를 이어 《어린이》 주간으로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그 후 《소년중앙》·《소년》·《소학생》의 주간을 지냈으며 1955년 조선일보 편집 고문을 지냈다. 1956년 새싹회 회장에 선출되고, 1961년 3·1 문화상 예술 부문 본상과 1966년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70년 어린이 회관 고문이 되는 등 아동들을 위한 많은 공헌을 하였다. 저서로 《윤석중 동요집》,《초생달》, 《굴렁쇠》, 《어린이를 위한 윤석중 시집》 등이 있다.

1956년 새싹회 동요집 엄마손 등을 비롯하여 윤석중 동요집, 잃어버린 댕기 등 30여 편에 이른다.

2003년 12월 9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학력

상훈

  • 1961년 3·1 문화상 수상
  • 1965년 ‘고마우신 선생님’으로 추대[1]
  • 1966년 문화 훈장 수여
  • 1973년 외솔상 수상
  • 1978년 막사이사이상 수상[2]

각주

  1. 세 번째『고마우신 선생님』=윤석중 선생님 뽑아, 《동아일보》, 1965.3.27.
  2. 인터뷰 막사이사이賞수상 尹石重씨, 《동아일보》, 1978.8.4.

참고 자료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깥 고리

전임
(초대)
초대 방송위원회 위원장
1981년 3월 30일 ~ 1982년 3월 18일
후임
윤석중
전임
윤석중
제2대 방송위원회 위원장
1982년 3월 19일 ~ 1984년 4월 24일
후임
정희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