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수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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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정보 | ||||||
출생일 | ? | |||||
사망일 | 1979년 1월 6일 |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 관악구 동작동[1] | |||||
포지션 | 레프트백 | |||||
청소년 구단 기록 | ||||||
??? | 배재고등보통학교[2] | |||||
대학팀 기록 | ||||||
연도 | 팀 | 출전 | (득점) | |||
??? | 연희전문학교[2] | |||||
구단 기록* | ||||||
연도 | 구단 | 출전 | (득점) | |||
1933–??? | 경성 축구단[3] | |||||
국가대표팀 기록 | ||||||
1935–1939 | 조선 | 0 | (0) | |||
1940 | 일본 | 0 | (0) | |||
행정가 기록 | ||||||
1939 | 조선축구협회 (기술지도위원)[4] | |||||
*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 |
정용수(? ~ 1979년 1월 6일, 鄭龍洙[1])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축구 선수로 포지션은 수비수였으며, 경성 축구단의 창립 맴버로 입단하였다.[2]
생애
[편집]축구 외에도 야구와 정구, 탁구 선수로도 활동했으며, 탁구의 경우 관서체육대회에서 일등을 기록하기도 했다.[2][5][6]그 외에도 축구 심판 등의 일제강점기 당시 스포츠계에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특히 경성 축구단 입단 및 조선 축구 대표팀 선발 등 축구계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면서 조선 축구 대표팀의 메이지 신궁 경기 대회 등 일본 본토에서 열린 대회 우승에 기여했다. 이후 이러한 활약 덕분에 일본 잡지에도 경기에서의 모습이 실렸으며 일본 대표팀에도 선발되었다.[7][2][8][1]
독립 이후에는 재일교포들을 대상으로 한 스포츠 단체의 단장직을 맡아 축구, 자전거, 탁구 등의 여러 스포츠를 진행했다.[9]
이후 대한테니스협회 부회장직과 연서대OB축구 명예회장직을 맡으며 스포츠계에서 활동을 이어갔으며, 1979년 1월 6일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1]
각주
[편집]- ↑ 가 나 다 라 “원로 체육인 정용수씨”. 조선일보. 1971년 10월 31일.
- ↑ 가 나 다 라 마 “일류선수 망라하여 경성축구단 창립”. 동아일보. 1933년 5월 13일.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다"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 ↑ “제삼회경평 대항축구 입일부터 삼일간”. 동아일보. 1933년 3월 21일.
- ↑ “축협부서결정”. 동아일보. 1939년 3월 15일.
- ↑ “정구리그사일 보성배재득승”. 조선일보. 1927년 6월 19일.
- ↑ “관서탁구대회 일등은 정용수군”. 동아일보. 1928년 11월 6일.
- ↑ “중등축구리그전의패 네번째 경신진두에”. 동아일보. 1936년 6월 14일.
- ↑ 류청 외 7명 (2016년 11월 28일). “경성축구단, 일제강점기 일왕배를 제패하다”. storyfunding. 2016년 11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3년 7월 15일에 확인함.
- ↑ “재일교포체육단귀국”. 조선일보. 1957년 1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