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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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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현
安聖鉉
기본 정보
출생1920년 7월 13일(1920-07-13)
일제 강점기 조선 전라남도 나주 남평면 대교리
사망2006년 4월 25일(2006-04-25)(85세)
성별남성
국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직업성악가작곡가
장르서양 고전 음악(테너)
활동 시기1941년 ~ 2006년
악기오르간
배우자성동월(재혼)
가족자녀는 2남 2녀
아버지는 안기옥(安基玉, 1894~1974)
웹사이트안성현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안성현(安聖鉉, 1920년 7월 13일(1920-07-13)~2006년 4월 25일(2006-04-25))은 일제강점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테너 성악가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고, 음악 교육인이었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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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나주(남평면 대교리)에서 출생하여 1936년 2월 이후부터 열 달 남짓 동안을 강원도 철원(갈말면 강포리)에서 자랐으며 1936년 12월 이후부터 함경남도 함흥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여 도호 음악대학(東邦音楽学校)에서 테너 성악을 전공했다. 귀국한 뒤에는 전라남도 지역에서 음악 교사로 근무하며 작곡가로 활동했다.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동요 〈엄마야 누나야〉가 유명하며, 목포의 항도여자중학교(목포여자고등학교의 전신)에서 교사로 근무할 때인 1948년에 동료 교사 박기동이 작사하고 안성현이 작곡한 〈부용산(芙蓉山)〉도 널리 불린다. 이 노래는 박기동이 병으로 죽은 누이동생을 그리며 가사를 쓴 곡으로 가락도 서정적이지만, 구전을 통해 널리 퍼지면서 호남 지역 조선인민유격대 대원들의 애창곡이 되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

한국 전쟁 중 월북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주요 작곡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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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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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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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용산(芙蓉山)〉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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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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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조부 : 안광묵(安光默)
    • 증조부 : 안서현
      • 조부 : 안영길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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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뉴스》 (2006.5.27) "'엄마야 누나야' 작곡가 안성현 사망" 〈北문학신문〉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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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安龍承(안용승) (2) 안기옥 ----별도의 인터넷 조회기록은 부친이 安龍承(안용승) 돌림자로 치면 맞음. 이중기록 거짓말 기록은 허위정보입니다. 가야금 산조의 명인 안기옥선생이 안성현의 부친인지 정확한 기록을 증명하시기 바랍니다.
  2. 제주에 살고 계신 학생분은 안기옥 안성현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으면 합니다. 필자가 보는 안성현家 의 친족인 안막과 최승의 안국선(조선총독부 청도군수) 친족이 틀림없습니다. 安光默(고조부)故人도 예술가란 전남 나주지방에서 나온 글이 있습니다만 필자가 보기엔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안막과 안성현씨의 나이가 1살 차이나는 친구같은 친족인데 안막이 아버지뻘 작은집 숙부꼴입니다. 일본 유학을 동시대에 함께 했지요! 분명한 사실은 좌파 사회주의 思想이 없었다면 어찌 월북했나요? 필자는 이미 지워진 글에서 너무나 정확히 진단했습니다. 아마 안성현 종손집에도 이미 1900년 5월 28일 죽산안씨 현감공파 거물정치인 안경수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후, 이미 갑오경장 시기에 없어진 연좌제가 부활하여 실시됐고 삼족이 거의 멸족한 멸문지화 피해당한 집안입니다. 족보책 없을 겁니다. 아무리 창피해도 비겁하면 안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정확한 역사의 기록을 남겨야 됩니다. 아무리 나에게 이익이 안되고 오히려 손해가 되고 가문의 명예에 오히려 손상이 된다고 지우면 안됩니다. 역사란 다만 표면만을 기록한다지만 밑 저변에 함께 묻어가는 실상을 기록에 남겨야 됩니다. 추정하건데 아마 안성현가의 족보는 이미 선대에서 큰 변을 당한후 폐기됐거나 없어졌거나 변질됐으며 죽산안씨 대족보와 현감공파와 다수의 족보기록엔 뿌리가 끊겨진 기록들이 타 성씨들에 비하여 군데 군데 많습니다.경기도 안성시 관련해서 문화관광부서 책임자의 글에 의하면 안광묵(光逸)씨는 본가 본처의 아들이 4명이고 혼외자 첩이난 아들이 안경수였습니다. 즉 아들이 5명이란 말씀입니다. 현감공파보엔 독자로 나옵니다. 뿌리가 끊기고 종손 종가집이 사라진 겁니다. 구한말 특히 대한제국기 거쳐오면서 상놈출신들은 족보가 없습니다. 훗날 1970년대 초반까지고 돈많이 벌고 사업성공하여 뼈대있는 집안으로 장가들기 위해서 남의 집안의 족보에 끼워넣는 행위들도 종종있었습니다. 정치관료출신 집안의 족보는 변경된 예가 비일비재 합니다. 천민출신이 성공해서 남의 집안 족보에 올리는 일 말입니다. 安聖鉉 음악가와 父親 安基玉이다 安龍承이다. 후자가 더 맞는다고 항렬상 맞습니다. 가야금명인 안기옥은 북한의 김일성이 세운 평양음악대학에서 교수직 일하면서 살았다가 남도판소리를 혁명적차원으로 창법을 고치라는 김일성의 명령에 비판도 했다는 글이 전해집니다. 안성현의 고조부 안광묵(安光默)에 관한 정확한 인적사항의 기재를 요망하며 무슨일을 했던 사람인가요? 필자의 고조부가 바로 동명인 安光默이고 동생댁 작은할아버님이 安吉默입니다. 청풍부사, 친일정치인 김홍집총리대신 비서였던 書章官(정4품 비서관)현감출신이었습니다. 친일적 정치인과 친일파란 말에 확실한 구분이 있어야죠 안막 최승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올랐던 인물입니다. 필자 집안의 고종사촌형 詩人 김수영의 아래 두 동생 이름이 김수강, 김수경입니다. 안성현처럼 한국전쟁당시 월북했고 김수영도 인민군에 징집되어 거제도포로수용소 생활도 했던 좌파사상가였습니다. 서울태생 토박이임에도 북한 평안도사투리 또는 함경도사투리도 일부러 사용했습니다. 나는 유년시절 똑똑히 듣고자란 사람입니다. 나이 차이가 30년 나는 아버지뻘의 고종사촌형 친척이라도 빨갱이였고 나의 母親과 나이차이가 5살 차이나니까 대장군의 장남이 외숙모한테 성질난다고 욕설까지하는 일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김수영 금관문화훈장 참여시인 국정교과서 기록된 인물! 참 웃기는 일입니다. 표면만 보면 안됩니다. 실상을 보아야지요! 성악가 안성현은 빨갱이 맞습니까? 틀림니까? 아닙니다. 북한에 살던 집이 있었으니까 월북한 것이죠! 친일적 음악인은 맞으나 친일파는 아닙니다. 실사구시 정확한 역사적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默자 항렬 밑의 대가 바로 壽자 항렬이고 이 밑이 鉉이고 鉉 돌림자 밑에가 가운데글자 돌림 泰字 또는 善이며 밑으론 承자입니다. 안성현의 부친이 안용승이 맞다고 생각되는데 문제는 바로 나주시에서 올라온 글에 安基玉 가야금 명인이란 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安國善이 필자 부친의 養父였습니다.경기도 안성에서 살았으며 서울이전의 선대의 원고향이 안성입니다. 필자 부친은 안국선의 제사를 만 70년 이상 추석 설명절에 차례상을 올리고 향불을 피운 사람입니다. 2000년 7월2일 90세로 별세했습니다. 조부가 3명 증조부가 3명 왜? 이런 복잡한 祭祀와 차례를 올렸는가? 하면 바로 종가댁이 없어졌고 안경수 獄死 후 울화병으로 돌아가신 선대의 일로 또 안국선의 양자로 간 집안의 아들 安必承(안회남, 안막 씨의 6촌 재종형.)이 안성현과 월북했기에 제사를 부친이 모신것입니다. 필자집안은 죽산안문에서 일제강점기 시작 직전 이미 역적처리된 죽산안씨에서 명륜동에 직가 형제들이 모여서 살다가 큰집의 장손으로 보이는 후손은 완전히 호적본이 백지상태 태어난 날짜만 있지 언제 장가들고 죽었단 기록이 전무한 호적본... 특이한 점은 戶主의 本官(본관)이 없습니다. 백지상태의 호적입니다. 그러고 난후 찾아진 후의 본관이 순흥안씨로 종로구청에 잘못된 本官기록으로 수 십년의 세월을 뿌리를 찾아서 헤매었습니다. 아버지가 허비한 20년 세월을 필자의 7년에 뚜렷해진 윤곽은 바로 인터넷으로 국사편잔위원회 장서각 또는 정신문화연구원의 국립중앙도서관 고문서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었던 편리함 덕택입니다. 증조부 安瑞鉉장군이며 조선왕조실록과 일성록에 분명한 7군대의 문서기록을 찾았고 사진도 찾았습니다. 지금의 서울시 부시장격인 漢城右尹 직함이 생의 마지막 참수되어 구속중인 이승만청년과 함께 종로 한성감옥에 구속중에 억울하게 죽었습니다.안경수장군의 조카란 사진도 찾았고 안광묵 조부님의 사진도 찾았는데 바로 안경수장군이 인천지방에서 전환국방판(現조폐공사)시절 인천시 중구 전동에 있었던 안경수장군의 별장에서 일본낭인들 십 여명과 둘러쌓여서 뒷줄에는 나란히 증조부와 삼촌인 안경수장군 맨 앞줄 좌측에 안광묵으로 판단되는 사진이 국사편찬위원에 근대사 개화기인물에 분명히 등장했고 바로 이사진의 나오는 인물이 1930년대 중반 숙명여고를 찾았던 최승희 무용가가 학생들과 함께 교장과 학교관계자들 앞줄에서 찍힌 사진에서 安光默으로 강력히 추정되는 사진의 인물은 왼손잡이가 분명한데 바로 넥타이 매는 형태가 왼손잡이가 매면 나타나는 매듭 중앙부분이 틀어진 방향입니다. 관료이면서 평상시 무슨 악기를 달 다뤘는지 왼손의 엄지 검지를 둥그렇게 움켜쥐는 모습의 사진상 동일인물 사간차는 1896년경 사진과 1930년대의 사진 40년가까이 지난 사진에서 동작이 똑같습니다. 찍힌 사진의 폼과 손동작 넥타이 매듭방향 똑같은 폼인 무릎위에 얹은 왼손의 모습이었습니다. 원한다면 사진 보내드립니다. 安光默 일본통 관료출신 김홍집총리의 비서관 맞습니다. 안경수장군의 인천별장에서 宴會(연회)사진으로 일본인 낭인들과 찍힌 안광묵추정사진과 최승희가 숙명여고 방문시 찍은 옆자리 안경쓴 키자 좀 적으신 후덕한 인상의 70대 중반을 보이는 인물이 바로 안경수의 인천별장에서 찍힌 30대 모습의 사진이며 동일 인물임이 판독됐기 때문입니다. 安光默은 필자의 1911년생 부친과도 많이 거진 80% 닮은 인물이고 키가 사진판독상 아무리 커도 165Cm 이하의 적은 체구의 사람입니다. 일본의 명치유신 개혁을 모델로 한 조선말기 갑오경장시 주도적 인물이 바로 김홍집총리대신과 독립협회장(군부대신)안경수였고 안경수장군 부친은 光武元年 官報에는 安光逸로 나타납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안경수의 부친이 安光默으로 기재됐습니다. 골머리 아프다 칠순 노인 필자가 성의껏 올린 글에 관하여 기재사항이 틀렸다면 이유나 토론의 장에서 밝혀주기 바랍니다. 마지막 나가는 말씀으로 安聖鉉 부친은 安基玉, 조부 安永吉, 증조부(?) 고조부 安光默 이하로 내려오는 돌림자는 맞지 않는 한자의 돌림자로 보여집니다. 한 마디로 신분을 밝힐 이유가 없었고 그럭 저럭 실존주의 차원에서 선대의 슬픔을 덮고 그저 호구지책상 살아갈려고 그랬을 것입니다. 인간은 모름지기 정직해야 됩니다. 북한이 1972년까지 남한보다 더 잘 살았기에 또 안성현의 고조부님은 큰 정변사태 (1900년 5월28일_ 안경수 교수형)피해를 당한 후 앞서 장문의 글 내용처럼 종가집 장손들이 함경도로 추방(유배)갔었던 일로 반세기 동안 함경도에 살면서 자리 잡았던 겁니다. 안성현은 한국전쟁발발 이전부터 함경도에 살던 집이 있었기에 북으로 친족 안막 최승희 무용가와 더불어 일본유학에서도 친족끼리 왕래가 잦았을 것이며 나이 또한 안성현과 1살 터울인 시인 김수영도 일본유학했습니다. 서울토박이 종로구 묘동 종묘앞 171번지 태생인데 어찌하여 북한 함경도말씨 때론 평안도말씨의 욕설도 잘 했습니다. 친척끼리 끼리 월북한 것이고 외척인 詩人 김수영(1921년생)의 두 명의 동생 김수강 김수경등 동생뻘의 외가 친척 사람들과 모두 함께 월북한 것입니다.
  3. 다른 인터넷 정보에 의하면 안성현의 부친 이름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다음의 내용입니다. 아버지 안용승(함흥지역 유지) , 숙부 안막(문학평론가), 숙모 최승희(무용가), 숙부 안재승(연극연출가), 5촌 종숙부 안회남(소설가), 종조부 안국선(소설가)... 안성현(安聖鉉, 1920년 ~ 2006년 4월 25일)은 일제 강점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테너 성악가 겸 작곡가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