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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요시 마사카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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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요시 마사카쓰(일본어: 三好政勝, 1536년 ~ 1632년 1월 31일)는 미요시 마사나가의 아들로, 미요시 마사야스(三好政康)의 동생이다. 관위는 우에몬노타이후(右衛門大夫), 이나바노카미(因幡守).

생애[편집]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와 호소카와 하루모토가 대립하던 가운데, 1549년(덴분 18년), 아버지가 에구치 전투에서 미요시 나가요시에게 살해당하자, 사누키고자이 모토나리단바하타노 하루미치와 함께, 나가요시에 대하여 철저하게 맞섰다고 한다. 그러나 나가요시의 사후는, 미요시 일족으로서 미요시씨를 잘 보좌했다.

이윽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입경해 오자, 마사카쓰는 미요시 산닌슈(三好三人衆)와 함께 이즈미의 오다 측 성을 낙성시키고, 아시카가 요시아키혼코쿠지에서 공격하는 혼코쿠지의 변을 일으키는 등 노부나가에게 반하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1570년(겐키 원년)의 노다 성·후쿠시마 성 전투가 한창일 때 노부나가에게 항복하고, 그의 가신이 되어 셋쓰의 영토가 안도되었다.

하지만 1572년(겐키 3년)에는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미요시 요시쓰구호소카와 노부요시의 항쟁 중에, 마쓰나가 측에 속하여 노부나가가 비호하고 있던 노부요시를 공격했다(《에이로쿠 이후 연대기(永禄以来年代記)》).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얼마간 사료 상에서는 자취를 감춘다. 혼노지의 변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에게 사관했다고 여겨지며, 이후 자료에 등장하는 것은 1592년임진왜란에 즈음해, 히젠 나고야혼마루 반슈를 맡은 우마마와리로서이다(《태합기》). 히데요시의 사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사관하고, 세키가하라 전투 후는 2020석을 영유했다고 한다. 그 후는 도쿠가와 측으로 오사카 전투에도 출진하고, 96세라고 하는 장수를 누렸다.

사나다 십용사[편집]

마사카쓰는 사다나 십용사의 한 사람인 미요시 이사 뉴도(三好伊三入道)의 모델이라 여겨지고 있다. 실제 마사카쓰의 법명은 '이사(為三)'이다. 그러나 실제로 마사카쓰는 사나다씨와 아무 관련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