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요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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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9년 전 (182.212.6.95님) - 주제: 요동 및 현도군의 부여, 고구려 지배에 관하여

토론하세요[편집]

지금 이 문서에 대해서 되돌리기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양쪽 다 토론을 시작하지 않아서 제가 토론을 개설했습니다. 편집에서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될 때는 되도록 통째로 되돌리기를 자제하시고, 꼭 필요한 부분만 하는 것이 싸움을 불필요한 감정 싸움을 피하는 방법이고, 문제의 핵심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혹시 문서 편집이 아니라 싸움이 목적이라면 제가 차단을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10k (토론) 2014년 4월 5일 (토) 08:31 (KST)답변

요동 및 현도군의 부여, 고구려 지배에 관하여[편집]

漢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樂工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玄菟郡에 나아가 (한나라의) 朝服과 衣幘을 받아갔는데, (현도군의) 高句麗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玄菟)郡에 오지 않았다. 이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상에 작은 城을 쌓고서 朝服과 衣幘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幘溝漊라 부른다.

위 인용문은 《삼국지》〈동이전〉고구려조의 기록으로 이 기록에 대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중국정사조선전》은 주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鼓吹技人을 받은 대상은 고구려왕이다. 漢帝國이 주변 諸集團의 首長에게 鼓吹와 旗 등을 賜與하는 것은 封爵하여 印綬를 주는 것과 함께 漢의 세력권에 歸服한데 대한 댓가로 그 首長에게 한제국의 권위를 부여하는 상징적인 행위로서 널리 행해졌다. A.D. 136년에 夫餘王이 직접 來朝하였을 때도 그에게 黃門鼓吹 등을 주어 귀국케 하였다. 또한 한국의 古代 諸種族들 간에는 崔理의 樂浪國의 自鳴鼓說話나 東明王과 松讓王이 鼓角을 가지고 각기 自國의 위엄을 다투었다는 東明王說話 등에서 보듯이 북(鼓)은 단순한 樂器가 아니라 呪術的인 위력을 지닌 祭器로서 국가와 王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만큼 鼓吹는 곧 王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漢은 고구려왕에게 鼓吹技人을 주어 고구려의 대표로서의 위치를 인정하였지만, 일면으로는 고구려 내의 여러 집단들과 각각 交易關係를 맺어 朝服과 依幘을 주면서 이들 집단들과 개별적인 교섭을 하여 회유하였다. 그에 따라 그들 집단에서 보내진 이들이 玄菟郡에 나아가 교섭을 하니, 玄菟郡의 관리인 高句麗令이 그에 관계된 사항을 관장하였다. 『三國志』韓傳에서 전하듯 漢郡縣에 나가 朝服과 印綬를 받은 韓人이 千餘人이나 되었다는 것도 당시 中國郡縣의 그러한 정책의 소산이다. 그 결과 비록 B.C. 75년 이후 고구려가 漢郡縣의 직접적인 지배하에서는 벗어났으나 고구려 내의 諸集團들은 제각기 漢과 연결되는 면을 지녀 일종의 遠心分離現象을 낳았다. 이로 말미암아 王室을 中心으로 한 중앙집권력의 성장에 제약을 가하게 되어 고구려국은 漢의 영향권하에 예속된 상태를 당분간 지속케 되었던 것이다. 1C 초 王莽이 胡를 치는데 고구려병을 강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고구려에 작용하고 있던 그러한 중국의 영향력을 말해주며, A.D. 47년 蠶支落 大加 戴升의 一萬口가 後漢으로 이탈한 것도 그러한 면이 있다.

부여의 경우는 아예 본래부터 현도군에 속하였다. (중략) 부여왕 위구태는 (소속을) 바꾸어 요동군에 복속하였다.라고 적고 있을 정도입니다. 부여와 고구려를 비롯하여 만주 및 한반도 지역의 초기 국가들은 부족 국가 수준의 단계에서부터 차근차근 발전해 나갔으며, 그 과정에서 중국에 예속되기도 하고, 그런 중국의 권위를 이용하기도 하고, 혹은 중국과 맞서 힘을 결집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역사의 길을 걸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든 간에 주변의 강대국에 지배를 당하기도 하고 투쟁하기도 하면서 이어온 것이 역사라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의 고정관념에만 사로잡혀 고구려가 요동군의 다스림을 받았을리가 없다는 아무 근거 없는 주장만 되풀이하면서 되돌림 분쟁을 반복하는 것이 과연 역사라는 고고한 흐름을 올바로 보는 것일까요? 대체 누가 누구에게 근거를 제시하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현 분쟁을 강행하고 있는 아이피 사용자는 장구한 역사의 흐름을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자중하시기 바랍니다.--Xakyntos (토론) 2014년 6월 23일 (월) 11:10 (KST)답변

'다스림'은 '예속'이나 '복속'과는 다른 개념이거든요. 제발 국어 사전을 찾아보시고 타인을 비판하시기 바랍니다.--182.212.6.95 (토론) 2014년 6월 23일 (월) 16:55 (KST)답변
귀하가 언제 다스린다는 용어에 대해서 언급이라도 한 적이 있습니까? 처음부터 귀하가 다스린다는 용어의 구체성을 문제로 삼았다면 이런 분쟁은 벌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귀하가 하신 일은 되도 않는 조공이나 들먹이면서 되돌림 분쟁만 일으켰을 뿐이죠.

위와 같은 기록이 존재하는지조차 전혀 모르고, 기록을 제시해주니 학계의 논의를 가져오라구요?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합시다.

학계의 논의를 가져와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귀하였습니다. 그 기록이 신빙성 없다는 증거-학계의 논의-를 제시하지 않는 한 귀하의 행동은 빼도박도 못하는 반달행위였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귀하가 한 편집 중에 학계에서 제대로된 논의가 되었던 것이 존재하긴 합니까? 고조선 건국 연대를 제외하면 귀하의 편집은 지금까지 단 하나도 문서에서도 인정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분께서 대체 무슨 증거를 가져오라 하십니까? 제발 부탁인데, 국어 사전이니 뭐니 하기 전에 학계의 정설이라도 좀 알고 오시기 바랍니다.--Xakyntos (토론) 2014년 6월 23일 (월) 23:43 (KST)답변

학계의 정설을 논의하는 것은 수많은 용어에 대하여 정확한 정의를 알고 난 후입니다. 제발 부탁인데, 국어 용어의 정의를 모른 채 토론하는 것을 지양하십시오. [귀하가 언제 다스린다는 용어에 대해서 언급이라도 한 적이 있습니까? 처음부터 귀하가 다스린다는 용어의 구체성을 문제로 삼았다면 이런 분쟁은 벌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귀하가 하신 일은 되도 않는 조공이나 들먹이면서 되돌림 분쟁만 일으켰을 뿐이죠. ] →

  • 고구려는 한나라의 다스림을 받은 적이 없고 어느 역사서에서도 이를 언급한 바가 없으며, 누군가의 반달 행위임이 자명함. 사용자토론:182.212.6.95에 2014년 6월 7일 작성

이라 저는 차단되었던 기간에 이미 글을 썼습니다. 저는 다스린다는 용어에 대해서 언급이라도 하였고, 다스린다는 용어의 구체성을 문제 삼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귀하는 동문서답을 하였죠. 또 조공은 하나의 예였을 뿐이지만 본래 주제에서 벗어나 대답을 피한 것도 귀하입니다. 그리고 토론:낙랑군 에서 말도 안되는 행보를 보이신 귀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십시오. 존재하지도 않는 '국제 학계 통설'을 새로이 주창하는 것도 누구에게나 인정받지 못합니다.

저는 위만, 고조선에서 기여한 바가 있으며, 명도전, 임둔군에서 재야사학계의 입장을 반영하도록 간혈적으로나마 기여하였습니다. 또 많은 부분에서 해당 사용자와 토론을 하기도 하였고, 이런 과정에서 기여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정하기를 부정하는 것은 귀하입니다. 고작 옳은 편집은 '고조선의 연대' 였다 라고 말씀하고 싶으시겠지요. 그리고 귀하의 행위는 '허위 사실 유포'이고, 인신공격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아래 발언을 근거로 차단 요청을 하겠습니다.

  •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합시다.
  • 지금까지 귀하가 한 편집 중에 학계에서 제대로된 논의가 되었던 것이 존재하긴 합니까? 고조선 건국 연대를 제외하면 귀하의 편집은 지금까지 단 하나도 문서에서도 인정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분께서 대체 무슨 증거를 가져오라 하십니까?

--182.212.6.95 (토론) 2014년 6월 24일 (화) 00:56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