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에 조선체육회는 제4회 정기총회를 통해 모든 종목의 기초가 되는 육상 경기를 장려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23년 7월 4일 이사회를 통해 전조선육상경기대회 개최를 위한 연구와 실행위원을 위촉했다.[2] 조선체육회는 전조선육상경기대회 개최를 위해 휘문고등보통학교의 소유주인 민영휘가 계동궁의 절반을 사서 마련한 휘문고등보통학교 운동장을 경기장으로 사용하기로 했다.[1] 근대식 육상 경기 진행을 위해 영국에서 유학한 서병희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육상 경기 트랙을 설계하여 경기장 가운데에 100m 직선 코스를 만들고 한 바퀴가 333m인 트랙을 만들었다.[1] 또한 그 동안 마련한 기금인 5000원으로 육상 경기에 필요한 허들 등의 기구를 마련했다.[1]
한편 대회를 사흘 앞둔 6월 11일에 양정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육상 경기 훈련 도중 사망사고가 발생했다.[1] 대회를 대비하여 양정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인 김두환이 휴식 시간을 이용해 던진 창이 같은 학교 3학년 학생인 한세열의 가슴 부위에 꽂혔다.[1] 사고 직후 한세열은 가슴에 꽂힌 창을 뽑고 교무실로 향했지만, 교무실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사망했다.[1]
제1회 전조선육상경기대회는 1924년 6월 14일부터 이틀간 일제강점기 조선경성부에 있는 휘문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1] 마라톤 경기 종목은 오늘날과 달리 15 mi 거리로 진행된 마라톤을 비롯하여[3] 총 18개 세부 종목으로 진행되었고, 양정고보, 청년학관, 휘문고보, 경성상업, 선린상업, 협성실업, 제2고보, 보성전문, 중앙고보, 동래고보 등을 비롯한 단체와 강계, 평양 등지에서 온 은행원, 상인, 실업인들을 비롯하여 총 400여 명의 선수가 참가했다.[1] 당시 조선체육회는 다리에 힘을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육상 경기에 참가하는 것은 아마추어 정신에 위배된다고 판단하여, 인력거꾼, 우편배달원, 신문배달원 등 평상시 다리 힘을 쓰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에 대해 참가자격을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