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 트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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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초창기의 호찌민 트레일

호찌민 트레일은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을 공격하기 위해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 영토를 경유하여 병력과 군수품을 이동시키던 경로이다. 호찌민 루트라는 명칭으로도 많이 불린다.

개요[편집]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을 사이에 두고 있던 북위 17도의 비무장 지대는 매우 엄중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때문에 북베트남이 남베트남 국내의 반정부 게릴라(비엣민)에게 비무장 지대를 통해 지원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트럭 등의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도로에서 도보로만 통과할 수 있는 길까지 이용하여 라오스령, 캄보디아령까지도 통과하면서 물자, 병력의 투입이 이루어졌다. 직선 거리는 1400km에 달했다.

라오스령과 캄보디아 영내의 루트에 관해서는 북베트남이 제멋대로 사용하여 국경을 침범하는 것이었지만, 두 나라는 이를 묵인했다. 라오스에서도 북베트남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라오스 내전)

미군은 캄보디아 국경 근처 베트남 중부 고원 지방의 이아 드랑 계곡[1]으로 전개를 시도했다. 그러나 미군을 저지하려는 북베트남군과 이아 드랑 계곡 전투(1965년 11월 14일 - 11월 18일)가 벌어졌다. 미군은 전투 자체는 승리하였지만 지속적인 교두보 마련에는 실패했다.

미군은 루트를 파괴하기 위해 루트가 지나가는 산에 살고 있는 원주민인 먀오족(몽족)의 일부 (우파 묘족)를 금품으로 길들였다. 우파 묘족들의 청소년들이 소집되어 군사 훈련을 했고, 무기를 들고 루트를 파괴하는 공작을 했다. 미군은 하늘에서도 매일 같이 루트를 집속탄 등으로 폭격했다. 이에 대항하여 북베트남은 20만 명의 인원을 동원해 루트가 파괴되더라도 즉시 복구할 수 있도록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 중에는 라오스의 공산세력 파테트라오와 우파 묘족의 본연의 자세에 반대하고, 북베트남에 협력적이었던 좌파 묘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루트는 원래 밀림 속 좁은 길을 인력으로만 운반하다가 점차 자전거를 사용하게 되었고, 효율을 높이기 위해 혼다 커브로 수송하다가 결국 트럭으로 버젓이 나르게 되었다. 많은 트럭들이 상공에서 오토바이로 오인되도록 전조등 한쪽을 망가뜨렸다.

1970년 3월에 미군이 캄보디아를 침공, 1971년 2월에는 미국 공군이 라오스에 있던 루트도 거리낌없이 폭격하고 있다 (라무손 719 작전). 따라서 지금도 라오스 북동부에서 불발탄 폭발로 농민이 사상하는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또한 전쟁 중 미국에 협력하여 호치민 루트를 파괴하려고 했던 우파 묘족은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북베트남 측에 붙은 다른 좌파 묘족들과 라오스에 주둔했던 베트남 인민군으로부터 인종청소나 다름없는 처참한 보복을 당해 수만 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아오는 같은 민족이 좌우로 나누어져 대리전쟁을 한 것이다.

결국 우파 묘족들은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남 전쟁 종결 후까지의 전란과 베트남으로부터 보복을 당해 약 20만 명이 사망하고 살아남은 사람도 간신히 태국과 미국 난민이 되어 떠돌게 되었다.

각주[편집]

  1. 잘라이성 성도 소재지 쁠래이꾸에서 남서쪽으로 약 50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