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범우
한범우 韓範愚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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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2년 4월 16일 대한제국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 |
사망 | 1920년 6월 22일 일제강점기 강원도 원주 향리에서 병사 | (18세)
국적 | 대한제국 |
거주지 | 일제강점기 강원도 원주 일제강점기 강원도 춘천 |
본관 | 청주(淸州) |
학력 | 강원도 춘천보통학교 졸업(1915년) |
직업 | 독립운동가 |
부모 | 한준오(부) |
형제 | 3남 2녀 중 차남 (누나 1명, 형 1명, 누이동생 1명, 남동생 1명) |
배우자 | 이익삼(李益三) |
자녀 | 1녀 |
종교 | 유교(성리학) |
정당 | 무소속 |
상훈 |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1990년 3월 1일) |
웹사이트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1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2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3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4 [1] -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국립대전현충원 국가보훈처 공훈록 |
한범우(韓範愚, 1902년 4월 16일 ~ 1920년 6월 22일)는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였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號)는 해청(海靑)이며 1908년에 한범우(韓範愚)로 마지막 개명(改名)을 하기 이전의 아명(兒名)은 한지윤(韓志胤, 출생명.)·한근형(韓勤炯, 1905년 개명하여 1908년까지 사용.)이다.
생애[편집]
삼월 대한 독립 만세 운동[편집]
1915년, 3년 연상의 이익삼 여사와 결혼한 그는 결혼 3년 후 1918년 당시에 외동딸(무남독녀)을 득녀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919년 3월 27일 江原道 原州郡 富論面事務所 앞길에서 韓敦愚, 金性秀 등과 獨立萬歲計劃을 協議하고 있을 때 때마침 退廳歸家하는 原州郡守를 붙잡아 獨立萬歲를 부르도록 要求하여 함께 獨立萬歲를 高唱케하며 活動하다가 被逮되어 춘천지방법원에서 10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未決期間을 合算하여 10月 27日間의 獄苦를 치른 이후 1920년 2월, 춘천형무소를 출소하여 강원도 원주에 귀향하였지만 그 해 6월에 병사하였다.
사후[편집]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90년 3월 1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며 8년 후 1998년 5월 11일을 기하여 그의 유해가 강원도 원주 향리에서 대전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외부 링크[편집]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에서 "한범우"를 검색 Archived 2019년 1월 11일 - 웨이백 머신
- [2] -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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