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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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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본 기념관 전경
가까이서 본 기념비의 모습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독일어: Denkmal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 또는 홀로코스트 기념비(독일어: Holocaust-Mahnmal)는 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홀로코스트 희생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물이다.[1] 이 기념비는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과 부로 하폴드(Buro Happold)가 설계하였다. 기념비는 1.9헥타르(4.7에이커) 규모의 부지 위에 2,711개의 콘크리트 석주(스텔레, stelae)가 격자 형태로 배치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2][3] 당초 계획에서는 약 4,000개의 석주를 설치할 예정이었으나, 재계산 결과 지정된 부지 내에 법적으로 설치 가능한 석주의 수는 2,711개로 결정되었다. 각 석주는 길이 2.38m, 너비 0.95m이며 높이는 0.2m에서 4.7m까지 다양하다.[2] 석주들은 남북 방향으로 54열, 동서 방향으로 87열로 배열되어 있으며, 서로 직각을 이루지만 약간 비스듬히 배치되어 있다.[4][5] 또한 부지 지하에는 '''정보의 장소'''(독일어: ''Ort der Information'')가 마련되어 있으며,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Yad Vashem) 박물관으로부터 제공받은 약 300만 명의 홀로코스트 희생 유대인 명단이 보관되어 있다.[6]

기념비 건설은 2003년 4월 1일에 시작되어 2004년 12월 15일에 완공되었다. 이후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지 60주년이 되는 2005년 5월 10일에 공식 제막되었으며, 이틀 뒤 일반에 공개되었다. 기념비는 베를린 미테(Mitte) 지구의 브란덴부르크 문 남쪽 한 블록 지점에 위치한다. 건설 비용은 약 2,500만 유로였다.[7]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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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사이 모습

기념비는 독일 베를린 코라 베를리너 거리(Cora-Berliner-Straße) 1번지(10117)에 위치해 있다. 베를린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 가운데 하나가 존재했던 도시였다.[8] 기념비는 티어가르텐(Tiergarten)의 동쪽에 인접해 있으며, 베를린의 역사적 중심지인 프리드리히슈타트(Friedrichstadt) 지구 중앙부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Reichstag Building)과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 인근에 위치한다.[9]

이 기념비는 과거 베를린 장벽이 있었던 자리에 건립되었으며, 한때 도시를 분단하던 이른바 ‘죽음의 지대’(death strip)가 위치했던 곳이다. 나치 독일 시기에는 이 일대 일부가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의 도시 저택 부지였으며, 남쪽 인근에는 제국총리관(Reich Chancellery)과 총통 벙커(Führerbunker)가 자리하고 있었다.[10] 또한 기념비 주변에는 여러 국가의 대사관이 위치해 있다. 기념비는 2,711개의 직육면체 콘크리트 석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헥타르 규모의 부지 전체에 직사각형 격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배치는 석주 사이에 길고 곧으며 좁은 통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통로를 따라 지면은 완만하게 굴곡져 있다.[9]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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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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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기념비의 필요성과 형태를 둘러싼 논의는 1980년대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텔레비전 언론인 레아 로시(Lea Rosh)와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예켈(Eberhard Jäckel)이 주도한 소수의 서독 민간인들은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600만 명의 유대인을 추모하기 위해 서독 정부가 공식 기념비를 건립할 것을 촉구하기 시작했다.[7][11]

이후 로시는 기념비 건립 운동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는 1989년 기념비 건설을 지원하고 기금을 모금하기 위한 단체를 설립하였다.[12] 지지 여론이 확대되면서 독일 연방의회(Bundestag)는 해당 사업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99년 6월 25일, 연방의회는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이 설계한 안을 채택하여 기념비를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기념비의 운영을 담당할 연방 재단인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 재단」(독일어: Stiftung Denkmal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이 설립되었다.[8]

기념비의 모습

제1차 설계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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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4월, 독일 주요 신문들을 통해 기념비 설계 공모전이 공고되었다. 12명의 예술가가 특별 초청을 받아 설계안을 제출하도록 요청받았으며, 각 참가자에게는 설계 비용으로 5만 독일 마르크(약 2만 5천 유로)가 지급되었다. 당선작은 예술, 건축, 도시계획, 역사, 정치, 행정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에 의해 선정될 예정이었다. 심사위원단에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의 공동 편집인이었던 프랑크 쉬르마허(Frank Schirrmacher)도 포함되었다. 작품 제출 마감일은 10월 28일로 정해졌다. 1994년 5월 11일에는 베를린에서 설명회가 개최되어, 공모전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에게 기념비의 성격과 설계 방향에 대한 추가 정보가 제공되었다. 이 행사에는 독일 유대인 중앙협의회 회장 이그나츠 부비스(Ignatz Bubis)와 베를린 건설담당 상원의원 볼프강 나겔(Wolfgang Nagel)이 참석하여 연설하였다.[13]

마감일 이전에 공모전 관련 서류는 2,600회 이상 요청되었으며, 총 528개의 설계안이 제출되었다. 심사위원단은 1995년 1월 15일 회의를 열어 최종 후보를 선정하였다. 먼저 예술아카데미(Akademie der Künste) 회장 발터 옌스(Walter Jens)가 심사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며칠간의 심사를 거쳐 대부분의 작품이 탈락하였으며, 최종적으로 13개 작품만이 남게 되었다. 당초 계획에 따라 심사위원단은 3월 15일 다시 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 사이 수개월 동안 탈락작을 재검토한 일부 심사위원들의 요청에 따라 11개 작품이 경쟁에 복귀하였다.[7]

이후 심사위원단은 제안된 예산 범위 안에서 실제 건립이 가능한지를 검토하기 위해 두 개의 설계안을 재단에 추천하였다. 첫 번째 안은 함부르크 출신 건축가 지몬 운거스(Simon Ungers)가 이끄는 팀의 작품이었다. 이 안은 콘크리트 기둥 위에 설치된 85m×85m 규모의 정사각형 철제 구조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철골에는 여러 절멸수용소의 이름이 천공되어 있었으며, 햇빛이 비치면 그 이름이 주변의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투영되도록 설계되었다. 두 번째 안은 크리스티네 야코프마르크스(Christine Jackob-Marks)의 작품이었다. 그의 구상은 가로·세로 각각 100m 크기의 거대한 콘크리트 판으로 이루어졌으며, 두께는 7m였다. 이 구조물은 기울어진 형태로 최대 11m 높이까지 솟아오르며, 방문객은 특별히 마련된 통로를 따라 그 위를 걸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콘크리트 표면에는 홀로코스트 희생 유대인들의 이름이 새겨질 예정이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희생자들을 위해 일부 공간은 비워 두도록 하였다. 또한 이스라엘의 산악 요새 마사다(Masada)에서 가져온 잔해를 콘크리트 판 위에 배치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사다는 로마군에게 함락되기 직전 유대인 주민들이 집단 자결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그 밖에도 유대인뿐만 아니라 나치즘의 모든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를 건립하자는 제안도 제시되었다.[11]

그러나 당시 독일 연방총리 헬무트 콜(Helmut Kohl)은 이 사업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야코프마르크스 팀의 설계안을 채택하라는 심사위원단의 권고에 불만을 표명하였다. 결국 1996년 새로운 제한 공모전이 개최되었으며, 25명의 건축가와 조각가가 초청되어 새로운 설계안을 제출하게 되었다.[7]

Eisenman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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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제막식 일정은 취소되었으며, 1997년에는 기념비 건립을 둘러싼 세 차례의 공개 토론 가운데 첫 번째 토론회가 개최되었다.[14]

1997년 11월 실시된 제2차 설계 공모전에서는 네 개의 최종 후보작이 선정되었다. 이 가운데에는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과 예술가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공동 설계안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 안은 이후 최종 당선작으로 채택되었다. 해당 설계안은 원래 17,000m² 규모의 부지에 높이가 서로 다른 4,000개의 석주를 배치하여 거대한 미로를 형성하는 구상이었다.[15]

그러나 세라는 곧 설계팀에서 탈퇴하였다. 그는 프로젝트 자체의 장단점과는 무관한 개인적, 직업적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16] 당시 헬무트 콜 총리는 여전히 설계안의 여러 부분에 대한 수정을 요구하였으나, 아이젠만은 대부분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16] 그 결과 초기 아이젠만-세라 설계안은 축소되어 약 2,000개의 석주로 구성된 기념비 형태로 변경되었다.[15]

1999년에 이르러 기념비 부지 인근의 빈터들이 새로운 건물들로 채워지면서, 약 2헥타르 규모의 공터는 점차 베를린 도심 한가운데의 거대한 빈 공간처럼 보이게 되었다.[17]

1999년 1월, W. 마이클 블루멘털(W. Michael Blumenthal)의 중재 아래 피터 아이젠만미하엘 나우만(Michael Naumann) 사이의 협상이 타결되면서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이 협상을 통해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öder)가 이끄는 차기 독일 정부가 이전에 반대했던 대규모 석주 배열이라는 핵심 개념은 유지되었다.[18]

다만 석주의 수는 약 2,800개에서 1,800~2,100개 수준으로 줄어들었으며, 대신 아트리움과 세 개의 사암 구조물로 이루어진 「기억의 집」(The House of Remembrance)이라는 건물을 추가하기로 하였다. 이 건물은 기록보관소, 정보센터, 전시공간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계획되었다.[18]

또한 건물 옆에는 길이 90m의 「책의 벽」(Wall of Books)을 설치할 예정이었다. 이 구조물은 외부는 무늬가 있는 검은색 강철로, 내부는 유리로 구성되며 최대 100만 권의 도서를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연구자들이 참고할 수 있는 자료를 보관하는 이 공간은 기념비가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거나 상징성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교육적이고 실용적인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는 슈뢰더 정부의 입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기념비 운영을 독일 유대인 박물관(Jewish Museum)이 담당하는 방안에도 합의가 이루어졌다.[18]

1999년 6월 25일, 독일 연방의회는 찬성 314표, 반대 209표, 기권 14표로 아이젠만의 설계안을 승인하였다. 이후 베를린의 전시 디자이너 다그마르 폰 빌켄(Dagmar von Wilcken)이 설계한 박물관 형태의 「정보의 장소」(Place of Information)가 추가되면서 최종 설계안이 확정되었다.[17]

기념비 북쪽 경계 도로 건너편에는 새로운 미국 대사관 건물이 들어섰으며, 이 건물은 2008년 7월 4일 개관하였다. 한동안 미국 대사관 건설 과정에서 요구된 건축 이격거리(setback) 문제가 기념비 계획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또한 1999년 말에는 기념비 부지의 일부가 여전히 시영 주택회사의 소유임이 확인되면서, 해당 토지의 소유권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공사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였다.[19]

2001년 7월에는 「홀로코스트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The Holocaust never happened)라는 도발적인 문구가 신문 광고와 옥외 광고판에 등장하였다. 이는 기념비 건립을 위한 200만 달러 규모의 모금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광고에는 해당 문구와 함께 평온한 산악 호수와 눈 덮인 산의 사진이 실렸으며,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여전히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20년 후에는 그 수가 더욱 많아질 수도 있다."라는 설명이 덧붙여졌다.[20]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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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월 27일에는 기념비 부지에서 상징적인 착공을 기념하는 행사가 개최되었다. 2001년 5월에는 임시 석주들이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역사학자, 박물관 전문가, 미술사학자, 건축이론 전문가들이 참여한 국제 학술회의가 재단 주관으로 개최되었으며, 기념비와 정보센터의 역할 및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2003년 봄에는 본격적인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고, 동시에 공사장 주변 울타리에는 안내 시설이 설치되었다. 2003년 10월 14일, 스위스 신문 《타게스안차이거》(Tages-Anzeiger)는 기념비 건설에 참여한 데구사(Degussa)사가 석주 표면에 사용된 낙서 방지 코팅제 프로텍토실(Protectosil)을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하였다. 또한 데구사는 과거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와 관련된 사업에 여러 방식으로 관여한 전력이 있었으며, 자회사 데게슈(Degesch)는 강제수용소 가스실에서 사용된 치클론 B(Zyklon B)를 생산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보도가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10월 23일 기념비 건설을 관리하는 재단 이사회가 이 문제를 논의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격렬한 논쟁 끝에 이사회는 최종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공사를 즉시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유대인 공동체 대표들은 데구사의 사업 참여 중단을 강하게 요구한 반면, 볼프강 티어제(Wolfgang Thierse)를 비롯한 정치권 인사들은 공사 중단에 반대하였다. 그들은 추가 비용 발생 문제를 지적하며, 나치 범죄와 관련된 모든 독일 기업을 배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티어제는 "과거는 우리 사회 속에 침투해 있다"고 언급하였다.[21]

반면 레아 로시는 데구사 배제를 주장하며 "치클론 B는 명백한 한계선"이라고 반박하였다.[22]

이후 진행된 논의 과정에서는 여러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우선 스위스에서 데구사의 참여 사실이 공개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는데, 데구사와 경쟁 관계에 있던 다른 낙서 방지제 생산업체가 스위스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념비 건설을 담당하던 재단과 레아 로시 역시 최소 1년 전부터 데구사의 참여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 로시는 데구사와 데게슈 사이의 연관성은 알지 못했다고 해명하였다. 아울러 데구사의 또 다른 자회사인 뵈르만 바우케미(Woermann Bauchemie GmbH)가 이미 석주의 기초 공사를 수행한 사실도 확인되었다. 만약 데구사를 사업에서 배제할 경우, 이미 데구사의 제품이 사용된 석주들을 철거해야 했으며, 이에 따른 추가 비용은 약 234만 유로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었다. 11월 13일까지 이어진 논쟁 과정에서 독일 유대인 중앙협의회를 비롯한 다수의 유대인 단체들은 데구사와의 협력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설계자인 피터 아이젠만은 데구사와의 협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23]

결국 2003년 11월 13일 데구사와의 협력을 계속하기로 결정되었으며, 이 결정은 이후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24] 독일계 유대인 언론인이자 작가, 방송인인 헨리크 M. 브로더(Henryk M. Broder)는 "유대인들은 이 기념비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돼지우리라고 해서 코셔(kosher)로 선언할 생각도 없다"고 비판하였다.[25][26]

완공 및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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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는 2004년 12월 15일 완공되었다. 이후 유럽 전승기념일(V-E Day) 6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2005년 5월 10일 공식 제막되었으며, 정보센터와 함께 이틀 뒤 일반에 공개되었다.[27] 당초에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해방 59주년인 2004년 1월 27일 완공될 예정이었다.[28]

제막식은 당시 독일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으며,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öder) 총리도 참석하였다. 행사는 기념비 부지 가장자리에 설치된 대형 흰색 천막에서 진행되었으며, 그 장소는 히틀러의 지하 벙커가 있었던 위치에서 불과 수 미터 떨어진 곳이었다.[11]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사비나 볼란스키(Sabina Wolanski)는 600만 희생자를 대표하여 연설자로 선정되었다. 그는 연설에서 홀로코스트가 자신에게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아 갔지만, 동시에 증오와 차별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고 말했다. 또한 홀로코스트 가해자들의 자녀들은 부모의 행동에 책임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29]

연설이 끝난 뒤에는 뉴욕 제5번가 회당(Fifth Avenue Synagogue)의 하잔(성가 인도자) 요제프 말로바니(Joseph Malovany)가 히브리어와 이디시어 노래 모음곡을 불렀다. 그는 폴란드 브로츠와프(Wrocław)의 백황새 회당(White Stork Synagogue) 합창단과 니더슐레지엔 독일-폴란드 청소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반주를 받았다.[11]

2005년 5월 개관 이후 첫 1년 동안 기념비 방문객 수는 350만 명을 넘어섰다.[30]2005년 말까지 약 35만 명이 정보센터를 방문하였으며,[7] 2015년 12월까지 누적 방문객 수는 약 500만 명에 달한 것으로 추산된다. 2006년부터 2015년까지 정보센터의 연평균 방문객 수는 약 46만 명이었다.[31]

기념비를 운영하는 재단은 이러한 결과를 성공으로 평가하였다. 재단 대표 우베 노이메르커(Uwe Neumärker)는 기념비를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명소(tourist magnet)"라고 평가하였다.[30]

구조적 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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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가 공식 개관한 지 3년이 지난 뒤, 압축 콘크리트로 제작된 석주의 절반가량에서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균열을 유대인 공동체의 불멸성과 지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으로 해석하였으나, 기념비 재단은 이러한 해석을 부인하였다. 또한 일부 연구자들은 기념비에 희생자 개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다는 점이 홀로코스트 희생자 수의 압도적인 규모를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분석하였다. 즉,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유대인의 수가 너무나 방대하여 물리적으로 시각화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32]

기념비 건설 초기부터 전문가들은 풍화 작용, 변색, 낙서 등으로 인한 훼손 가능성에 우려를 제기하였다. 실제로 2007년에는 약 400개의 콘크리트 석주에서 미세한 균열이 발견되면서 긴급 보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사용된 콘크리트 재료의 품질이 낮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설계자인 피터 아이젠만은 이러한 비판을 반복적으로 부인하였다.[33][34]

2012년 독일 당국은 구조 안전성 조사 결과 일부 석주가 자체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할 위험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수백 개의 석주 내부에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강철 보강재를 설치하는 보수 작업이 진행되었다.[35]

정보 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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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센터는 기념비 부지의 동쪽 끝, 석주 지대 아래에 위치해 있다. 관람 동선은 나치가 1933년 집권한 시점부터 1941년 100만 명이 넘는 소련 유대인들이 학살된 시기까지, 이른바 ‘최종 해결’(Final Solution)의 전개 과정을 정리한 연표로 시작된다. 이후 전시는 비극의 개인적 측면을 다루는 네 개의 전시실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다. 전시 내용에는 특정 유대인 가족들의 삶과 운명, 그리고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되던 열차에서 던져진 편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36]「가족의 방」(Room of Families)은 15개 유대인 가족의 구체적인 삶과 최후를 조명한다. 「이름의 방」(Room of Names)에서는 이스라엘 야드 바셈(Yad Vashem) 기념관이 수집한 홀로코스트 희생 유대인들의 이름이 낭독된다.[37]

각 전시 공간에는 지상에 위치한 석주들을 연상시키는 시각적 요소가 적용되어 있다. 직사각형 형태의 벤치, 수평으로 배치된 바닥 표식, 수직 조명 등이 그것이다.[4]

일부 비평가들은 정보센터의 위치 선정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정보센터는 기념비 동쪽 가장자리에 비교적 눈에 띄지 않게 배치되어 있다. 건축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격자형 콘크리트 천장이다. 물결치듯 굴곡진 천장 표면은 지상 석주와 통로의 배열을 반영하고 있으며, 방문객들에게 마치 거대한 묘역 속으로 들어온 듯한 인상을 준다.[10]

한 비평가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미학적 측면에서 정보센터는 개방형 기념비가 의도한 방향성과 상충된다. 지하 기록 전시 공간의 지상 출입 구조물은 직사각형 배열이 만들어내는 질서감과 균형을 훼손한다. 그러나 정보센터의 계단을 내려가 첫 네 개 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이러한 교육적 부속시설에 대한 대부분의 반론은 사라진다." 방문자 센터는 홀로코스트의 가장 중요한 사건과 기억들을 선별된 사례를 통해 압축적이면서도 강렬하게 보여준다. 출입구는 석주들이 만들어내는 통로망을 가로지르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전시 공간은 개념적으로는 존재해서는 안 될 요소, 즉 기념비에 명확한 관람 목적지를 부여한다.[38]

또 다른 평론가는 이렇게 평가하였다.

"전시물들은 문자 그대로의 설명을 제공하며, 이는 기념비를 구성하는 비정형적이고 추상적인 석주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마치 이 전시들이 홀로코스트의 실재를 믿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10]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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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아이젠만의 프로젝트 설명에 따르면, 석주들은 방문객에게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기념비 전체는 인간의 이성과 단절된 채 작동하는, 겉보기에는 질서정연한 체계를 표현하고자 하였다.[39]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 재단의 공식 영문 웹사이트에 따르면, 이 설계는 전통적인 기념비 개념에 대한 급진적인 접근을 보여준다. 이는 아이젠만이 기념비의 석주 수와 형태에 특별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고 밝힌 점과도 관련이 있다.[40][41]

그러나 많은 관찰자들은 이 기념비가 유대인 공동묘지를 연상시킨다고 지적하였다.[42][43][44]추상적인 형태의 설치 작품인 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해석은 묘지라는 것이다. 한 연구자는 "이 기념비는 매장되지 못했거나 이름 없는 공동묘지에 묻힌 희생자들을 위한 묘지를 연상시키며, 기울어진 석주들은 오래 방치되거나 훼손된 공동묘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고 평가하였다.[3]

또한 많은 방문객들은 기념비 외부에서 바라본 회색 석주들의 배열이 관(棺)의 행렬과 유사하다고 느낀다고 말하였다. 각 석주는 실제 관과 비슷한 길이와 폭을 가지고 있으나, 아이젠만은 매장지나 무덤을 연상시키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부인하였다.[45]

기념비의 격자 구조는 주변 도로망의 연장선으로 읽힐 수 있는 동시에, 홀로코스트 학살 체계를 유지한 엄격한 규율과 관료적 질서를 불안하게 환기시키는 요소로도 해석된다.[3]

독일 연방의회 의장 볼프강 티어제(Wolfgang Thierse)는 이 기념비를 "고독, 무력감, 절망이 무엇인지를 체감할 수 있는 장소"라고 설명하였다.[46] 그는 또한 기념비가 방문객들에게 일종의 실존적 공포를 불러일으킨다고 평가하였다. 실제로 방문객들 가운데는 거대한 콘크리트 석주들이 베를린의 거리 풍경과 소음을 차단함으로써 고립감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46]

일부 방문객과 베를린 시민들은 회색 석주와 푸른 하늘 사이의 대비가 홀로코스트라는 "암울한 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방문객이 기념비 내부의 경사진 통로를 따라 내려갈수록 석주들은 점차 높아지며 시야를 가득 채운다. 반대로 출구를 향해 올라갈수록 석주들은 다시 낮아진다. 이를 제3제국의 부상과 몰락, 또는 유대인 학살을 가능하게 만든 나치 정권의 권력 확대 과정에 대한 은유로 해석하는 견해도 존재한다.석주 사이의 공간으로 잠시 비치는 햇빛은 밝고 따뜻한 삶의 가능성을 상기시키지만, 방문객은 그 빛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유럽 유대인들이 역사적으로 겪어야 했던 불안정한 사회적, 정치적 지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47]

많은 방문객들은 기념비 내부를 걷는 동안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느낀다고 보고하였다. 일부는 외부 세계와 점점 멀어지도록 설계된 하향 경사가 제3제국의 박해가 점진적으로 심화된 과정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게토로 강제 이주되었고 사회로부터 격리되었으며, 결국에는 존재 자체가 말살되었다는 것이다. 방문객이 더 깊숙이 들어갈수록 외부와의 시각적 연결은 사라지며, 완전히 고립된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또한 단체 관람객들이 기념비 내부에서 서로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흔한데, 이는 홀로코스트 과정에서 유대인 가족들이 겪은 이산과 상실을 떠올리게 한다고 해석된다.[48]

일부 연구자들은 회색 석주의 형태와 색채가 나치 정권 아래에서 발생한 정체성 상실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기념비 안으로 들어갈수록 석주 사이의 간격은 넓어지는데, 전체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동일성과 소속감을 통해 규정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공간 구성은 의미를 갖는다.[47]

또한 일부 석주들은 다른 석주들로부터 떨어져 고립되어 있다. 이는 나치 정권이 유대인들에게 강요한 분리와 격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나치 체제의 통일성과 동일성은 배제를 통해 유지되었으며, 건축사학자 앤드루 벤저민(Andrew Benjamin)은 이러한 공간적 분리가 "더 이상 전체의 일부로 기능할 수 없는 개별 존재"를 나타낸다고 설명하였다.[47]

석주들이 완전히 동일한 형태를 이루지 않는 점 역시 기억의 과제를 상징하는 요소로 해석된다. 일부 석주는 미완성 상태처럼 보이는데, 이는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작업이 결코 끝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있다. 벤저민은 "이 기념비는 미완성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설명하였다.[47]

홀로코스트의 영향을 완전하게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념비 역시 의도적으로 완결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한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구조물의 빈 공간과 불완전성은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유대인 공동체 구성원들의 부재를 상징하며, 홀로코스트가 유대인 문화와 역사 속에 남긴 공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47]

한편 기념비의 구조는 집단성에 대한 감각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해석도 제기되었다. 일부는 이를 독일 사회 내 집단적 죄책감의 부재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며, 다른 이들은 석주들의 공간적 배치가 홀로코스트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일부 독일인들은 이 기념비가 독일 사회를 직접 겨냥하고 있다고 해석하며, 이를 "과거에 대한 우리, 즉 비유대계 독일인들의 책임을 표현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49]

또한 기념비는 나무와 베를린 도심 환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일종의 폐쇄된 공간을 형성한다. 이러한 경계는 방문객들에게 갇혀 있다는 감정을 유발하는데, 일부 연구자들은 이를 1938년 에비앙 회담(Évian Conference) 이후 유럽과 미국이 난민 수용을 거부함으로써 유대인들이 독일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의 상징으로 해석하였다.[49]

한편 여러 연구자들은 기념비를 구성하는 석주의 수인 2,711개가 《바빌로니아 탈무드》(Babylonian Talmud)의 전체 쪽수와 동일하다는 점에 주목하였다.[50]

대중 인식과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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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념비는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희생자만을 추모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이후 나치 정권의 다른 희생 집단을 기리는 별도의 기념물이 건립되었다. 대표적으로 2008년 개관한 「나치 정권하 박해받은 동성애자 기념비」와 2012년 개관한 「국가사회주의 희생 신티·로마인 기념비」가 있다.[51]

또한 많은 비평가들은 기념비에 희생자들의 이름, 희생자 수, 그리고 학살이 이루어진 장소 등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16] 반면 건축 평론가 니콜라이 우루소프(Nicolai Ouroussoff)는 이 기념비가 "감상주의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전달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추상이 인간 감정의 복잡성을 표현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하였다.[36]

일부 독일인들은 이 기념비가 단순한 조형물에 불과하며 나치 정권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충분히 기리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기념비 건립이 독일 사회가 보다 적극적인 형태의 기억과 성찰에 참여해야 할 책임을 외면하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다른 이들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을 지배했던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의 전체주의 역시 기억되어야 함에도 기념비가 이를 무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일부 독일 시민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유럽 지역에서 추방된 독일인들을 기리는 기념비는 건립되지 않았다는 점에 불만을 표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비평가들은 이미 여러 강제수용소가 기념 공간으로 보존되어 있는 만큼 베를린에 별도의 기념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다른 이들은 베를린에서 번성했던 유대인 공동체를 기억하기 위해 수도 한복판에 기념비가 존재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49]

1998년 초에는 작가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를 비롯한 독일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기념비 건립 계획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6] 몇 달 뒤 독일 소설가 마르틴 발저(Martin Walser)는 독일 출판평화상(Peace Prize of the German Book Trade)을 수상하면서 한 연설에서 이 기념비를 언급하였다.[52]

발저는 독일의 과거에 대한 수치심이 현재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독일 사회가 과거의 죄책감을 지나치게 기념비화하고 있으며, 수치심이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아우슈비츠는 일상적인 위협 수단이나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도덕적 곤봉(Moralkeule)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그는 의례화된 기억이 결국 형식적인 언급에 그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였다.[52]

1991년부터 2001년까지 베를린 시장을 지낸 에버하르트 디프겐(Eberhard Diepgen) 역시 공개적으로 기념비 건립에 반대하였으며, 2000년에 열린 착공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기념비가 지나치게 규모가 크고 보호 또한 어렵다고 주장하였다.[19]

이러한 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2005년 개관식 연설자로 참석한 당시 독일 유대인 중앙협의회 회장 파울 슈피겔(Paul Spiegel) 역시 기념비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는 이 기념비가 "불완전한 진술"이라고 평가하였다. 비유대인 희생자들을 포함하지 않음으로써 마치 희생의 위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고통과 슬픔은 모든 피해자 가족에게 똑같이 크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슈피겔은 기념비가 나치 가해자들에 대한 정보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도 비판하였다. 그는 이러한 구성으로 인해 방문객들이 범죄의 주체와 직접 마주할 기회를 잃게 된다고 주장하였다.[11]

2005년 레아 로시는 1980년대 후반 벨제츠(Bełżec) 절멸수용소에서 발견한 희생자의 치아를 기념비의 콘크리트 석주 내부에 안치하자는 계획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베를린 유대인 공동체는 이에 반발하며 기념비 보이콧 가능성을 언급하였고, 결국 로시는 계획을 철회하였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유대인의 유해는 유대인 공동묘지에만 매장될 수 있다. 다만 랍비 이츠하크 에렌베르크(Yitzhak Ehrenberg)는 이러한 규정이 시신 전체 또는 주요 신체 부위에 적용되는 것이며, 개별 치아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53]

한편 일부 학자들은 이 기념비가 독일 사회의 이른바 "홀로코스트 집착"을 강화한다고 비판하였다. 토론토 대학교의 사회학자 미할 보데만(Michal Bodemann)은 독일의 지속적이고 침잠적인 홀로코스트 기억 문화를 비판하였다. 그는 전후 독일-유대인 관계를 연구하면서, 독일 사회가 과거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현재 사회의 인종주의 문제를 간과하고 미래에 대한 비관적 태도를 조장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현재를 직시하지 않기 위해 역사 속으로 숨어드는 것처럼 보인다"고 평가하였다.[54]

또 다른 주요 비판은 기념비의 추상성과 모호성에 관한 것이다. 콘크리트 석주들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나 역사적 정보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또한 기념비의 명칭에도 "홀로코스트(Holocaust)"나 "쇼아(Shoah)"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비평가들은 기념비가 누가 학살을 자행했는지, 왜 그러한 범죄가 발생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히틀러 정권 아래의 독일이 저지른 범죄"라는 식의 설명이 전혀 없으며, 이러한 모호성이 문제라는 것이다.[3]

기념비의 헌정 방식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한 연구자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베를린의 석주 기념비는 기억의 전통적 도상학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설명마저 포기하였다. 이 설치물은 누구를 기억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희생자들의 이름도, 다윗의 별도, 다른 유대교 상징도 찾아볼 수 없다."[38]

일부 비평가들은 이러한 추상성이 홀로코스트 부정론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한다고 우려하였다. 독일의 대표적인 홀로코스트 기념비에서조차 희생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면, 역사적 사건의 도덕적 의미가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비평가들은 기념비가 방문객들이 이미 홀로코스트의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모두가 알고 있다"는 암묵적 가정이 결국 망각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였다.[3]

마지막으로 일부에서는 이 기념비가 극우 및 네오나치 세력의 순례지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였다. 최근 몇 년간 대안우파(alt-right) 운동이 성장하면서, 극단주의 단체들로부터 기념비를 보호해야 한다는 문제가 다시 논의되고 있다.[46]

기물 파손 및 무례한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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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The Holocaust and social media

기념비는 개관 이후 여러 차례 훼손 사건의 대상이 되었다. 설계자인 피터 아이젠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 정부는 네오나치 세력이 기념비에 하켄크로이츠(만자) 등을 그릴 가능성을 우려하여 석주 표면에 낙서 방지 코팅을 적용하였다.[36]

실제로 개관 첫해에만 다섯 차례에 걸쳐 석주에 하켄크로이츠가 그려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55] 2009년에는 약 2,700개의 회색 석주 가운데 12개에서 하켄크로이츠와 반유대주의 구호가 발견되었다.[56]

2014년에는 인터넷에 한 남성이 기념비에서 소변을 보는 모습과 새해 전야에 방문객들이 폭죽을 터뜨리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공개되었다. 이에 독일 정부는 기념비 경비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하였다.[57]

한편 기념비는 종종 여가 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하며, 이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추모 공간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건축 평론가 니콜라이 우루소프(Nicolai Ouroussoff)는 자신이 기념비를 방문했을 때 "두 살가량의 아이가 석주 위를 뛰어다니며 다른 석주로 올라가려 했고, 어머니는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10]

2016년에는 증강현실 게임 《Pokémon Go》와 관련된 논란이 발생하였다.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 재단은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기념비가 게임 내 포켓몬을 발견하고 포획할 수 있는 장소로 등록되어 있다고 밝혔다.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홀로코스트 추모 공간을 게임 플레이 장소로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비판하였다. 재단 대변인 자라 프리드리히(Sarah Friedrich)는 "이곳은 학살된 600만 명의 유대인을 추모하는 장소이며, 이러한 종류의 게임에 적합한 공간이 아니다"라고 밝히며 운영사에 해당 장소를 게임 내 위치 목록에서 제외할 것을 요청하였다.[58]

2017년 초에는 이스라엘 예술가 Shahak Shapira가 기념비를 배경으로 촬영된 부적절한 사진들에 주목하였다. 그는 Facebook, Instagram, Tinder, Grindr 등에 게시된 사진들 가운데 웃으며 셀카를 찍거나, 요가를 하거나, 석주 위에서 점프하거나 춤추는 모습이 담긴 게시물을 수집하였다. 이후 그는 이러한 사진들을 나치 절멸수용소의 기록 사진과 병치하는 온라인 예술 프로젝트 「욜로코스트(Yolocaust)」를 공개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엄숙한 추모 공간에서 지나치게 유쾌한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와 홀로코스트의 역사적 현실 사이의 괴리를 풍자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59]

2013년 1월에는 블로그 《Totem and Taboo》가 동성애자 데이팅 애플리케이션 《Grindr》 이용자들이 기념비에서 촬영한 프로필 사진들을 수집해 공개하였다.[60]

이 현상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당시 그라인더 최고경영자였던 Joel Simkhai는 자신 역시 유대인이자 동성애자로서 이용자들이 홀로코스트의 기억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밝혔다. 반면 국제 사회에서는 기념비를 만남용 프로필 사진의 배경으로 사용하는 것이 추모 공간에 대한 존중을 결여한 행위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61][62]

2025년 2월 21일에는 기념비 부지에서 흉기 공격 사건이 발생하였다. 19세의 시리아 난민이 30세의 스페인 남성을 흉기로 공격하여 중상을 입혔다.[63][64] 가해자는 이후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13년형을 선고받았다.[6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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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문화

독일의 홀로코스트 기념 공간

파시즘과 군국주의 희생자 기념비

폴란드 병사 및 독일 반파시스트 기념비

다뉴브 강변의 신발들

소련 전쟁기념비(트렙토어 공원)

2025년 베를린 홀로코스트 기념비 흉기 난동 사건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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