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섭 (법조인):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새 문서: {{공직자 정보 |이름 = 김홍섭 |원래 이름 = |그림 = |그림설명 = |국가 = 대한민국 |직책 = 서울고등법원장 |임기 = 19...
 
58번째 줄: 58번째 줄:
[[분류:대한민국의 대법관]]
[[분류:대한민국의 대법관]]
[[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
[[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
[[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교도]]
[[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2018년 3월 14일 (수) 15:17 판

김홍섭
대한민국의 서울고등법원
임기 1964년 3월 12일 ~ 1965년 3월 16일
전임 한성수
후임 홍남표

신상정보
출생일 1915년 1월 1일(1915-01-01)(109세)
출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망일 1965년 3월 16일(1965-03-16)(50세)
학력 서울대학교 법학 학사
종교 가톨릭(바오로)

김홍섭(金洪燮, 1913년 ~ 1965년 3월 16일)은 서울고등법원장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현직 재직 중에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생애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난 김홍섭은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해 1941년 4월부터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단발하라는 조선총독부의 압력에도 "변호사는 자유업"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서울지검 검사에 임명되어 조재천 검사와 함께 조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등을 수사했다. 하지만 이내 사직하고 뚝섬으로 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김병로 대법원장이 "이런 중요한 시기에 자신의 고민에만 집착하고 있겠느냐"는 호통에 1946년 12월 다시 법조계에 들어갔다.

1961년 12월 광주고등법원장으로 있으면서 경주호를 납치해 이북으로 가기 위해 난동하고 살인했던 경주호 납북기도 사건 항소심 재판장을 맡는 등 주요 형사사건 재판장을 하기도 했는데 피고인 3명에게 사형을 선고한뒤 5분 가량 머리를 숙이고서는 곧이어 피고인들에게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면 재판장석에 앉은 나와 피고인석에 있는 여러분 중에 누가 죄인인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고 말했다.[1]

전주지방법원장,대법원 판사, 광주고등법원장을 역임하고 서울고등법원장에 재직 중이던 1965년 3월 16일에 숙환으로 사망했다. 사망한지 1주년이 되는 1966년 3월 16일 김홍섭의 자택이었던 사직동에서 박귀훈 신부의 집전으로 재야, 재조 법조인들이 모인 가운데 추도식을 했다.[2] 1999년 12월 3일에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동 덕진공원에 법원장 시절에도 흰 고무신과 도시락을 들고 다닐 정도로 청렴 강직으로 통하는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서울고등법원장을 지낸 최대교와 함께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3]

사형제도의 폐지를 주장[4]한 김홍섭은 자신이 판결한 사형수의 대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형수의 유가족을 돌봤다.[5]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