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피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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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전쟁에 위안부가 10만명 씩 끌려가는 상황에서도 하숙집 딸과의 추억으로 2차대전을 언급하는 면에서 현실에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사실 피천득 자신도 인터뷰에서 나는 친일의 글은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젊었을때는 저항해야 했다는 말을 했다. 뒤늦게 현실 인식의 안목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좌익의 주장으로 치부될 위험도 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조금 컸을때, 결혼 후에 3번 만난 짝사랑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그려내는 작가의 상상력에는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그것을 못이룬 아름다운 사랑의 전형처럼 가르치는 대한민국의 교과서도 참으로 한심한 수준이다. 일본은 연애나 성관계도 대체로 빠른 나라로 당시 2차대전때만해도 '잊을 수 없는 남자'를 전쟁터에 보낸 여고생의 이야기 등이 일본의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곤 한다. 실제로 피천득과 아사코의 사이에 어떠한 교감이 있었는지 의문스럽기 짝이 없다.

긍정적인 평가는 수많은 일간지와 TV프로 문인들의 추도사에 있으므로 그 방면 위키사용자에게 맞긴다.그러면 결국 독자에 의해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지리라고 본다.Diabetes333 2007년 7월 6일 (금) 15:23 (KST)[답변]

외부 링크 수정됨 (2018년 11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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